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사회. 정제된 표현으로 감쌌지만 결국 ‘늙었다’는 속삭임이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는 데 몰두했다. 늙음은 자주 수술대에 오르듯 공론의 장에 올라 이리저리 들춰지고 해부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적 있었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활자와 숫자를 넘어, 뜨거운 숨을 내쉬는 이들에 대한 응시가 필요한 때. 이 시기에 노년의 마지막을 다룬 두편의 영화, <소풍>과 <플랜 75>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닮은 점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꿀 같은 잠이나 편안한 휴식은 아니다. 그들은 몸이 망가져서, 혹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해서 누웠다. 이 상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누운 노인의 형상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를 건드린다. 어쩌면 삶 자체가 그런 것 아닐까. 아이 때 안간힘으로 몸을 일으키며 시작된 인생은 어느 날엔가 가만히 뉜 채 끝을 맺는다. 그러니 일어나고 눕는 일은 삶에 대한 메타포다.
왜 그들은 산으로 가는가
<플랜 75>에는 고령의 여성 미치(바이쇼 지에코)가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온다. 플랜 75를 신청한 그녀는 마지막을 준비하며 병상에 누웠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순간. 미치는 조심히 고개를 돌려 옆의 자리를 본다. 거기에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은 한 노인이 있다. 숨을 거둔 것 같다. 이 장면은 러닝타임 내내 안락사를 소재로 삼은 영화가 처음으로 그것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노인의 전부를 보여주는 대신 커튼 사이로 보이는 움직임 없는 얼굴, 감은 두눈에 집중한다.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풍>에도 노인이 누운 순간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의 태도가 사뭇 다르다. 금순(김영옥)은 허리가 아파 바닥에 누워 꼼짝하지 못한 채 은심(나문희)이 보는 앞에서 바지에 실례를 해버린다. 소리까지 입혀 배출을 설명하고, 노인의 울음으로 마무리 짓는 이 장면에서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존중이나 조심스러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플랜 75>가 안락사의 맥락 속에서 누운 신체를 포착해 새로운 공포를 이끌어낸다면 <소풍>은 망가진 신체를 전시해 초 감각을 자극한다. 이런 태도는 다른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영화는 핸드헬드, 클로즈업 등여러 연출을 통해 카메라가 여기 노인들의 곁에 있음을 드러낸다. 의도대로 카메라가 그곳에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함께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상투적인 위기 상황에 노인들을 몰아넣고 카메라는 그들이 고통받는 이미지를 살뜰히 챙긴다. 그 앞에서 아까운 배우들이 투박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보는 일은 고행이다. <소풍>에서 노인으로부터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진짜 수탈자는 카메라다.
누운 신체가 주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함인가. 두 영화는 모두 산으로 향한다. 노년의 여성들은 야트막한 산도 아니고,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약간의 무리수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어코 높은 곳에 도착한다. <플랜 75>의 마지막 부분에서 미치의 산행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 그녀가 하늘이 훤히 보이고 집이 조막만 해 보이는 풍경을 마주할 때, 여기에는 약간의 위화감이 있다. 이곳은 방금의 산행 수준으로 도달할 만한 곳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미치는 마술처럼 그곳에 있다. <소풍>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여성의 마지막 등산, 특히 허리가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곤란한 금순의 등산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마치 판타지처럼 이뤄진다. 여기에는 노인들을 높은 곳에 데려가고야 말겠다는 영화의 의지가 묻어 있다. 이것은 눕는 행위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극단적인 상승 의지이기도 하다. 두 영화의 인물들은 최정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려온다. <플랜 75>의 미치는 저벅저벅 걸어 산을 내려가며 삶을 다시 시작하고, <소풍>의 은심과 금순은 낭떠러지를 향해 감으로써 삶을 마감한다.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서로 다른 선택과 결단이 있을 뿐이다. 다만 자꾸만 아래를 향해 스러지는 몸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두 영화 모두 높은 곳으로 향한다는 것만은 인상적이다. 그녀들이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비슷하다. <플랜 75>에서는 눈부신 석양이, <소풍>에서는 찬란한 하늘이 펼쳐진다. 이들은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두 영화는 이 장면에 이르러, 죽음을 마주한 순간에도 한줌의 희망은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기적적인 이미지로의 도피
하지만 나는 이 결말을 믿지 못하겠다. 나는 그들이 (자기 신체로는 역부족이라고 느껴지는) 산행을 통해 삶의 희망을 보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때 영화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높은 곳에 우뚝 선 신체는, 죽음에 맞닿은 삶에서 피어나는 공포를 끌어안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채 기적적인 이미지로 도피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가 주인공에게 선사하는 선물 혹은 기만이다. 나는 이 순간이 “그래도 좋은 날 있을 거야”라는 말처럼 의미 없는 덕담으로 느껴진다. <플랜 75>의 마지막이 수상하다면 <소풍>의 마지막은 탐욕적이다. 삶의 막바지에서 죽음을 자행하는 두 여성의 화사한 웃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째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일 법한 일말의 두려움이나 주저함조차 자취를 감췄을까. 영화는 이런 어색함을 숨긴 채 낭떠러지 앞에서 해맑게 웃는 두 노년 여성의 미소를 화면 가득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소풍’이라는 좋은 단어와 그들의 학창 시절을 거듭 소환하는 것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진지한 고찰 없이 고통받은 노인의 이미지만 약탈하는 카메라는 다시 한번 발동된다.
하지만 두 영화의 아쉬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의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미치가 보여준 하나의 순간이다. 고민 끝에 플랜 75를 신청한 그녀는 옆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떨리는 눈빛. 영화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미치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잠시 뒤 영화는 스쳐 지나가는 청년의 눈을 통해, 미치의 모습을 다시 보여준다. 그녀는 병상에 조용히 앉아 멀뚱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 단출한 형상이 인상적이다. 이 이미지는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준 비현실적인 하늘보다 믿음직스럽다. 어쩌면, 아니 높은 확률로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미치의 삶에 큰 변화는 없을지 모른다. 비단 그녀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기적 같은 변화를 바라지만 삶의 많은 순간들은 반복으로 점철됐다. 노인이 일어나지 못할까 봐 두렵다면, 젊은이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 슬프다. 하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한 가지 진실.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것으로 오늘은 다시 시작된다.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대단한 포부나 거창한 말이 아니라 이 단순한 동작이다. 그러므로 누워라, 일어나지 말라고 말하는 병상에 떡하니 앉은 미치의 형상은 찬란한 석양보다 감동적이다. 나는 이 장면을 마주하기 위해 긴 시간 영화를 따라왔나 보다. 그 순간에 엿본 삶의 희망을 믿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