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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몸이라 쓰고 진정성이라 읽는다, '스턴트맨'
2024-05-22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턴트맨>의 기본 설정은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된다. 대역 배우 혹은 무명 배우가 스타를 질투하는 이야기는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대역 배우를 질투한 스타라니. 캐스팅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설정은 육체의 우위를 은밀하게 복권하는 데가 있다. 위험한 액션을 소화하는 신체 능력의 강조는 ‘몸’에 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상승한 문화적 배경과 연결할 수 있다. 시기마다 몸은 새로운 의제를 떠안는데, 오늘날 몸은 진정성에 관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호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수록 ‘진짜’에 관한 요구와 가치는 더불어 상승했다. 이에 따라 이미지, 특히 몸의 이미지는 그에 걸맞은 능력을 증명하도록 요구받는다. 가령 ‘완벽한 피지컬을 찾는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성별, 나이를 초월한 신체 대결을 펼치는 예능프로그램 <피지컬: 100>은 지구력을 갖췄을 것으로 보이는 단단한 몸이 실제 그만큼 능력이 있는지 증명하는 장이다. 대결은 100개의 토르소 중 하나가 남을 때까지 단계를 거치며 하나둘 깨뜨리는 과정으로 요약되는데,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형태를 지닌 몸의 자리는 깨진 99개의 토르소 속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가치는 살아남은 1개의 몸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99개의 깨진 몸과 함께 보이는 몸이 실제의 능력과 일치하리라는 편견을 깨뜨리는 데 있다. 반면 <범죄도시> 시리즈는 그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진정성을 설득한다. <범죄도시>는 살아남은 몸으로서의 마석도(마동석)가 매번 새로운 도전자를 만나 기록을 경신하는 이야기다. 그는 절대 깨지지 않는 기록을 보유한 챔피언이며, 시리즈가 계속되는 한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관객들은 배신당할 위험 없이 안전하게 경기를 즐길 수 있다. 마석도는 새로운 빌런의 목록을 갈아치우며 보이는 몸이 실제의 능력과 일치 함을 증명한다. 마석도에 대한 관객의 안심은 치안에 대한 시민의 안심으로 치환되어 안전한 사회에 관한 환상을 다독인다.

감독 데이비드 리치가 실제 스턴트맨 출신이라는 비하인드로 진정성을 더한 <스턴트맨>은 몸을 영화제작을 위한 장에서 풀어낸다. 배우의 몸이 가장 잘 쓰이는 장르로서의 액션과 장르를 지탱하기 위해 동반되는 무수한 몸을 통해 보이지 않는 몸으로서의 액션과 영화산업을 다시 쓴다. 콜트(라이언 고슬링)는 세계 최고의 액션 스타인 톰 라이더(에런 존슨)의 전속 스턴트맨이다. 어렵고 궂은 장면을 소화하지만 “대역 없이 직접 액션 시퀀스를 소화했다”는 톰의 인터 뷰와 함께 그의 존재는 지워지기 일쑤다. 배우가 직접 액션 시퀀스를 소화했다는 홍보 문구는 실제로도 종종 쓰이며, 이 경우 해당 시퀀스를 더 실감나게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기에 어느 정도 실효성이 있다. 사실 배우가 직접 액션 시퀀 스를 소화하든 그러지 않든 화면에 드러난 이미지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액션 시퀀스를 직접 소화했다’고 밝혀야 하는 이유도 그러지 않으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배우의 말이 거짓이라 해도 그 사실은 관객의 몰입에 도움이 된다. 영화가 몰입의 예술인 한 관객 역시 이같은 거짓말 혹은 부추김의 공모자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대역 스턴트맨은 액션을 남기고 사라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턴트맨은 유령에 가까운 존재다. 어떤 면에서는 음향 혹은 음악의 차원이나 카메라 뒤에서 자신을 숨기는 스태프와 유사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면서도 자신을 숨겨야 하는 스턴트맨은 한층 더 기이한 존재다. 모든 영화 촬영 현장에서 과업은 영화 한편을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데 있기에 촬영 현장 내부에서만 스턴트맨을 그린다면 캐릭터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스턴트맨을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 영화는 필연적으로 촬영장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기술과 몸의 대결

스턴트 촬영 도중 일어난 추락 사고로 현장을 떠나 있던 콜트가 현장에 복귀한 뒤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프로듀서 게일(해나 워딩엄)의 주도 아래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포함한 전체 두상을 스캔하는 것이다. 그가 현장에 복귀하는 데는 18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 기술은 현장이 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막상 현장은 생각보다 구식이다. CG로 처리할 수 있는 장면조차 직접 폭약을 터뜨리고, 배우가 직접 탈을 쓰는 방식을 고집하는 고지식한 감독 조디(에밀리 블런트)가 현장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조디의 현장은 그가 관두기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한 것처럼 보인다. 조디가 촬영감독이던 현장에서 무전기로 밀어를 나눴던 두 사람이 이제는 한개의 확성기를 나눠 쓰며 번거롭고 공개적인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기이한 퇴보다. 조디가 만드는 외계인과 카우보이의 사랑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과거를 반영한 단순하고 엉성한 이야기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영화 촬영장 바깥에는 영화의 허구와 상반되는 ‘진짜’가 그려질 것 같지만, 바깥은 영화보다 더 큰 허구의 세계로 묘사된다. 톰 라이더의 집은 총과 칼이 난무하는 액션 시퀀스가 펼쳐지는 또 다른 세트장처럼 미련 없이 부서지고 깨진다. 톰을 찾기 위해 방문한 클럽에서 술을 받아마신 뒤 발현된 환각 증세라든지, 얼음 위에 놓인 시체와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 역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콜트는 마치 <트루먼 쇼>처럼 자신만 모르는 덫에 걸린 것 같다. 실제로 이것은 톰의 실수를 덮기 위한 계략이었다. 톰이 실수로 스턴트맨 헨리를 살해한 장면이 카메라에 찍히면서, 딥페이크 기술을 역이용해 콜트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다. 늘 그늘에 가려진 존재인 스턴트맨은 처음으로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된다. 자신이 한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지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하지도 않을 일을 자백할 처지다.

게일과 톰의 계략에 맞선 조디와 콜트의 싸움은 선악의 대결이기보다는 ‘딥페이크’로 대표되는 몸의 자리를 넘보는 기술에 대항한 측면이 크다. 기술이 트릭이라면, 스턴트맨의 몸은 진실의 자리에 불려온다. 지루한 진실보다 흥미로운 거짓을 좇는 시대를 발판 삼은 딥페이크 기술에 미약한 몸이 대적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상에 침투한 기술적 존재들을 대략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태초부터 기술을 기반으로 해왔기에 기술은 곧 영화예술의 본질 이자 운명이다. 기술은 관객의 시각이 감지할 수 있는 미세한 불쾌함을 점차 줄여나가는 동시에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러움으로 학습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는 이러한 시도의 정점에 놓인 작품이다. 파랗고 긴 나비족의 얼굴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이미지 사이를 파고들었으며, 이 영화의 성공은 최근 유명 애니메이션의 실사화가 활발히 이뤄지는 데 영향을 주었을 거라 짐작된다. 오늘날 버추얼 인플루언서와 아이돌 같은 가상 세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향유하게 된 것은 단지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상매체를 통해 그래픽 화된 인간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래픽화된 존재들에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되면서 실제 배우의 이미지 조작 역시 별다른 저항 없이 이뤄지게 되었다. 배우가 다양한 연령대를 소화할 때, 기존에는 하나의 배역을 다른 나이대의 배우들이 각각 담당하거나 분장을 통해 구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주연배우의 얼굴을 활용해 다양한 나이대를 표현하기 위해 딥페이크 합성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가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시맨>이다. <아이리시맨>에서 노년이 된 주연배우의 과거 장면에서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의 얼굴을 3D 스캔해 실제 배우의 과거 이미지를 합성하는방식의 디에이징 기술이 사용되었다. 이같은 방식은 동일한 배우의 얼굴을 활용했기 때문에 덜 문제적일 수 있다. 반면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ㅇ난감>에서는 배우 손석구와 닮은 외모의 아역배우가 실은 딥페이크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쟁점은 무엇보다 실제 아역배우의 얼굴이 지워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 자체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다 해도 단역에 해당할 배우의 비중은 대역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를 비판하기는 쉬우나 이러한 기술은 몰입을 위해 바쳐진 영화 기술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역배우와 성인배우의 격차가 때때로 몰입의 방해 요소로 언급되는 경우는 흔하다. 이러한 요구와 당면한 현상을 번갈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조작된 이미지가 구분 가능한지의 여부다. 가령 <아이리시맨>은 배우의 신체적 차원에서 약간의 어색함을 드러냈다. 실제 나이 든 배우의 액션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갱신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색함은 어쩌면 보존해야 할 진실의 표시로 남게 될지 모른다. <아이리시맨>에서 남아 있던 어색함이 <살인자 o난감>에서는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다. 불쾌감은 오직 그 이미지가 충분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서 온다. 여전히 이미지에서 발견되는 어색함은 완벽한 이미지에 속아 넘어간 뒤,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얼굴이 아니면 목소리로

물론 배우들은 메이크업과 분장을 거치기에 실제 얼굴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파고들수록 모호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딥페이크 역시 일종의 분장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딥페이크 기술은 보이는 것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된 시대와 뒤엉켜 서로를 부추긴다. 이러한 논의에서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음성은 진실에 가까운 자리에 위태롭게 내몰린 것 같다. 딥페이크를 통해 연기자의 얼굴이 합성된 이미지로 대체될 때, 목소리는 원래 연기자의 것으로 남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남은 목소리는 진실의 흔적이 되는 것일까, 일종의 더빙이라는 다른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일까. 남은 목소리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기술의 발전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이행기를 복원하는 측면이 있다. 무성영화 시기 배우의 연기에서 표정이나 외적인 이미지가 중요했다면, 유성영화 시기에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던 배우의 목소리가 전체 이미지를 뒤바꿀 정도로 중요해졌다. 이미지에 맞지 않는 목소리를 지닌 배우는 변사라는 직업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몰입으로서의 영화다. 관객의 몰입을 깨는 목소리는 사라져도 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음성 역시 기술에 의해 합성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가장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지만 이미지보다는 늘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스턴트맨>에서 녹음된 음성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결정적인 증거로 기능한다. 조디와 콜트는 촬영이 끝난 뒤에도 녹음기를 끄는 것을 종종 잊는 톰의 버릇을 이용해 톰이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스턴트맨>은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서는 기이할 정도로 촬영 현장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영화이기도 한데, 콜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온 스태프가 합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짜 영화 촬영이 시작되며, 현장의 의미가 비로소 작동한다. 영화의 목적은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것에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이동한다. 이같은 서사는 감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한명의 스타를 탄생시키기 위해 다수가 투입되는 영화산업의 폐해에 가까운 본질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한편의 허구를 위한 영화가 허구를 경유해 진실을 구하리라는 강변으로도 읽을 수 있다.

영화 촬영장 안과 밖을 오가는 <스턴트맨>은 완전히 영화 안에 있는 것도,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닌 스턴트맨의 위치를 반영한다. 영화는 스턴트맨을 기리는 하나의 러브레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턴트맨을 대상으로 한 오스카상 제정을 위한 확성기 노릇을 하며 공감을 얻고 있다. 이것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의 여부보다 중요한 건 영화는 곧, 몰입을 위해 숨어야 했던 수많은 유령에 의해 지탱된 산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몰입을 위해 외면했던 많은 부문이 있고, 그중에는 목소리 연기자도 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위해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들이 있지만 이들을 위한 오스카상 역시 부재하다. 목소리를 연기하는 성우와 몸으로 부딪치며 어려운 액션을 소화하는 스턴트 배우들은 기술로 빠르게 대체되는 현장으로 인해 이제는 정말로 유령이 될지 모를 위기에 처했다. 자의인 줄 알았으나 타의에 의해 현장을 떠난 몸이 부서지고 깨지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콜트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을 꿈꾸는 비명처럼 들린다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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