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충격의 두께, <클럽 제로>
2024-02-14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미장센과 서사가 명백히 지시적인 영화가 지닌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클럽 제로>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말들은 이 영화가 특별한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파생되기보다는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다. 예시카 하우스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약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밝히며, “<클럽 제로>는 영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곧 너무 지나쳐서 학생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바뀌며 급진화와 조작”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실로 영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엘리트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이 새로운 식사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을 점차 급진적으로 바꾸어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엄밀하게 다루며 그에 따른 결과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란 아이들이 금식을 하는 ‘클럽 제로’의 회원이 되어 노백이 이끄는 그림 속 저편의 낙원을 향해 가고, 아이를 잃은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처럼 금식을 해보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노백의 믿음에 참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스키를 타러 가는 바람에 사라진 아이들과 동참하지 못했던 헬렌(그웬 커런트)은 이 결론을 긍정하며 “하지만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소속감의 문제

그런데 헬렌이 말한 믿음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인가. 금식을 함으로써 노백의 말처럼 “일시적인 존재에서 영생”을 얻어 “구원받을 거”라는 믿음인가. 아니면 애초 헬렌이 노백의 첫 수업에서 “의식하며 먹기로 육류 소비를 줄임으로써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가치관을 급진적으로 바꿔 모든 음식을 완전히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환경운동에 기여한다는 믿음인가. 그리고 정작 물어야 할 건 헬렌은 정말 금식을 했던 것인가이다. 영화는 노백의 수업에 적극적이었던 다른 아이들이 주말에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의식하며 먹기’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헬렌의 가정 식탁만은 보여주지 않는다. 헬렌이 ‘클럽 제로’의 진정한 일원이 되지 않은 건 여행이라는 우연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유대 관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믿음을 위장한 것 때문이 아닐까.

노백을 처음 학무모회에 소개한 라그나(플로렌스 베이커)의 아버지는 “소비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며 노백의 수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지켜보자는 아내의 말에 “옳은 일은 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옳은 일’이란 소비를 줄이는 것이며 이 가치관은 우리 사회에도 널리 통용되는 생각이다. 게다가 라그나의 아버지는 실제로 육류를 소비하지 않으며 올바름을 실천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노백의 ‘의식하며 먹기’에 동참하는 이가 아니다. 아이들이 휩쓸려가는 상황을 관망하며 아이들의 현실에서 밀려나는 인물이다. 반면 아이들은 노백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시점을 강화하거나 조정해간다. 더불어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이치에 저항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믿는 진실을 더욱 공고히 다진다. 하우스너가 말한 사회 구성의 약점은 이러한 사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들은 일어나는 사태의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올바름을 주장하지만 정작 맞닥뜨린 현실에서 기존의 올바름이 왜소화되는 국면을 맞아야 하고, 상황에 뛰어든 이는 오류를 무릅쓰고 자신이 믿는 진실을 강화해가며, 결국 화합하지 못하는 두 집단은 모순된 진실을 안고서 불화하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한쪽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사실 말이다.

물론 하우스너는 이 영화에서 한 개인, 즉 노백 선생이 아이들을 세뇌시키며 아이들을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과 유대를 강화해가는 과정을 사이비 교주가 신도를 이끌 듯이 묘사하며 개인의 공고한 가치관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행사하고 섬뜩한 국면으로 나아가는지 철저히 묘사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처음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의식하며 먹기’에 동참하지만 종국엔 노백의 정신적 영향력 아래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 선택의 문제가 노백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며 그 영향력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까지 미치는 현상을 직시한다. 더불어 아이들이 금식하는 이유를 부모의 권위와 체제에 저항하는 행위로 부각하지만 결국 아이들의 선택조차도 이 사회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도착한 저 그림 속 세계가 많은 사이비 교리가 도달하고자 한 공허한 공간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림 속 세계를 걸어가는 아이들의 유니폼이 눈에 띈다. 학교 교복 대신 ‘클럽 제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이들은 과연 진정한 해방을 맞은 것일까. 그저 유니폼 바꿔 입기에 성공한 것은 아닐까. 유니폼을 바꿔 입는 행위가 가정이나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이 ‘클럽 제로’에서만은 소속감을 얻을 수 있기에 택한 최후의 선택이지 않을까. 아이들은 ‘의식하며 먹기’의 초기 단계부터 서로의 눈을 의식하며 엄격한 식사 방법을 이행하고 서로의 유대 관계를 다졌다. 그들은 의식하며 먹는 행위에 동참하지 않는 벤(새뮤얼 D 앤더슨)을 배척하며 공동체에서 제외될 거라 위협했고, 노백은 다른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아이들과 달리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벤이 수업에 협조하지 않으면 장학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노백의 지론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의 행태는 집요하고 폭력적이다. 카메라도 이들의 관계를 명료하게 비춘다. 첫 수업에서는 학생들과 노백을 패닝하며 평등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벤이 수업 내용에 동참하지 않자 생각이 다른 아이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분리해서 비추고 노백의 감시하는 시선 또한 위압적으로 보여준다.

얄팍한 충격

<클럽 제로>에서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은 위계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며 주요한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들려오는 음악은 최면술을 걸 듯 들려온다. 노백이 아이들을 조종하듯 이 영화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제하며 이야기를 단일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물론 계급의 문제를 더 이야기할 것인지, 모순된 진실을 부각할 것인지, 개별적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세상의 거대 담론에 개입시켜 이야기를 집대성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주제적 선택은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충격은 얄팍해 보인다. 하우스너의 전작 <루르드>(2009)와 <리틀 조>(2021)의 주제적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전작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적 긴장감을 형성하던 것과 달리 <클럽 제로>는 피상적인 캐릭터 조합과 단순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긴장을 떨어뜨린다. 물론 명료한 이미지와 영화의 정돈된 리듬과 믿음의 경계에 선 이들의 모순된 사회적 반응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이들도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더 확장된 반응을 보일 여지를 이 영화 스스로가 닫고 있다는 인상을 거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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