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가여운 것들’, 무력한 남성성을 딛고 세계의 균열을 겨냥한 란티모스
2024-03-06
글 : 최현수 (객원기자)

강 아래로 몸을 던진 여자는 미치광이 천재 해부학자 갓윈 백스터(윌럼 더포)의 손에서 벨라(에마 스톤)라는 이름으로 거듭난다. 하루에 열 단어 정도를 배우며 걸음마조차 서툰 벨라는 젊고 아름다운 외형과 달리 유아기 수준에 머문다. 갓윈은 자신의 보호 아래 빠르게 성장하는 벨라를 관찰하기 위해 제자 맥스(라미 유세프)에게 연구일지 작성을 부탁한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맥스는 벨라를 흠모하게 되고, 갓윈은 벨라와 맥스의 약혼을 서두른다. 그러나 맥스와의 약혼조차 세상을 향한 벨라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호색한으로 유명한 변호사 덩컨(마크 러펄로)은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벨라를 설득해 그녀와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가여운 것들>은 인류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피조물과 창조물간의 문제를 잔혹 동화의 세계 안에서 그려내고 있다. 뇌수술로 신체 협응이 떨어지는 벨라의 걸음은 영락없는 프랑켄슈타인의 것이며, 부성애란 이름으로 그녀를 과잉보호하는 갓윈과 유아 수준의 벨라를 사랑하는 맥스는 피그말리온의 남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가여운 것들>을 단지 페미니즘으로 굴절시킨 고전의 재해석으로 요약하기엔 이르다. 기록물, 편지, 회고록과 주석을 활용한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원작 소설은 제국주의와 남성성 그리고 계급을 향해 전방위적인 포격을 가했다.

마찬가지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파격적인 이미지와 과감한 구도를 활용해 세계를 왜곡하고 굴절시켜 끝내 균열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여태 파시즘적 세계의 폐쇄성에 골몰했던 그가 드디어 열린 세계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각본가 토니 맥너마라의 공이 컸다. 끝없는 활강을 이어가며 140분간 성장을 거듭하는 에마 스톤은 소름 돋을 정도로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로비 라이언의 촬영과 제임스 프라이스의 미감 그리고 저스킨 펜드릭스의 음악은 잔혹 동화에 기괴함을 더했다.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가여운 것들>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11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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