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소통의 과정, 소통의 방식, '여행자의 필요'
2024-05-22
글 : 오진우 (평론가)

<여행자의 필요>. 자꾸 다시 읽어보게 된다. 어쩌면 의도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필요’도 사실 어색하다. ‘요구’가 좀더 어울리지만 가장 적당한 건 영어 단어 ‘니즈’(Needs)다. 어느새 한글보다 익숙한 이 외래어에서 프랑스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모습이 엿보인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에 대다수의 관객은 아낌없는 환대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어색함을 남긴다. 모종의 이질감이 <여행자의 필요>가 지닌 감각의 덩어리다. 홍상수 감독은 근린공원을 비롯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흔해 빠진 풍경 속에 이방인 이자벨 위페르를 배치하고 익숙지 않은 감정 들을 끌어올린다. 그의 방식은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이리스의 프랑스어 수업 방식과 흡사하다. 그녀의 수업은 수강생에게 상처를 내는 방식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첫 번째 수업에 등장한다.

수강생(김승윤)은 손에 났던 상처에 새살이 돋은 것을 이리스에게 말한다. 얼핏 보면 잉여처럼 보이는 이 숏이 영화의 핵심이다. 전면으로 내세운 막걸리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모두 영화에 필요한 요소지만 오히려 잉여에 가깝다. 이리스는 수강생의 새살을 보기 꺼린다. 관객인 우리도 볼 수 없다. 카메라도 그녀의 손을 줌인해 비추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녀의 새살을 상상하게 만든다.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돋는 과정. 이는 이리스의 수업 방식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감정에 균열을 내는 이리스의 수업을 참관하는 셈이다. 동시에 그녀의 칼날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로 향한다. <여행자의 필요>는 사유하는 영화다. 사유를 촉발하는 산보자 이리스는 수강생들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작가다. 수강생들은 자연스레 연기자가 된다. <여행자의 필요>도 홍상수가 최근 자주 만드는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의 또 다른 변주에 속한다. 여기서 이리스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시인에 가깝다.

시간의 틈새에서 중요한 것은

이리스의 수업은 수강생들의 연주로 시작하고 동일한 질문과 동일한 답변을 반복한다. 특히 마지막 질문이 흥미롭다. 수강생들은 연주를 하면서 행복감과 멜로디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질문을 이리스가 꺼낸다. 연주하는 자기 모습이 자랑스럽냐는 것이다. 이것은 유도심문에 가깝다. 수강생들은 실수하진 않았지만, 연주를 잘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리스는 인덱스카드에 수강생이 읽고 연습할 프랑스어 문장을 써내려간다. 그녀가 형상화하는 것은 수강생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누군가다. 그 존재란 수강생의 연주 실력이 쌓여 언젠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 존재는 수강생이 가정하는 미래의 자기 모습이다. 즉 허상이다. 이리스가 열어젖힌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이리스는 단순히 이방인이라는 표상을 초과한다. 그녀는 시간의 신처럼 보이기도 하고 녹색의 자연에 깃들어 있는 정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가 열어젖힌 하나의 갈래는 미래였다. 다음 인덱스카드에 적힐 시간은 과거다. 여기서도 볼 수 없는 인물인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두 수강생 모두 석비 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한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 짓는 첫 번째 학생과 달리 두 번째 학생인 원주(이혜영)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때 소환되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인 ‘이만희’ 감독이다. 영화는 이혜영의 실제 사연을 끌어들이면서 그녀가 연기하는 ‘원주’를 복합적인 캐릭터로 만들며 유운성 평론가가 <유령과 파수꾼들>에서 설명한 ‘형상적 픽션’의 순간을 보여준다.

미래와 과거로 열어젖힌 시간의 틈에서 정박할 곳은 현재다. 홍상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영화는 마지막 챕터에서 ‘현재’를 다룬다. 시인 인국(하성국)의 집에 같이 사는 이리스는 집에 돌아와 접지 상태를 확인한다. 0도임을 확인하고 안심한 이리스는 인국의 상태도 점검한다. 0도에 가까운 그의 접지 상태를 다그치며 발등을 세게 누른다. 붕 뜬 인국을 붙잡으려는 이리스의 몸짓은 시간의 틈새를 메우려는 행위다. 그녀는 건반을 치는 인국에게 기억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한음, 한음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국과 같이 관객도 이리스를 믿을 만한 존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국의 어머니(조윤희)의 등장과 함께 이 믿음은 심판대에 오른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와 수강생과의 신뢰는 거래를 통해 성립했다. 수업이 끝나면 수강생들은 현찰로 이리스에게 수업료를 지급했다. 특히 두 번째 학생 원주는 그녀의 수업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원주는 기니피그처럼 실험 대상이 아니냐며 이리스를 비꼰다. 그러한 그녀도 수업료를 건네며 그녀를 믿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월세에 보태라고 인국에게 전달하지만, 인국은 거절한다. 애초에 둘 사이의 믿음은 화폐 거래로 이뤄지지 않았다. 인국의 어머니는 그녀의 과거 이력을 살펴보라고 당부한다. 상상한 이미지로 그녀를 바라보지 말라고 말이다. 관객인 우리도 영화를 통해 이리스와 그녀를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다.

홍상수의 새로운 길

어머니가 다녀간 이후로 이리스에 대한 인국의 믿음에 의문이 생긴다. 실체와 상상 사이에서 영화는 하나의 플래시백 장면을 꺼내든다. 믿음의 근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장면은 이들이 처음 조우한 날이다. 인국은 근린공원 벤치에서 피리를 부는 이리스를 빤히 본다. 두 인물 사이로 진동하는 것은 피리 소리뿐이다. 시각적인 단서를 제시 하지 않는다. <여행자의 필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는 <인트로덕션> 이후 최근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하나의 경향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당신얼굴 앞에서>가 <여행자의 필요>의 좋은 비교군이다.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은총을 그려내려고 한다. 상옥(이혜영)은 우리 얼굴 앞에 천국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보이는 것에 천착했던 홍상수가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불시착한 외계인과 같은 여행자 이리스에게 필요한 건 땅에 몸이 잘 붙을 수 있는 접지(earthing)의 0도를 찾는 것. 그접착제는 사람과의 믿음이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우정이 진동했을 때 발생한다. 장벽 없이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인 음악이 장마다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수많은 미디어가 등장하고 그것을 통해 매개하고 번역하고 소통한다. 많은 과정이 번잡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여행자의 필요>는 다중으로 주름진 형태의 소통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다 거둬버리고 음악만을 남겨둔다. 이리스와 인국의 첫 만남과 유사한 장면이 있다. 여기선 역으로 가장 복잡한 과정 끝에 이리스가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을 읊는다. 그 순간 시는 음악이 되고 그것을 부탁한 여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 사이로 잠시나마 열리는 틈새로 홍상수가 익숙하지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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