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생일 챙기는 게 머쓱해 종종 까먹곤 한다, 는 게 자발적 망각에 대한 현재 나의 공식 입장이다. 모래 더미에서 기어이 바늘을 찾겠다는 각오로 긍정 회로를 돌린 결과, 나이 먹어 편해진 것 중 하나는 주변에 이렇게 말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솔직해지자면 어릴 적부터 생일이란 피곤한 기념일로부터 도망쳐왔다. 이유야 복합적이지만 제일 큰 건 내가 소심한 외톨이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INFP라는 편리한 간판으로 한방에 설명 가능한데, 나는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렇게 안락한 자기 합리화 속에서 세계는 점점 좁아져갔다. 지금 와서 꼭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생일 파티 사진 한장 없는 앨범을 볼 땐 조금 쓸쓸한 게 사실이다.
요즘은 무리가 되어도 기념일을 꼭 챙긴다. 없는 기념일도 핑계처럼 만들어 주변에 선물을 한다. 그때 못 챙긴 한이 맺혀서 그런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기념일을 챙기는 건 스스로 어디쯤 와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이 되었다. 강물 한가운데 있을 땐 물살의 도도한 흐름을 인식하기 어렵다. 자신이 어디까지 떠밀려왔는지, 잘 버티고 있는지, 혹은 때때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지 정기적으로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기념일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에 점을 찍어준다. 점 하나 찍는 것만으로 막막했던 일상에 앞뒤, 선후, 위아래가 생긴다. 달리 표현하자면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는 중인지 방향이 잡힌다. 삶의 좌표를 설정한다는 건 그런 거다. 좌표를 찍기 위해서 필요한 건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볼 한줌 용기다. 부딪치고 거절당하고 실패하면서 세계를 넓혀갈 에너지도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내가 미처 갖지 못했던 걸 지금은 기념일을 도구 삼아 부지런히 긁어모으는 중이다.
1995년 4월 창간한 <씨네21>은 올해로 29주년을 맞이했다. 앞으로 한달 동안 창간을 기념하며 이런저런 특집 기사를 기획해보려 한다. 솔직히 으레 하는 아이템들로 채워 편하게 지나갈 수도 있고, 멋들어진 축하 메시지로 채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2024년 4월의 창간기념호들은 좀더 소란스러워지기로 결심했다. 과감하게 부딪치고 기꺼이 실패한 뒤 깊게 파고들 각오를 다진 후 마련한 특집, 한국영화 NEXT 50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보기 위한 신호탄이다.
리스크를 안고 부딪쳐보는 특집인 만큼 결과를 두고 여러 말이 나오리라 짐작된다. 노파심에 당부컨대 과거 ‘충무로 파워 50’과 같은 랭킹 리스트와는 목표도 방향도 다르다. 지금 한국영화계에 어떤 움직임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지, 고개 들어 주변을 살피기 위한 밑작업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그리하여 한국영화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마침내 (<씨네21>을 포함하여) 각자 서 있는 좌표를 찍어볼 좋은 핑계가 되길 소망한다. 세어보니 어느덧 1450번째 결심.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깊어지고 어디까지 넓어질진 자신할 수 없다. 다만 29살 나이에 부끄럽지 않길 바라며, 이번주도 자기합리화와 망각에 저항할 용기를 쥐어짜내 한권을 보탠다. 그래봤자 잡지 한권. 그래서 더 소중한 잡지 한권.
추신. 하스미 시게히코 특집이 성사되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가슴 깊이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