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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보편적인 압축성장, <가여운 것들>
2024-04-10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미완성 희곡 <성스러운 창녀>(La Sainte Courtisane)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인이 여행을 떠난다. 그 미모가 눈부신 나머지 남자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황제의 딸이라 여기거나 여신이라 여기거나. 여인은 청금석 잔의 안쪽처럼 파란 하늘 아래 붉은 모래언덕 사이를 지나 동굴에 기거하는 수도자를 만난다. 수도자가 청한다. “나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가 7가지 죄악을 맛보게 해주시오.” 이어 묻는다. “당신은 왜 나를 유혹하오?” 여인이 답한다. “당신이 화려한 가면 속의 죄를 보고 수치스러운 옷 속에 있는 죽음을 보게 하려고요.” … 미완성작이어서 그 결말이나 주제는 모호하지만, <가여운 것들>을 본 이라면 ‘성스러운 창녀’ 벨라(에마 스톤)가 짙푸른 하늘 아래 알렉산드리아의 빈자들을 목도하거나 종종 동굴 같은 공간을 탐험하고 상대 남성을 시험에 들게 하는 등 젠더 위상과 관련한 설정들을 보며 분명 오스카 와일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리스본의 상류층이 오스카 와일드의 신작을 식사 테이블에 얘깃거리로 올리는 장면은, 그가 당대 어느 작가보다 체제 전복적이었다는 점에서 빅토리아시대 유한(有閑)계급의 위선을 흥미롭게 드러낸다. <가여운 것들>은 압축성장하며 시대 모순을 온몸으로 겪는 한 여성의 모험을 거쳐,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연출작 중 가장 현실 성찰적인 사례로 기록될 작품이다.

세기말 풍경, 세기말 원작

<가여운 것들>은 모두가 말하는 ‘한 여성의 자아 재구성 및 남성 중심 체제의 전복’이라는 척추 이외에도 수많은 뼈와 살과 신경망이 서로를 잇고 있는 영화다. 이를 외과수술하듯 부위별로 따로 떼어놓으면 작품의 총체적 가치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시대 배경부터 보자. 1881년 영국 클라이드강에서 임신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외과의사 고드윈 백스터가 사망 판정을 내린다(앨러스데어 그레이 원작 <가여운 것들>(1992) 서문 중 사건 기록. 실제 법률사무소의 폐기 문서에서 가져온 자료다). 그러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 마르크스가 <자본론>(1867)을 내놓은 이후 유럽에 사회주의사상이 확산하고, 베블런이 <유한계급론>(1899)을 구상하지 않는 게 이상할 만큼 불평등이 가속화하던 때가 <가여운 것들>의 시대다. 경제학에서 소득불평등을 따질 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상위 10%-하위 50%의 소득 비중 비교를 보면, 1880년 영국에선 상위층 10%가 전체 소득의 53%를 가져갔다. 하위층 50%의 소득을 다 합쳐봐야 전체의 15%만을 차지했을 뿐이다(자료: inequalitylab.world). 100년 뒤인 1980년 이 비중은 28.5% 대 21.7%로 영국 상류층과 하류층의 차이는 꽤나 평등하다 할 만큼 좁혀졌지만, 신자유주의의 범람 이후 급격히 벌어져 2020년 37% 대 18%를 기록하며 빅토리아시대의 불평등을 향해 치닫고 있다. 세계경제와 긴밀히 연결된 주요국들의 사정이 이 경향에서 대동소이하다.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던 당시 과학과 의학은 신격화됐다. 역사의 많은 사례에서, 가진 자를 더 갖게 하는 기술이 등장할 때 사회 주류층은 이를 ‘성장동력’, ‘미래 먹거리’ 등으로 포장하곤 한다. 당시엔 증기기관을 장착한 마차에다 박제한 말 머리를 달고 달리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될 만큼 옛것과 새것이 마구 뒤섞였다. 서양의학은 우리 몸을 부위별·기관별로 해체해 분류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부정적 의미에서의 환원주의적 방식을 취한 당시 의학의 세계관을 갖고는 우리 몸의 연결성을 파악할 수 없었고 세계의 실체에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어린 고드윈(윌럼 더포)을 대상으로 한 아버지의 실험에서도, 음식을 소화시키는 일이 여러 장기들이 연결된 화학작용임을 모른 채 장기를 떼어내다 자가소화 기능을 잃게 만든 것이다. 입체파적(?)인 고드윈의 얼굴은, 말 그대로 해체됐다가 다시 맞춰졌다. 각각의 부속품이 자기 역할만 하면 기계가 돌아가고 경제가 성장하던 당대 산업사회의 근대적 질서가 이와 같았다. 한편 마취제 사용으로 인류의 외과수술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부터다. 산업혁명 이후 의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마취제 개발처럼 환자를 위하는 일은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취제 보급 이전 수술실 풍경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옥스퍼드대학교 과학사 및 의학사 박사 린지 피츠해리스는 저서 <수술의 탄생>에서 19세기 영국의 수술실 풍경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취제 없이 시행한 다리 절단이나 방광 결석 제거 등의 수술 과정을 그림 그리듯 묘사한다). ‘의술 지체 현상’이라 할 법한 이같은 상황은 인류의 진보 중 많은 경우가 그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계층만을 위해 작동해온 경향을 보여준다.

기술의 진보에 따른 1, 2차 산업혁명은 줄곧 상위계층에만 과실을 안겼고 하층민은 더 많은 노동력을 더 낮은 임금과 바꿔야 했다. 적절한 마취제와 소독약의 보급은 19세기 종반에야 본격화했는데, 이로써 현대적 수술이 가능해지면서 임상실험 역시 경쟁적으로 행해졌다. <가여운 것들>에 나오는 동물실험의 결과물들은 시각적 상상이지만, 실제 20세기 동안 과학의 이름으로 인류가 행한 동물 대상 연구의 잔혹성은 본질적으로 영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에서 <프랑켄슈타인>(1931)과 <메트로폴리스>(1927) 등의 고전 SF가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30여년 전 원작의 세기말적 행간을 풍성히 옮긴 영화는 19세기 말과 21세기의 풍경을 나란히 포착하는 듯 보인다.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가 올해 1월 인간 뇌에 합법적으로 칩을 심기까지 동물 1500마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는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빈 서판을 가진 어린이

성인 여성의 몸에 태아의 뇌를 심어 다시 태어난 벨라의 지적 능력은 당대 2차 산업혁명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성장한다. 광각렌즈에서 점차 표준렌즈로 이행하는 화면 시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 벨라의 인지능력 변화를 보여주는 적절한 재현이다. 의대 해부학 교실 장면이나 벨라가 최초로 홀로 세상에 나가는 시퀀스를 여는 핍홀(peep hole, 훔쳐보기 구멍) 숏은 극 전개를 관객 시점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객석의 공기를 적시에 바꾸는 환기창이기도 하다. 걸어다니는 ‘빈 서판’으로서 벨라의 이야기를 이끄는 중추는, 역시나 본성에 대한 자각이다. 뇌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 교수가 저서 <빈 서판>(Blank slate)에서 인간 본성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며 든 비유가 재미있다. “인간 본성을 인정하는 관점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인간 본성을 인정한다 해도 여권운동을 포기하거나, 현재의 불평등과 폭력을 인정하거나, 도덕성을 허구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인간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性)에 대해 빅토리아시대 사람들이 느꼈던 수줍음과 같아서 갈수록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핑커 교수가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가여운 것들>의 서사 실험은, 본성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설정 속에서 벨라가 사회적 ‘나쁜 결과’에 물들지 않은 채 여성 의대생이 된다는 해피엔드로 마무리되며 성공에 이른다. 니체는 인간 삶의 방식을 낙타(노예)-사자(지배자)-어린아이(초월자)로 구분한 바 있다. 이를 빌려 거칠게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서 딴생각 없이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어린아이의 면모가 벨라에게 구원을 안겼다고 할 수 있다. 아장대는 어휘와 버벅거리는 걸음걸이의 벨라가 고급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기까지, 그녀의 ‘빈 서판’에는 뭇 사람들이 수십년에 걸쳐 쌓아가는 것들이 압축적으로 적힌다. 중요한 점은 당대 평균적인 인간의 사회성 습득 과정이 있다고 가정할 때, 벨라의 그것은 순서가 뒤섞이고 자기 결정이 개입하면서 단순한 압축과는 다른 것이 된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벨라는 강제된 압축성장 조건에서 본성과 합리 사이의 균형을 잡아가며 성숙해가는 신인류로, 주어진 처지와 자신의 과거, 냉정한 타인과 다정한 지인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대화를 패러디(“햇볕 가리지 말고 비켜줘요” )하는 ‘성장기’ 벨라의 태도가 상징하듯, 탐욕과 지배욕으로 유지되는 근대 산업화 논리로부터 그녀는 자유롭다. 마치 <행복한 라짜로>(2019)에서 시대를 초월해 무구한 어린아이로 살아가는 라짜로가 구원자의 길을 개척하는 것처럼, 빈 서판을 가진 어린아이인 벨라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과거를 극복한다. 베냐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진다.”

압축근대, 압축성장

흔히 압축성장이라고 하면 근현대 한국의 경제 규모 확장을 떠올리게 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거의 모든 문명사회가 압축성장의 대열에 들어서며 평준화하고 있다. 구글은 끊임없이 우리 뇌의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방식으로 본성을 자극하며 ‘신’으로 불린다. 알고리즘에 의해 이미 인류의 뇌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연구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창출한 부의 편중은 해마다 최대치를 갈아치운다. 챗지피티가 나온 지 1년도 안돼 인공지능이 동영상을 생성하고 편집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이 공포를 느낄 정도의 속도 속에서 부(富)는 넘쳐나는데 전쟁과 기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이런 와중에 많은 이들은 사실상의 신분제 사회를 내면화한 채 체제 안에서의 공정에 매달리고 있다. 이같은 속도와 질서에 순응하는 자를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낙타’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압축성장의 조건 아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이되 순응을 거부한 벨라는 그렇게 구원의 길을 찾았다. 마르크스와 베블런의 출현이 자연스러웠던 19세기 말과 불평등 신분이 기본값인 현재를 오가며, 벨라는 ‘순응’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웃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에세이 <예술가로서의 비평가>(1891)에서 이렇게 썼다. “최악의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노예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서 그 시스템으로부터 고통받는 이들과 그 시스템을 심사숙고하는 이들이 그것이 가진 끔찍함을 깨닫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이었다. 현재 영국의 상황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이들은 가장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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