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어디로, <살인자ㅇ난감>
2024-02-28
글 : 오수경 (자유기고가)

웹툰·웹소설이 원작인 드라마가 늘어날수록 ‘드라마 덕후’는 바빠진다. 예전에는 드라마만 보면 되었지만, 이제는 ‘쿠키’를 굽고, 코인을 구매해 원작을 정주행한 후 드라마를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드라마를 먼저 보고 원작을 순례할 때도 있다).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보는 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유익할 때가 많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처럼 ‘차라리 원작을 안 봤더라면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다.

웹툰의 질문, 드라마의 질문

시청자뿐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원작과 비교 분석하는 깐깐한 원작 팬들을 설득시켜야 함과 동시에 드라마 팬들도 만족시켜야 하기에 마치 저글링하듯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을까? 원작이 소위 ‘레전드’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일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감> 제작 발표회에서 이창희 감독은 “원작을 존중”하고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형사 장난감을 연기한 손석구도 “원작 팬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고 그 부분에서는 자신 있다”는 말을 보탰다. 감독과 배우의 이 말에서 자신감보다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꼬마비 작가의 웹툰 <살인자ㅇ난감>은 무난하고 어중간하고 평범한 대학생 이탕이 어느 날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예기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이탕은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자신이 죽인 남성이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한 수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새로운 인생을 선물받은 기분”이 된다. 증거도 남지 않은 완전범죄였다. 그렇게 ‘첫’ 살인에 성공한 이탕은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을 저지르며 하필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은 범죄자이거나 악인이었고, 공교롭게도 모든 사건에 증거가 남지 않자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이탕의 생각에 확신을 심은 건 해커 노빈이다. ‘사이드킥’을 자처한 노빈은 혼란스러워하던 이탕을 “이 시대의 히어로”로 믿으며 살인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이탕과 노빈은 “유쾌한 학살의 동지”가 되어 자신들만의 “절대정의”를 실현해간다. 사실 노빈의 첫 히어로는 전직 형사 송촌이었다. 그러나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송촌의 잔혹한 면 때문에 갈라서게 된다. 그들을 쫓는 형사 장난감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해 경찰이 된 인물로 “법 안에서 허용되는 만큼 미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웹툰은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탕과 송촌에 의해 죽은 인물들은 평범하거나, 사회적 약자거나, 명망 있는 직업을 가졌지만 실상은 누군가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평범한 대학생 이탕도 마냥 선한 인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악인이었을 것 같은 송촌 또한 처음부터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인간이 복잡할수록 질문도 복잡해진다. 웹툰은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현대사회로 옮겨놓은 듯 죽어 마땅한 인간을 단죄하는 게 죄인가, 그 ‘죽어 마땅한 인간’의 기준은 누가 정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웹툰의 질문을 따라간다. 다만 몇몇 설정에 변화를 주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이탕(최우식)에게 ‘서사’가 부여된 점이다. 원작에서는 그저 스쳐 지날 정도로 나온 가족의 비중이 커졌고, 이탕이 학교 폭력을 당한 이력이 있는 취업준비생이라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또 눈여겨볼 변화는 이탕의 능력이다. 원작에서는 이탕에게 살해당한 이들이 알고 보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이탕이 그런 인간들을 마주칠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으로 설정해 이탕에게 악인을 감별할 능력이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런 설정의 변화는 이탕을 평범하지만 살인 후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살인을 반복하는 복합적인 인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사적 복수를 감행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다크 히어로’처럼 보이게 한다. 이탕의 사연과 능력이 주목될수록 원작에서 복잡하게 묘사되었던 주변 인물들의 서사는 생략되거나 단순해진다. 이탕이 죽인 이들은 저마다 평범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인간의 면모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그 인물들의 서사가 축소되었다. 그 때문에 원작이 던진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이탕의 판타지, 장난감의 추리극, 그리고 송촌의 누아르”라는 드라마의 설명처럼 제작진의 감각적 화면을 향한 욕심에 희석되고 만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드라마의 선택을 반길 것이다. 하지만 2010년에 던져진 웹툰의 세계관과 여성을 도구화하는 남성 중심적 설정의 한계가 2024년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재현될지 궁금해하며 기대한 이들에게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변화다.

원작의 주요 설정을 변경한 경우가 <살인자ㅇ난감>만은 아니다. 지난해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된 <마스크걸>도 웹툰의 주요 설정을 바꿔 원작 팬들의 원성을 샀다. 물론 드라마가 원작 복사본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사회적 상황과 드라마 장르에 맞는 각색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런 설정 변화가 작품의 빈곳을 채우거나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게 아니라 원작의 문제의식과 매력을 묘하게 뭉개버린다는 데 있다. <마스크걸>의 경우 김모미(고현정)의 기괴한 욕망을 순화시킨 대신 그를 ‘모성애’의 화신으로 만들었고, <살인자ㅇ난감>의 이탕은 난데없이 ‘다크 히어로’가 되어버렸다. 드라마의 이런 선택은 다른 대중문화 장르보다 비교적 보수적인 드라마 시청자층을 고려한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폭력, 섹스, 종교라는 키워드

하지만 시청자의 이해를 위해 상황 설정과 극적 전개는 보수적으로 하지만 다른 데는 필요 이상으로 파격적인 면을 보이는 불균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스크걸>은 시청자들이 김모미에게 공감하게 하기 위해 그의 기괴한 욕망을 순화시켰지만, 섹스와 폭력의 수위는 낮추지 않았다. <살인자ㅇ난감>도 마찬가지다. 인물의 심리적 변화나 인물간의 관계 변화의 단서가 될 설정은 생략하면서도 여성의 과한 노출과 섹스, 불법촬영물 유출 장면 등 관음증을 자극하는 장면과 이탕이 어머니와 교회 가는 장면 등 전개상 없어도 좋을 장면은 굳이 빼놓지 않았다. 이런 전개가 두 드라마만의 특징은 아니다. 소위 ‘야하고 기괴하고 잔인한 장면을 감각적으로 때깔 좋게’ 만든 것이 요즘 OTT 콘텐츠의 트렌드 아니던가! 특히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는 폭력, 섹스, 종교(특히 개신교)가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비슷한 설정이 반복된다. <살인자ㅇ난감>에서도 이 세 가지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것 또한 ‘대중의 눈높이’ 혹은 ‘대중의 욕망’을 고려한 상업적 선택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도 봐야 할 ‘드라마’들의 미래일까? <살인자ㅇ난감>이 도착한 곳이 폭력과 선정성으로 버무린 상업 드라마의 막다른 길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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