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2024-01-18
글 : 이우빈

1월17일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이 국내 최초로 정식 개봉한다. 덩달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포함한 신극장판 4부작도 함께 재개봉한다. 신극장판이야 21세기의 연작이니 그닥 놀랄 일 없지만,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총체적 내습 중심에 있단 사실이 흥미롭다.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시작으로 전세계 서브컬처를 지배했던 세기말의 상징이 왜 2024년 한국 극장가를 찾았을지에 의문이 이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의 훌륭함을 새로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세기말의 거대한 문화적 현상으로 기록된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세계 오타쿠들이 각자의 경전을 집필해놨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의 손가락이 한컷에 몇번 떨렸는지가 프로이트적으로 어떤 의미냐는 것까지 의미화돼 있을 정도니 덧붙일 말이 없다.

지금 궁금한 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란 물리적 유물이 한국 극장가의 젊은 관객층을 과녁 삼아 개봉하는 배경과 이유다. 최근 한국의 SNS에서 텅 빈 눈으로 턱을 괴고 있는 신지의 이미지가 레트로풍의 밈으로 통용되는 유행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건 에반게리온이란 브랜드가 한국 문화계에 지엽적으로 살아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의 단면이지 젊은 오타쿠들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기다리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근본적 근거로 보긴 어렵다. 지금은 차라리 에바의 전성시대인 90년대를 몸소 겪지 않은 20~30대 초반 관객들이 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자신의 시대처럼 여기는지, 신극장판이 아닌 20세기 에바의 도래를 기다리는지가 더 궁금하다.

에반게리온 3세대, 애니메이션보다 큰 텍스트를 경험하다

한국의 에반게리온 세대는 크게 3개로 구분된다. 1세대는 동시대의 에바를 실시간으로 체험한 90년대 오타쿠들이다. “90년대 말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에반게리온과 함께 성장”(<씨네21> 1380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실패에 머물지 않은 힘과 끝내 버릴 수 없는 마음’, 송경원)했으며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덕질을 시작”(<씨네21> 1320호,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 이경희)한 80년대생의 이른바 에바 키즈를 일컫는다. 이들은 조악한 DVD나 해적판 CD 등으로 에반게리온을 봤고, 일본 문화 개방의 시류에서 재패니메이션을 탐닉하며 에반게리온에 대한 현지의 신격화도 수입했다. 2세대는 신극장판 4부작으로 유입된 세대다. 2008년 <에반게리온: 서>로 에바 경험을 시작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태생이다. <에반게리온: 서>가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고 공식 개봉하면서 2세대는 “생각보다 별거 없다”라는 냉소를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후반은 에반게리온이 나가이 고의 <데빌맨>을 혼성 모방한 결과라거나, 비슷하게 영지주의를 기반으로 한 엔도 히로키의 <EDEN>이 더 낫다든지, 니헤이 쓰토무의 <블레임!>이 더 깊고 진한 SF라는 등의 다양한 취향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을 때였다. 1세대 에바 키즈마저 이미 완벽하게 마무리된 원작을 굳이 21세기에 리부트하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3세대는 90년대 중후반 이후에 태어나서 에반게리온의 황금기를 실시간으로 체험하지 못한 세대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탄생과 함께 1997년 7월에 태어난 필자처럼 에반게리온이란 작품보단 그것의 공고한 신화를 텍스트로 먼저 접했던 이들이다. 우리는 성장기에 애니메이션 전문 TV 채널인 투니버스와 챔프를 통해 <포켓몬스터>,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명탐정 코난>, <이누야사> 등을 보면서 재패니메이션과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 친밀함이 과해진 몇몇 아이들, 흔히 말하는 오타쿠 친구들은 2010년대 초반 무렵부터 <케이온> <슈타인즈 게이트> 혹은 하쓰네 미쿠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더 마이너한 작품과 고전을 디깅하려는 욕구를 나타냈고, 그런 욕구의 끝에는 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도 구하기 어려웠던 정식 발매 DVD를 사기란 꿈도 꾸기 어려웠고 TV에선 작품을 제대로 방영해주지 않았으며 합법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었다. 물론 반에 2~3명씩 있는 모종의 전문가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작품을 접하고 PMP에 파일을 받아오곤 했으나 그것을 모두가 돌려 볼 만큼 당시 오타쿠 문화가 양지에 있진 않았다. 그럴 노력으론 <은혼>을 돌려 보거나 만화방에 가서 <기생수> <20세기 소년> 같은 걸작 만화를 보는 편이 수월했다.

다만 동시대 오타쿠들은 에반게리온에 대한 표면적 정보에 다들 신기할 정도로 해박했다. 작품을 보기도 전에 ‘1행성 1씨앗의 원칙’이니 ‘세피로트의 나무’니 하는 정보들을 착실히 예습해놓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아즈마 히로키 같은 공인된 저자를 중학생이 볼 리는 만무하다. 대신 인터넷의 온갖 위키나 커뮤니티를 탐독했고, 온라인의 에바 사도들이 적층해놓은 파편적 텍스트를 풍족하게 수집했다. (우리 세대에 에반게리온의 대표적 석학으로 알려진 네티즌 ‘엄디저트’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표합니다.) 이처럼 텍스트로 배운 ‘인류보완계획’을 에반게리온이란 시청각 교보재로 실습했던 것이 3세대의 일반적인 에반게리온 경험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2021년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유통될 때쯤이었다. 3세대에 속하는 오타쿠들이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이란 문구를 마주하며 자신의 시대를 떠나보내는 양 눈물을 흘렸다. 2년 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기다리는 반응은 더 심하다. 극장에 가기도 전에 (필자 역시) 이미 울고 있다. “안녕, 디지몬. 네 꿈을 꾸면서 잠이 들래~”(<디지몬 어드벤처> ED)에 우는 일이 시대적으론 더 마땅할 이들일 텐데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울고 있는 거야? 왜 울고 있지?”라며 영문도 모르게 눈물 흘리던 3번째 아야나미 레이(<신세기 에반게리온> 23화)처럼 우리는 직접 겪지도 않은 에반게리온에의 향수와 애정, 어떠한 성장의 기억을 만끽하고 있다.

3세대들이 에반게리온을 자신의 시대로 끌어온 이유는 오타쿠로서의 본능이다. 이를테면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긴 다소 머쓱하다. 그러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와 유사한 주제를 지닌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아한다고 말하긴 쉽다. 80~90년대 재패니메이션 산업의 황금기가 만든 고품질의 외양과 90년대 한국 오타쿠들이 쌓은 철옹성 같은 경전들이 이것을 가능케 만든 것이다. 의도적으로 선정적이거나 별 뜻 없이 장황한 데쿠파주일지라도 에반게리온은 걸작이고 현상이며 공인된 소비이므로 괜찮단 의견이 가능하다. 애니메이션 문화를 좋은 예술로 추대하고자 하는 오타쿠들의 정당한 욕구가 2024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개봉을 고대하는 무의식적 집단 전략으로 발현되었다고 하면 과도한 해석일까. 의도했든 아니든, 에반게리온이 3세대 에바 오타쿠들의 동시대적 신화로서 조작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의 일본애니메이션 저변을 확대 시킨 동력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지속 가능한 오타쿠의 꿈, “있을 것”으로서의 에반게리온

그렇다면 왜 3세대의 조작된 향수이자 생존 전략으로 선택받은 것이 시대적으로 더 가까운 21세기의 신극장판이 아니라 20세기의 구 에반게리온일까. 이는 구 에반게리온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의 근본적이고 음습한 욕망을 가장 잘 충족해줄 수 있는 덕택이 아닌가 싶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여기고,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 유운성 지음, 보스토크프레스 펴냄).

애니메이션은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다. 영화, 사진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창조한다. 창작자의 순수한 망상일 뿐 실제로는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내가 선택받은 에반게리온 파일럿이고 예쁘고 능력 있는 어른(미사토), 또래(아스카, 레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세계가 “있을 것” 혹은 “있기를 바라는 것”의 욕망이 이 망상을 생동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는 현실감과 동떨어져 있을수록, 실재에 재현되지 않을수록 매체의 존재론적 가치를 충족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 에반게리온을 향수를 부르는 과거 시제의 작품도 아니고, 동시대를 함께 나아가는 현재 시제의 작품도 아닌 미래 시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솔직하다.

하나의 사례가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26화 중후반엔 신지가 맞이할 수 있었던 대체 현실이 잠깐의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아스카는 매일 아침 신지를 깨우러 온다. 토스트를 물고 처음 등교하던 전학생 레이는 신지와 부딪히며 얼굴을 붉힌다. 아스카와 레이가 신지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식의 청춘 코미디가 그려진다. 그러나 이 상상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보다 행복한 대체 현실이 (적어도 오타쿠들에겐) 아니다. 잠깐 반짝하는 청춘의 삼각관계 속에서 철없이 웃는 신지의 모습은 현실과 어느 정도 가깝기에 공감할 수 없다. 여학생 둘과의 삼각관계야 (내가 아니더라도) 주변 친구들에게 으레 있는 일이겠지만, 철저한 하렘의 세계 속에서 인류의 최종 병기 에반게리온을 조종하고 서드 임팩트를 일으켜 본인의 의지대로 세계를 재편한단 로망이란 너무 허무맹랑하기에 “있을 것”을 가장 잘 욕망할 수 있게 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26화의 사례처럼 신극장판의 낙관 역시 오타쿠들의 진정한 필요가 아니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은 “그럼에도 다시 한번 인간들과의 소통을 이어가보자”는 단언적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세기말 오타쿠들의 니즈는 달랐다. 한줌의 희망보단 거대한 절망을 지지했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결말 이후에 있을 신지와 아스카의 미래보단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신지와 “기분 나빠”라고 말하는 아스카의 이미지에 열광했다. 내면의 결핍이란 극복의 대상보다 멜랑콜리한 감수성이 되었고, 레이와 아스카를 향한 이성적 욕망과 신지의 그릇된 행위들은 묘한 신비감과 정당한 사랑으로 포장됐다. 이에 안노 히데아키는 구 에반게리온이 본인의 미완성 작품이며 실패작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대놓고 희망적이고 건전한, 착한 어른들이 나오는 신극장판 4부작을 내놓았다. 신지와 아스카(혹은 레이)의 커플 관계를 공식적으로 무너뜨리기까지 한 것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둘러싼 일련의 부작용을 일축하겠단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기말 1세대 에바 키즈의 경전을 고스란히 학습한 3세대에게 신극장판은 거절당했다.

영화와 다시 비교해보자. 프랑스 누벨바그 시대의 자유나 고전기 할리우드의 낙관,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가 보여준 90년대 한국 시네필 문화의 황금기가 불가역의 과거임에도 현재화하길 바라는 시간이라면 구 에반게리온은 지금에도 그 바람이 유효한 모든 오타쿠의 불가능한 미래다. 90년대든 2010년대든 2023년이든 사회 어딘가에 있는 아웃사이더와 몽상가들의 지향점, 오타쿠가 꿈꿀 수 있는 최적의 이상향인 동시에 현실엔 절대 도래하지 않을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러니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개봉을 기다리며 흘리는 오타쿠들의 눈물은 에반게리온을 매개로 하여 꿈만 같던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년들의 순수가 아니다. 어딘가 어긋난 소년의 욕망이 완전무결의 걸작으로 남았으니 이 상황을 적절히 만끽하자는 설렘과 죄책감의 혼합에 가깝다. 이 욕망과 서브컬처의 소비 방식을 부정하거나 매도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다. 작품의 훌륭함에 흠집을 내려는 목적도 아니다. 에반게리온을 각자의 취향에 맞춰 소비하는 것 역시 에반게리온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이들의 특권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며칠 후 극장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보러 갈 때 무작정 “안녕, 에반게리온”이라며 낭만적인 재회의 인사를 건네기는 영 찝찝하다. 대신 “안녕? 에반게리온”이라며 조금은 낯설게 첫인사 나눌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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