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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를 멈춰 세운 두개의 동작, <노 베어스>와 <나의 올드 오크>
2024-02-07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최근까지 나는 켄 로치의 정공법이 시효를 다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일찌감치 등을 돌린 이들에 비하면 훨씬 늦은 축에 속할 테지만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웅변까지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미안해요, 리키>에서 리얼리티를 위해 인물을 사지로 몰아가는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 이유가 영화 속 현실이 아니라 영화에 있다는 사실은, ‘확신 불능증’을 앓고 있는 나조차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의 올드 오크>를 마주하기 직전의 심정은 기대감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다. 이미 무언가가 끝났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에 응답하듯 영화 역시 무언가가 끝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켄 로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된 영화는 끝을 형상화하는 대신 이미 끝난 후에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통제되지 않는 것, <나의 올드 오크>

<나의 올드 오크>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제스처는 오프닝 시퀀스에 명확히 새겨져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된 2016년의 폐광촌은 1984년 광부 대파업으로 연대의 힘을 일깨웠던 영광일랑 티끌도 남지 않은 가난한 마을이다. 영화는 이곳이 거의 유령 마을이라는 사실을 흑백 스틸 이미지의 연속으로 보여준다. 잠든 유령을 깨운 자들은 영국 이민 정책에 의해 이곳에 당도한 시리아의 난민들이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연사된 스틸 이미지는 난민을 태운 버스 안에서 시리아의 소녀 야라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혐오의 말과 제스처를 실시간으로 포착한 사진들이다. 영화가 마을 사람들과 버스를 타고 도착한 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르포르타주 이미지로 먼저 보여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연속된 카메라 촬영은 고발을 위한 증거 채집이기보다는 야라가 습관적으로 담는 평범한 일상의 일부다. 야라는 일상의 이미지를 자신들에게 날아드는 혐오의 말로부터 솎아낼 수 없다 해도 고집스럽게 마을 사람들을 깨운다. 카메라에 찍힌 인물 중 한명이 촬영 중이던 야라쪽 차창을 바깥에서 쾅 하고 두드림에 따라, 마을은 흑백 스틸 이미지의 마수에서 벗어나 컬러의 동영상으로 살아 움직인다. 야라의 카메라는 잠든 마을을 깨우는 것으로 시효를 다했다는 듯,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떨어져 작동을 멈춘다.

작동을 멈춘 카메라는 대신 오래된 무언가를 작동시킨다. 아버지가 물려준 카메라를 어떻게든 살리려는 야라에게 TJ는 20년 가까이 ‘올드 오크’ 펍 뒤편에 봉인한 채 방치한 공간을 처음으로 열어준다. 커다란 방의 벽은 오래된 흑백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광부들의 연대 투쟁과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서로 나누었던 순간의 기록이다. 야라의 흑백사진은 과거의 흑백사진으로 이어지며 정신의 차원에서 깨워야 하는 대상의 실체를 찾아간 셈이다. 야라는 벽면에 전시된 사진 아래 기록된, ‘함께 먹을 때 우리는 단단해진다’라는 구호에 크게 공감하며 그것이 바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난민이 추구해온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난민이 지닌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기에 의미심장하다. 현재 마을에 촉발된 갈등의 원인이 난민의 집단 이주로 인해 발생했다고 여기기 쉬우나, 이는 현실 정치에 따라 영화를 설명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갈등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존재에 가깝다. 두 층위의 사진이 만난 순간을 근거로 삼아 말하자면, 난민은 표면상으로는 마을 주민들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잠든 연대 의식을 깨우는 이들이다. 난민은 마을 사람들이 마주 보기 두려워하는 과거를 형상화한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여기에 저항한다. 영화의 서사는 난민 혐오에서 난민과의 연대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난민이 곧 연대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연대 그 자체다.

<나의 올드 오크>

켄 로치의 영화에선 어떤 방식으로든 연대가 늘 승리한다. 그것은 영화가 시작되고 마을 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그려질 때부터 짐작할 수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은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가 유언처럼 남긴 법정 호소문을 대독하는 장례식장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나의 올드 오크>의 마지막 역시 장례식으로 마무리되지만, 둘의 성격은 다르다. 전작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화 내내 존재감을 드러낸 주인공이었지만, <나의 올드 오크>에서 장례식의 주인공인 야라의 아버지는 액자 속 사진으로만 등장한다. 야라가 TJ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야라의 카메라에 의해 간접적으로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야라의 집으로 몰려와 꽃을 선물하며 위로를 건넨다. 그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져 야라의 집 담벼락 앞에 추모의 꽃들이 수북이 쌓인다. 말 없는 추모의 반복이 주는 힘을 느끼면서도 이것이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직조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누군가의 죽음에 의해 연대가 촉발된다는 것은 분명 희망이기보다 비극이다. 가족의 사연이 난민들이 겪을 법한 사연의 일부로 추상된다는 점 역시 공감의 이탈을 유발한다.

어쩐지 장면에 완전히 밀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가올 엔딩을 예감하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동작 하나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끊임없는 추모의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야라와 TJ의 반응숏과 함께 야라와 가족들의 모습이 간간이 비친다. 가족은 현관문 밖으로 나와 집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환대한다. 그 가운데 관람 당시에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야라의 남동생으로 등장한 소년이 눈물을 참으려는 듯 두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그대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스크린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어딘가 한대 맞은 것 같은 심정으로 뼈아픈 감동의 실체를 고민해야 했다. 그의 극 중 이름은 바시르였고, 실제 이름은 야잔 알 슈테이위였다. 그는 머리에 유산탄에 의한 상처를 입은 채 탈출한 실제 시리아의 난민이다. 스크린에 비친 그 동작은 연기나 연출로 통제될 수 없는, 더없이 진실한 몸짓이었다. 내가 지나치게 연출된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행렬이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진실을 건드리는 행위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그 순간 영화는 영화이길 그치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 현실은 픽션과 대립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그것만이 가능한 픽션이다.

통제한다는 것, <노 베어스>

<노 베어스>

<노 베어스>에도 영화를 멈춰 세운 순간이 각인되어 있다. <나의 올드 오크>에서 통제되지 않은 동작이 행한 것을, 여기서는 무언가를 통제하는 동작이 행한다. 자파르 파나히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통제하는 방식을 찾아간다. 완료된 영화의 일부처럼 보였던 도입부의 롱테이크숏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컷’ 신호에 따라 촬영 중인 현장임이 드러난다. 컷을 외치는 감독의 위치는 대부분 카메라 뒤편에 있어야 하지만, 카메라가 모니터 뒤편으로 물러남에 따라 감독이 현장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연결은 차츰 약해지더니 아예 끊어지면서 현장과의 접속이 완전히 차단된다. 오즈나 마부제 박사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존재는 원격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곤 하지만, 초조하고 절박하게 접속을 기다리는 자파르 파나히는 그럴 수 없어 보인다.

이 장면이 드러내는 것은 자파르 파나히의 곤경만은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이것이 영화인가라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파나히가 원격으로 연출하는 영화 촬영 현장 시퀀스들은 엄밀히 말하면 영상통화 화면에 가깝다. 영상통화에서 중요한 것은 영상의 질보다 연결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듯,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일단 연결되는 데 있다. 파나히가 현장과 연결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오래 보여주는 이유도 그에게 영화는 곧 연결임을 강조하는 제스처로 보인다. 연출과 연결의 일체성은 영화 촬영 현장만이 아니라, 그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마을 사람들을 촬영하는 장면과 이후에 벌어진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자파르 파나히가 방 창문에서 연결된 거리로 나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중에는 마을의 전통과 어긋나는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 솔두즈와 고잘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자파르 파나히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추궁을 당하고, 메모리카드를 넘기는 것도 모자라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공개 맹세 의식을 치르는 등의 곤란을 겪는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자파르 파나히가 겪는 부당한 일들에 관해 과도한 논평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곤란은 카메라를 통한 연결을 말하기 위해 직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연결은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파나히는 스스로 연루자의 곤경을 재현하며 렌즈 혹은 스크린을 통해 무언가를 보는 것 역시 연루와 접속임을 강변한다.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한 연결의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사물은 무언가를 비추는 도구로서의 자동차다. 자동차를 타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행위와 맞물려 어떤 상황에 가까이 있으나 거기에 연루되지는 않고 빠져나갈 때 유용한 도구로 인식된다. 파나히가 솔두즈의 시신 옆을 지나는 마지막 시퀀스 역시 그러한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파나히는 그가 찍은 것으로 의심되는 사진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여 쫓겨나다시피 마을을 떠난다. 배웅하는 이 없는 외로운 드라이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창틈으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차가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울음과 비명도 점점 가까워진다. 신랑 신부의 발을 씻기는 약혼식이 이뤄졌던 얕은 물가는 누군가가 끔찍하게 살해된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어 있다. 마을의 전통에 반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도망친 솔두즈와 고잘이 국경을 넘으려다 죽고 만 것이다. 차를 멈추고 내리려는 파나히를 보고 다급히 달려온 집주인 간바르는 자초지종을 알려주며 그냥 지나가달라고 간청한다. 결국 파나히는 솔두즈의 시신을 지나 차를 달린다. 화면에는 자동차가 반복적으로 내는 경고음과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하다. 얼마 뒤 파나히는 차를 멈춘다. 그가 힘껏 브레이크를 당기는 동작과 함께 영화는 어둠에 잠긴다. 파나히의 마지막 동작에는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그 소리는 ‘컷’ 신호이자, 그 모든 상황에 관한 분노의 외침이자, 행위가 제약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액션이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분투했던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순간은 영화를 끝맺는 것이다.

<노 베어스>

이러한 엔딩이 감동적인 까닭은 단순한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멈춰 설 때, 영화도 멈춰 선다. 달리 말하면 자동차가 곧 영화이다. 이를 염두에 둘 때, 파나히가 국경 근처에서 머뭇거리던 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밤중 연락이 닿지 않는 파나히를 찾아온 조감독 레자는 파나히에게 국경을 넘나드는 밀수꾼의 경로를 안내하며, 국경을 넘으라고 제안한다. 국경선이 위치한 언덕에 서면, 닿지 못했던 촬영 현장이 저 멀리에서 내려다보인다. 파나히는 처음에는 레자의 제안에 순순히 따른다. 밀수꾼의 도로를 달려 레자가 알려준 곳에 자동차를 세우고는, 마을로 차를 가져다놓을 누군가를 위해 키를 꽂아둔 채 차에서 내린다. 두고 내릴 뻔한 메모리 카드를 급히 챙길 때만 해도 그 역시 국경을 넘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나히는 자신이 밟고 선 곳이 바로 국경선이며 월경이 너무 쉽다는 것에 충격받은 듯 주춤대며 물러선다. 파나히가 월경을 포기하고 마을로 돌아온 이유가 본능적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두고 온 자동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에게 자동차는 곧 카메라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그가 어떤 풍경은 영영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가 결코 포기하지 못한 풍경은 그리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그 풍경은 앞서 언급한 비극적인 사연과 맞물린다. 사건은 한 소녀가 어둠 속에서 파나히의 차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잘은 파나히에게 그가 찍은 자신과 솔두즈가 함께 있는 사진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마을이 난리가 날 거라고 경고한다. 기억하는 한, 고잘은 이 장면 이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잘과 솔두즈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물가에서도 보이는 것은 솔두즈의 시신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오면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시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떠나면서 끝난다. 누군가는 왜 떠나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비극을 마주해야 했냐고 묻고 싶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비극을 사랑해서도, 이것이 현실이어서도 아니다. 다만 연루자를 필요로 하는 것은 대부분 비극이나 참혹한 현장이다. 국경에 선 자파르 파나히의 머뭇거림은 그가 실제 겪고 있는 억압적 상황이 아니라 떠날 수 없는 심정을 보여준다. 그가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자동차-카메라로 담아온 무수한 길에 있다. 세계가 사랑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자파르 파나히가 계승한 그 길 말이다. 이란 바깥에서 촬영된 극중극 장면과 마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장면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드라이빙숏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극중극에서 자라와 박티아르가 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자라가 사실과 다른 결말에 분노해 촬영장을 이탈하면서 촬영은 중단된다. 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여성이 자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배우 박티아르와 제작진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긴박한 상황이 강조될 뿐 자파르 파나히의 드라이빙숏에 비할 수 없다.

켄 로치에게도 길은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에게 길은 언제나 사람들이다. <나의 올드 오크>의 마지막 장면은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행렬로 채워진다. 사람들은 시리아 전통 스타일과 영국 전통의 정신이 융합된 새로운 연대의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 화면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뀜에 따라 오늘날의 행진은 오래전 광부들의 행진을 떠오르게 한다. 흑백은 오늘과 과거를 연결하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 한낱 과거로 박제되거나 잊힐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때 연대란 특수한 렌즈 안에서만 보이는 유령이 될 수도 있다.

두 영화의 길은 기꺼이 비극과 연루되고, 희망과 연대하는 쪽을 향한다. 켄 로치와 자파르 파나히가 보여준 현실 인식은 난민을 둘러싼 문제나 감독이 처한 실제의 곤궁함에서 오는 것만이 아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이야기를 찾아가는 데 있다. 켄 로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오래된 먼지를 털어내고, 자파르 파나히의 자동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좁은 길을 달린다. 이들의 영화는 부서진 카메라와 메모리카드 없는 카메라로 찍힌 영화를 상상하게 한다. 우리가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존재함을, 혹은 존재하지 않음을 믿어야 할 순간이 올 거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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