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란 무엇인가. 이 영화 속 공포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나는 지금 공포를 느끼는가. 점프스케어나 고어와 같이 시각적인 자극에 호소하는 공포든 오컬트나 코즈믹 호러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드는 공포든, 대부분의 공포는 언어로 정리되기전 무의식에 먼저 각인된다. 특히 영화 속 공포의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충격 효과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그러므로 호러 장르는 좋든 싫든, 완성도와 무관하게 시대적 무의식을 반영하는 법이다. 개봉하기 전부터 국내외 호러 팬 사이에서 화제작으로 불린 <악마와의 토크쇼>와 <애비게일>은 동시대 미국 호러영화의 두 경향을 대표한다. 스타일상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영화를 통해 동시대 호러 장르의 흐름과 무의식을 파헤쳐보았다.
200만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악마와의 토크쇼>는 A24에서 비롯한 아트하우스 호러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퍼져가고 있다는 이정표로 보인다. 이 영화는 숏 바이 숏으로 보아도 될만큼 정교한 만듦새를 자랑하며 동시대 미디어에 대한 고도의 풍자와 담론을 다루는 데에도 성공한다. 과연 호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의 극찬을 받을 만한 영화다. 한편 <애비게일>은 뉴라인과 블룸하우스 이후의 호러가 어떻게 발전할지 그 씨앗을 담고 있다. 호러 장르의 문법을 발명한다기보다 호러 장르의 문법을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데에 집중한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을 플레이하는 듯한 스토리텔링과 공간, 발레리나와 뱀파이어를 결합한 기상천외한 컨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스플래터답게 내장이 흩뿌려지는 유혈낭자한 미장센과 유머는 덤이다.
<애비게일>, 호러의 게임화
<애비게일>은 개봉 당일 알렉스 갈랜드 감독의 <시빌 워>(2024)를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화제에 올랐다. 영화는 프랭크(댄 스티븐스)를 중심으로 한 범죄자 일당이 소녀 발레리나인 애비게일(알리샤 위어)을 납치하며 시작된다. 납치 의뢰자인 램버트(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는 프랭크 일당을 성에 가둔 다음에 조이(멜리사 바레라)가 24시간 동안 애비게 일을 잘 돌본 다음에야 착수금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날 밤 범죄자 일당 중 두명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남은 사람들이 탈출하려는 찰나 성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프랭크는 애비게 일에게서 그녀의 아버지가 전설적인 범죄 조직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접한다. 프랭크는 일당 중 두명을 죽인 것이 성에 잠입한 범죄 조직의 킬러 발데스의 소행이라 생각한다. 발데스의 정체는 애비게일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관심에 지쳐 그의 관심을 받고자 살인을 저지르는 흡혈귀다. 프랭크와 조이를 포함한 남은 생존자는 살아남기 위해 팀플레이를 펼친다.
애비게일>의 배급을 담당한 유니버설 픽처스는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미라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몬스터 유니버스를 제작하며 현대 괴수물 장르의 토대를 세운 호러 명가다. 유니버설 픽처스는 2017년에 다크 유니버스라는 이름으로 기존 몬스 터 유니버스의 리부트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 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향을 받아서 몬스터를 슈퍼히어로처럼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각색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유니버설은 드라큘라의 하인 렌필드를 주인공으로한 <렌필드>(2023)와 <뱀파이어의 딸>(1936) 를 재해석한 <애비게일>을 배급한다. 두 영화는 뱀파이어 장르를 스플래터와 밀실 호러, 오피스 코미디 같은 장르들과 뒤섞는 혼종성과 B급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공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 영화는 뱀파이어 장르를 탈맥락화하고 유희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컨저링> 시리즈가 호러영화에 드라마와 스토리텔링을 접목하려고 했다면 이후의 호러영화는 호러영화의 규칙을 메타적으로 가지고 노는데 집중한다'.
<애비게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컨셉이다. <렌필드>가 악덕 사장과 뱀파이어를 연결했듯이 <애비게일>은 발레리나와 뱀파이어를 연결한다. 하지만 두 이미지 사이에는 유기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뱀파이어가 발레로 액션을 펼치며 상대방을 조종하는 순간에 드러나는 독창적인 비주얼과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살육을 벌이는 장면마다 들린다는 아이러니만 남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비게일>은 영화보다는 게임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밀실 추리극처럼 전개되던 영화는 애비게일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최종 보스를 무찌르는 MMORPG의 레이드로 전환된다. 뱀파이어인 애비게일을 죽이러 가기 직전 캐릭터들은 각각 마늘과 심장에 박을 나무 말뚝, 십자가 등 아이템을 챙긴다. 뱀파이어가 볕에 닿는 순간에 신체가 폭발하는 것을 보여 주며 햇빛을 뱀파이어의 접근을 차단하는 장애물로 활용하며 서사를 전개하는 것이다. 후반부에 사건의 배후 인물인 램버트의 정체가 드러날 때 급작스레 문이 열리는 전개도 게임 속히든 스테이지가 등장하는 방식을 보는 듯하다. <렌필드>와 <애비게일>에서 마구 분출되는 피와 내장은 역겹지 않다. 도리어 게임 속 적을 총으로 쏘듯이 웃기고 통쾌하다. 호러 장르의 게임화. 이것이야말로 <애비게일>의 흥행한 비결인 동시에 알맹이 없는 쾌감의 한계다.
<악마와의 토크쇼>, 동시대 담론으로 무장한 공포
한편 <악마와의 토크쇼>는 1970년대 토크쇼와 오컬트, 파운드 푸티지, 보디 호러 장르를 넘나드는 혼종적인 영화다. 영화는 1970년대의 유명한 TV쇼 진행자 잭 델로이(데이비드 다스트 말치안)가 진행했던 <올빼미 쇼>의 사라진 필름을 발견했으며, 그 필름이 사라진 맥락을 설명하는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공식을 따르며 시작된다. 영화 속 TV쇼는 3부로 나뉜다. 1부는 영매 크리스투(파이살 바지)와의 대화로 시작된다. 어설픈 사기꾼으로 보이던 크리스투가 1부가 끝날 무렵 어떤 존재를 만났다고 이야기하며 극의 긴장감이 더해진다. 그 존재는 암에 걸려 죽은 잭 델로이의 아내로 추정된다. 2부 부터는 리처드 도킨스를 보는 듯한 회의론자 카마이클(이안 블리스)이 등장한다. 그는 최면술사로 활동했고 지금은 과학자로 전향해 초자연적 현상을 거짓으로 밝히는 초자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무한테나 시비를 거는 카마이클의 까칠하고 무례한 언행은 관객의 불쾌감을 자아낸다.
1부가 끝나갈 무렵 악마와 접촉에 성공해 검은색 구토를 한 크리스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영화 전반에 공포가 일기 시작한다. 3부에서는 사탄교에서 살아남아 몸 안에 악마를 거느리고 있는 릴리(잉그리드 토렐리)와 그녀를 돌보는 심리학자 준(로라 고든)이 등장한다. 준은 그날따라 릴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 다음 원래 약속했던 강령식을 멈추려 한다. 잭 델로이와 PD는 시청률을 올리고자 준을 설득해 이를 강행하기로 한다. 카마이클이 릴리와 준을 도발하자 준은 우려 섞인 얼굴로 강령식을 진행한다. 그 순간 릴리의 목소리가 둘로 나뉘며 악마가 등장하고, 방송국 전체에 정전이 발생한다. 카마이클은 릴리가 거짓말을 했다며 관객에게 최면술을 걸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조던 필의 <겟 아웃>과 A24의 <유전> <더 위치> 등을 기점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작가주의 성향의 아트하우스 호러의 계보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아트하우스 호러는 기존 호러와 달리 동시대적 담론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던 필은 <겟 아웃>부터 <놉>까지 공포 영화 속 흑인의 수난사를 복원한다. A24의 알렉스 갈랜드의 <멘>(2022)은 보디 호러의 문법으로 여성혐오가 재생산되는 양상을, <미드소마>는 포크 호러 속 파시즘의 폭력성을,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음모론 서사를 통해 서브컬처 속 여성혐오와 거기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밀레니얼의 무기력을 공포로 그려낸다. 아르카샤 스티븐슨의 <오멘: 저주의 시작>은 오컬트와 보디 호러를 경유하며 호모소셜과 여성의 신체에 가해진 폭력을 적나라하게 가시화한다. 아트하우스 호러에서는 감독이 영화 장르에 연관된 담론을 공부하고 거기에 연루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장르를 구성하는 내적 논리와 담론을 뒤집으며 본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치중한다. 로빈 우드와 같은 비평가가 <엑소시스트> 등 1970년대 호러영화를 분석하고 미국인의 무의식에 숨은 공포를 도출하며 담론에 포함시킨 것과는 정반대다. A24산 아트하우스 호러는 관객으로 하여금 숨겨진 은유를 읽게끔 하는 방식으로 지적인 욕망을 자극했다. 나아가 지적인 문화 소비로 타인과 차별화되고자 하는 힙스터의 욕망을 자극하여 그의 전유물로 자리하며 대중에게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악마와의 토크쇼> 또한 그 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호러의 미래는?
<애비게일>과 <악마와의 토크쇼>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영화 모두 호러의 전통적인 방식을 거스르면서 장르를 도구화했다. 새로움을 전제로 한 장르의 변주는 관습적인 이미지를 깨부수며 쾌감을 안긴다. 하지만 두 영화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애비게일> 이 호러의 껍질을 게임으로 갈아입었다면, <악마와의 토크쇼>는 호러의 속살을 뒤집는다는 점이다. 영화 장르로서의 ‘호러’는 좋든 싫든 시대의 무의식을 투영한다. <악마와의 토크쇼>의 TV쇼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은 왠지 낯설지가 않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TV쇼에 불러들인 것으로 모자라 악마까지 소환해 명성을 회복하려는 관종 잭 델로이와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방송국, 상대방을 냉소하고 조롱하며 논의를 흐리는 회의론자 카마이클의 앙상블은 지금의 인터넷 공론장을 환유하는 듯하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1970년대만 해도 TV쇼는 그때의 인간 군상이 드러나는 장소로 작동했다. 토크쇼라는 은폐된 공간은한 사회를 함축하는 장치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문제적 장면은 카마이클이 거스(리스 오테)에게 최면을 거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관객까지 최면을 거는 듯한 속임수를 내비치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포스트-트루스(Truth)의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과학과 초자연이라는 두개의 진실 체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는 오컬트 장르의 컨벤션은 이 영화에서 동시대를 은유하는 틀이 되며, 결국 관객마저 속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이때 최면술로 거스의 배에서 벌레가 마구 기어나오는 장면은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비디오드 롬>(1983)을 연상시킨다. 미디어가 신체의 감각마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다는 크로넌버그식 보디 호러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이다. 후반부 잭 델로이의 플래시백 속에 프리메이슨을 연상하게끔 하는 오컬트 교단이 등장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교단은 포크 호러의 걸작 <위커맨>(1973)의 이미지를 인용한다. 철저히 감춰진 미디어, 정치, 자본이 결탁하는 세계가 포크 호러를 보는 듯하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잭 델로이가 <라라랜드>(2016)를 보는 듯한 플래시백 아래서 시청자에게 “제발 TV를 꺼달라”라고 호소하는 엔딩은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전복 시킨다.
어떤 방향이든 영화장르로서의 호러가 전통에서 탈피하여 변화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올해 한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파묘>는 오컬트 영화라기보다는 팀플레이를 중심으로 한 슈퍼 히어로영화에 가까웠다. 그게 흥행이 비결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호러 장르의 변화가 단지 북미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일련의 변화는 공포가 진화하는 과정일까, 공포가 소멸하는 과정일까. 판단은 미래의 관객에게 맡겨두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