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 좋아하는 마음
2024-03-22
글 : 송경원

어쩌면 <최애의 아이>가 <씨네21> 표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다. 극장판이 개봉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이슈도 없었지만 우연히 기회가 맞아떨어져, 사고 한번 쳐볼까 상상한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전임 편집장이 휴가 간 사이 대리로 잠깐 데스크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예정됐던 표지가 펑크나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예전부터 즐겨보던 <최애의 아이>가 떠올랐다. 마침 <최애의 아이>가 세간의 화제라고 하니 잡지 판매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게 공식적인 명분이었지만 실은 그냥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곳에서 크게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그뿐이다.

‘그냥’은 힘이 세다. 영화 <황산벌>의 키워드 ‘거시기’와 비슷한 포지션이랄까. 비어 있는 그릇 같은 단어 안에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마음이 담긴다. 대체로 낯간지럽거나 부끄러울 때 남용하는 이 게으른 말에서 문득 상대를 향한 믿음과 배려를 느낀다. 스스로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말의 중간 어딘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상대가 찰떡같이 알아들어주길 기다릴 수 있다. 애초에 언어는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릇이니 정교하게 세공할 자신이 없을 땐 아예 그냥 넉살 좋게 상대에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편이 차라리 오해의 소지를 줄이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은 아직 해석되지 못한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원인보다 먼저 도착한 결과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론적으론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온다고 배우지만 ‘리얼 월드’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황이 먼저 벌어지고 이를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로 좋아한다는 감정은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치고, 용량을 초과한 감정을 소화하기까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 앞서가는 바람에 표현이 서툴러지는 ‘그냥’의 시간.

지난주 에픽하이에 이어 이번주 이승윤까지, 실황 공연 영화를 들고 찾아온 가수들의 표지를 연달아 선보인다. 솔직히 잘 몰랐던 세계다. 누군가는 영화 전문지가 이래도 되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럴 만하다. 나도 (아무도 눈치 준 적 없건만) 괜히 혼자 주눅 들어 자기검열 끝에 <최애의 아이>를 밀어붙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커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젠가의 용기 없던 내가 묻어두었던 마음들을 뒤늦게 마주한다. 애니메이션과 게임과 만화를 좋아하는 나와 고전영화, 작가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공존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이 잡스러움 역시 ‘나’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상이 달라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닮았나 보다. 좋아하니까 더 알고 싶고 알고 나면 잘 설명하고 싶어진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광경을 보며 이들의 ‘그냥’을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낼 필요를 느낀다. 이번호는 뮤지션 이승윤의 이야기로 시작해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한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까지 팬덤의 세계를 탐구해보았다. 여기에 <FAKE LOVE>(BTS, 2018)를 풀어헤친 복길의 에세이 ‘슬픔의 케이팝 파티’를 더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K팝 잡지냐고? 그럼 또 어떤가. 이 잡스러운 관심사, 넓은 오지랖 또한 <씨네21>의 모습이다. 리얼 월드건 버추얼 월드건 상관없다.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하는 이들은 이미 ‘진짜’를 품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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