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논란(?)이 되었을 장면부터 말해보자. 아홉 번째 에피소드에서 외계 기계를 서로 차지하려고 최선만(류승룡)과 고백중(안재홍), 유인원 박사(유승목)와 그의 조카 유태만(정승길), 그리고 ‘백정 닭강정’에서 일하는 외계인 4명의 세 무리가 대치한다. 이때 외계인 4명은 지구인에게 겁을 줄 요량으로 지구인이 가장 무서워할 만한 네 가지를 몸으로 연기한다. 잘 알고 있듯 미사일, 핵,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사슴, 세계적인 인기 그룹 BTS가 그것이다. 진보한 과학기술과 정신세계를 구축했을 외계 존재가 정말 지구인을 이해하지 못해 그러한 발상으로 어처구니없는 몸짓과 말을 보여준 일은 터무니없고 실소를 자아내지만 작품과 인물은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이 한명 한명 진지하게 말 그대로 공연을 벌인다. 이 장면이 놀랍다면 감독의 지난 연출 스타일이 언어유희와 슬랩스틱코미디가 주를 이뤘던 데서 한뼘 더 비켜나 생경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치원 장기 자랑에서나 볼 법한 이 장면은 표면에서 느끼는 가벼움과 어울리지 않게 형식과 내용의 관점에서 각각 연극 요소와 영상매체, 또 코미디와 드라마 사이에 그려질 불화와 화합의 지형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유희의 코미디, 정념의 드라마
코미디만 두고 보자면 사실 원작 웹툰은 건조한 편이다. 인간이 닭강정으로 변한다는 특이한 설정과 사태 해결을 위한 이야기 진행은 동일하다. 하지만 시리즈에 비해 코미디를 강조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 인물들로 구성된 진영별로 기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의 서사 행위가 더욱 두드러진다. 반면 시리즈는 코미디를 부각하기 위해 인물간 대화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인물관계에 더 신경 쓴다. 다르게 말하면 작품에서 서사와 플롯은 제 역할을 초과해 코미디를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자 발판으로 활용되는 면을 무시하기 힘들다.
장면별로 살펴보자. 먼저 시리즈의 첫 장면. 천연색 옷을 입고 조악한 음정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고 있는 고백중을 보고 한 학생은 전화로 친구에게 신기한 광경을 봤다는 듯 말한다. 시선을 눈치챈 고백중이 왜 자꾸 쳐다보냐고 묻고 학생은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안 보냐고 되묻는다. 다음 장면. 사무실에 출근하는 최선만과 고백중은 아이나 보일 법한 행동을 취하며, 고백중의 바지 색깔이 인생에서 아주 큰 사건이라는 투의 만담을 주고받는다. 최선만의 말대로 느끼한 연애사를 되짚으며 그렇지 않은 용모의 남성 고백중에게 가장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홍차(정호연)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장면들은 서사 진행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순수한 코미디 무대로서 기능하는 대표 시퀀스들이고, 예고편으로 주로 활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다.
이 장면들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몸짓과 발화가 연극 양식에 더 가깝다는 건 모두 인정하는 바다. 연극에선 그러한 양식이 이야기에 복무하며 진행을 더 자연스럽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닭강정>에서는 서사와 크게 관계없는 순수한 코미디로 작동하기 위해 영상매체의 형식과 융합을 도모한다(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실제 연극 장면은 연극인가 영화인가). 따라서 제한된 공간으로서 무대와 관객의 고정된 시선으로 특징지을 만한 연극의 재현 조건은 시리즈에서 인물의 시점으로 분절돼 영화를 포함한 영상매체에서 흔히 보는 오버숄더 숏이나 180도 가상선, 또 그 변주와 혼재한다. 그리고 이야기 진행은 코미디 장면들 사이로 배치한 서사와 플롯에 맡겨 연극 요소와 영상매체 사이의 충돌을 상당한 수준으로 무화한다. 하나 더 추가한 전략이 있다면 <닭강정>의 각 에피소드를 대략 30분을 전후한 러닝타임으로 제한하고, 시리즈 시대에 걸맞게 다음 에피소드로 직행하도록 그 말미마다 관객의 주의를 잡아끄는 서사 장치를 마련한 일이다. 이 전술도 연극 요소와 영상매체 사이에 불거질 부조화를 최소화하는 방편의 하나다.
한편 간과하기 쉬운데 이병헌의 작품은 유희의 코미디만큼 정념의 드라마도 강하다. <닭강정>만 해도 숱한 코미디를 거쳐 결국 당도한 곳은 최민아(김유정)를 향한 아버지 최선만과 고백중의 절절한 순정이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 고백중이 타임머신을 누르는 순간은 감동적인 터치로 그린다. 감독의 전작 <드림>도 홈리스 아마추어 축구선수의 눈물나는 경기가 영화 후반을 장악했고, 그가 각본을 쓴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의 인물은 모두 결국엔 봉합될 애정 갈등에 휩싸여 있다. 여러 사연을 지닌 인물이 모두 아픔과 상처를 이겨낸 뒤 더 나은 행복의 순간으로 나아갔던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말할 것도 없다. 이때 유희 면에서 코미디를 놀이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면 의문이 생긴다. 놀이는 사회문화적 맥락의 규범에서 떼어놓고 볼 때 순간의 유희 추구만이 그 전부다. 외모 비하를 포함해 공개 코미디가 비판받았던 지점이 분명 <닭강정>에도 존재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면 올바름과 그릇됨을 판단하는 데까지도 닿지 못하고 휘발한 순간의 유희를 즐겼기 때문이다. 또 이같은 속성 탓에 코미디는 정념의 드라마를 겨냥하는 이야기 진행에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이병헌 작품의 드라마는 강고하다.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비평의 언어와 시리즈
사정이 이렇다면 이병헌의 코미디는 통념과 다르게 오히려 드라마의 정념을 증폭한다고 보는 게 옳다. 비결은 비록 순간의 유희로 사라질지언정 이병헌의 코미디가 인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낙천성을 부여하는 데 있다. 그의 인물은 자조하더라도 결코 자기혐오에 빠지진 않는다. 어떤 영화에선 코미디의 외피를 둘렀어도 인물이 연민의 대상처럼 보인다. 감독이 부여한 캐릭터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채 내키지 않은 몸짓과 말을 스스로와 상대 인물에게 하면서 괴로워하는 심정이 전이되는 것만 같아서다. <닭강정>은 반대다. 이 세계의 인물은 감독을 향해 무한한 신뢰를 보이며 지시를 기꺼이 따르고, 그 세계에서 떠나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인물의 낙천성은 인물이 지닌 사연의 힘과 인물에 동화한 관객의 응원이 목표한 드라마의 정념을 완성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추진력을 보탠다. 또 작품 전반을 감싸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실패, 폭력, 죽음마저 그게 옳은지와 상관없이 명랑한 성질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기까지 한다.
영화가 무엇인지 되뇌고 어떻게든 영화를 영속시키려는 마음이 강해지는 건 시리즈를 포함한 시청각 매체 예술의 경계가 그만큼 희미해지는 방증이겠다. 영화에 편향된 비평의 언어를 바탕으로 시리즈에 다가가려 하면 난감함을 느낀다. 이때마다 영화야말로 불화와 화합의 산물이라는 점을 떠올린다. 이병헌의 코미디는 형식적으로는 기민하게 대처하고 내용 면에서는 드라마의 효과를 증폭하는 기술을 활용해 얼핏 불화를 일으킬 요소들을 붙잡아 도리어 화합시키면서 풍족한 정서를 만들어내는 독특한 지위에 이른다. 다시 한번 화합의 시선을 던져야 할 때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