[영화비평]
[비평] 진실의 윤리학, ‘티처스 라운지’
2024-01-24
글 : 유선아

한순간, 이 영화는 유럽 사회의 어느 단면을 서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거나 도난 사건을 발단에 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다다를 법한 결말로 향할 것이라 믿게 만든다. 1.37:1의 화면비와 핸드헬드 카메라가 빚어낸 <티처스 라운지>의 화법은 이따금 다이렉트 시네마를 모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게 한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 없이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장르 법칙을 따르고 있다. 관계의 정치학과 그 반응의 화학작용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은 한편의 심리 드라마다.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대체로 자연 발생한 듯한 사건들이 연쇄되며 파문에 파문을 일으키는 듯한 양상을 띠며 카메라는 그런 현상의 관찰자처럼 행동한다. 공들여 살펴보지 않더라도 드러나는 건 독일 학교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이라는 유럽 정치 사회의 민낯이다. 그러나 <티처스 라운지>는 사안의 핵심에서 비켜서 세워진 세계다. 당연한 세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우리가 믿어왔던 가치의 정의는 무너져내리고 진실이라는 미덕은 힘을 잃는다.

두 가지 진실

두 가지 진실에 대해 말하려 한다. 하나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전모이며 다른 하나는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편적 진리이자 도덕 가치로서의 진실이다. 그리고 두 인물이 있다. 초등학교에 갓 부임한 교사 카를라(레오니 베네슈)와 그가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인 오스카(레오나르트 슈테트니슈)다. 영화는 카를라의 반 아이들이 학교에서 벌어진 잇단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일에서 시작한다. 동료 교사들의 불시 검문과 용의자 지목, 학부모 면담이 카를라의 교실을 한바탕 휩쓸고 난 이후의 어느 장면이다. 수학 시험 시간에 오스카는 가장 먼저 문제를 풀고 카를라에게 시험지를 제출한다. 그러는 사이에 같은 반 학생인 톰이 풀이 과정을 적어둔 쪽지를 베껴 답을 작성한다. 이를 눈치챈 카를라가 자리로 다가가 숨겨둔 쪽지를 빼앗고 새로운 시험지를 내밀자 톰은 그 쪽지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우긴다. 모든 학생이 시험을 치른 뒤 교실을 떠나고 나서 카를라는 톰을 조용히 불러 나무란다. “그런 행동은 친구들에게 공정하지 않단 말이야.”

그것이 친구들에게 공정하지 않아서라는 말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왜 이런 설명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나중에 드러난다. 몇몇 아이들이 시험을 치른 수학 점수의 학급 내 등수를 알려달라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카를라의 설명은 옳았다. 시험 중 저지른 부정직한 행동은 학급 등수에 영향을 미치므로 다른 친구들에게 공정하지 못한 행위다. 말하자면 카를라의 교실 안에서의 도덕은 절대성이 아니라 상대성의 가치에 의해 정의된다. 상대적 가치 규범은 카를라의 교실뿐만 아니라 독일의 이 작은 학교 전체를 장악한다. <티처스 라운지>의 인물들은 절대적 도덕 가치로 서로를 설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 도드라진 장면의 대화는 모두 가치의 핵심을 비껴간다. 카를라의 교실에 갑자기 들이닥친 동료 교사와 교장은 아이들에게 지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라고 명령한다. 아이들은 볼멘소리로 항의한다. “이래도 돼요?” 행위의 정당성을 묻는 아이들에게 교장은 답한다. “싫으면 안 꺼내도 돼. 하지만 숨길 게 없으면 싫을 이유가 없지.”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실은 다른 방식의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카를라가 폴란드 출신의 이민자 가족이라는 사실은 영화에서 두번 드러난다. 한번은 같은 폴란드계 동료 교사에 의해서이고 나머지는 카를라에게 적대감을 품은 교내 신문반 아이들에 의해서다(“선생님 성은 폴란드계죠?”). 전자의 발언은 동지 의식에서 기인하지만 후자는 전후 사건의 맥락과 질문의 불필요함으로 미루어 보아 카를라를 향한 명백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실 카를라는 아이들이 싫어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는 아이들을 지극히 여기는 선생님이었다. 카를라는 자기가 희생할수록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선한 신념의 이상주의자로 등장한다. 지켜볼수록 의아해지는 건 그가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거나 누구를 상대하는지에 따라 말과 태도를 바꾼다는 점이다.

카를라는 노트북으로 촬영한 영상을 근거로 동료이자 오스카의 어머니인 쿤 선생님을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고발한다. 이에 오스카가 찾아와 어머니는 범인이 아니니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자 카를라는 되는대로 응수한다(“엄마 결백하셔. 이제 됐니?” ). 오스카를 두둔하는 반 학생들이 수업을 보이콧하며 범행 증거인 동영상의 유무를 따져 물을 때에도 카를라는 골치가 아프다는 몸짓을 하며 거짓으로 둘러댄다(“그런 거 없어”). 카를라는 늘 누군가의 입장을 변호하며 한 상황에서 어떤 주장을 한 뒤 다른 상황에 놓이면 앞선 말을 실천하기 위해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이상적 신념을 실천하려 할 때마다 주저앉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매번 다른 상대와의 갈등 상황에서 카를라는 늘 명쾌하지 못하다. 심지어 어느 때는 화장실에 가겠다는 아이의 방해로 제대로 항변할 기회마저 잃는다. 카를라와 그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진실을 좇지만 막상 그것을 피해 가는 영화의 화법에 동조한다.

그래서 <티처스 라운지>가 스릴러 장르 문법을 가져오면서도 사건을 해결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도난 사건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믿는 진실이 무엇인지 의심하는 카를라에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진실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데에 스릴러라는 장르 법칙은 잠시 인용될 뿐이다. 결백을 호소하는 쿤 선생님의 근거가 빈약해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영화가 진실을 미끼로 우리를 눈속임해서다. 관객은 영화가 좇는 진실과 결코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 영화는 진실에 대한 명제를 이렇게 제시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것이 밝혀지는 일 또한 중요하지 않다. <티처스 라운지>에서 진실은 영화를 움직이지만 정작 그것은 찾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다.

신념의 실천

아직 한 가지 명제가 더 남아 있다. 진실은, 그게 무엇이든, 그 자체로 진실하다. 이를 적극 실천하는 인물은 소년 오스카다. 오스카는 영화가 이끄는 세계에 동조하지 않는 독보적 인물이다. 오스카는 절도범으로 몰린 어머니의 결백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범행 장면을 담은 영상을 없애기 위해 카를라의 노트북을 훔쳐 강에 던져버린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면할 때 카를라와 오스카는 자신들만의 가치로 새로운 도덕의 위계를 세운다. 카를라에게 있어 그것은 신념의 실천이다. 카를라가 마침내 오스카를 위해 단호하게 행동할 때 영화를 지탱하는 어긋나고 비뚤어진 가치 규범에 균열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각자의 진실로 서로를 설득하는 데 아무도 실패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장면에서 학교 경비에게 의자에 앉은 채로 들려 쫓겨나는 오스카가 대사 없이 온몸으로 외친 것은 ‘이민자의 무고’라는 논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결백’이라는 절대적 믿음이다. 비록 증명할 길 없고 때론 모순됐을지라도 오스카의 강변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우위를 점한 도덕이라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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