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글 전체의 흐름을 구상하기 위해 21세기에 나타난 영화적 자극, 충격, 혁신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카메라와 관련 있는 세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들은 문자 그대로 카메라가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는 인상과 함께 영화적 장치나 기술로 가능한 어떤 형식을 통해 관객에게 다른 시선, 다른 감각,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카메라를 삼킨 영화와 카메라가 빨려 들어간 미지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이 있다고.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친 작품은 클로즈업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초기 무성영화 <빅 스왈로우>(The Big Swallow, 1901)다. 실물보다 큰 사이즈로 대상을 찍으면 그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 자주 붙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남성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화면 앞으로 걸어온다. 이 작품이 공개될 당시에 나온 카탈로그에 따르면 남성은 카메라로 자신을 찍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짜증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찍지 마세요, 찍지 마세요, 카메라를 삼켜버릴 겁니다!” 이 남성의 분노는 카메라를 향해 다가서는 그의 성난 몸짓과 크게 벌린 입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카메라 앞으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입은 검은 구멍처럼 보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흥미로운 전환이 발생한다. 남성의 입을 비추는 장면에서 컷 편집이 이루어지면 한 촬영기사와 그의 카메라가 검은 구멍 속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리 앤 도앤은 <실물보다 큰: 영화에서 클로즈업과 스케일> (Bigger Than Life: The Close-Up and Scale in the Cinema)에서 이 영화에 쓰인 클로즈업이 “재현의 무인지대” (no-man’ s-land of representation)를 암시한다고 적는다. 이는 클로즈업을 통해 대상과의 거리를 지나치게 좁힘으로써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재현의 영역으로 침투했다는 말과 같다. 또한 도앤은 검은 구멍에 빠진 촬영기사가 작품 속 세계에 흡수된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무(nothingness)로 뒤덮인 스크린에 굴복한 관객을 형상화한다고 덧붙인다. 이런 관점을 따르면, <빅 스왈로우>는 영화적 기본 장치로서의 카메라, 카메라를 조작하는 촬영기사, 그리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를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의 신비한 힘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입속의 검은 구멍에 대한 영화적 호기심과 탐구는 약 1세기를 지나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작품의 오프닝 시퀀스는 CGI와 가상 카메라를 활용해서 작품 속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의 뇌, 신경, 입을 거쳐 주인공의 입에 물려 있는 총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중단 없이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인간의 신체 내부를 시각화한 최초의 또는 선구적인 사례라고 추켜세울 정도는 아니다. 알다시피, 서구 회화의 역사에서 다빈치,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렘브란트 등이 해부학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 바 있다. 또 광학기기의 역사에서 엑스레이, 내시경, MRI, CT와 같은 장치가 인간의 신체 내부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재현했다는 사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선례와 별개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파이트 클럽>이 영화의 역사에서 억압되었던 ‘재현의 무인지대’를 성공적으로 귀환시켰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오프닝 시퀀스는 물리적 카메라의 재현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인간의 신체 속 여러 기관과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를 하나의 소우주처럼 그린다. CGI의 기술적 보조로 인해 컷이 존재하지 않으며, 가상 카메라를 통해 물리적 카메라의 움직임을 모방한 덕분에 이 장면을 구성하는 뇌, 신경, 세포 등은 하나의 시공간적 연속체로 통합된다. 관객인 우리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인간의 신체를 탐험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 디지털영화의 시공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윌리엄 브라운의 견해를 빌리자면 <파이트 클럽>의 오프닝 시퀀스는 디지털영화가 물리적 장벽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간, 대상, 비어 있는 공간을 존재론적으로 대등하게 다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검은 구멍은 오늘날 영화에서 더이상 회피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적극적인 탐구의 대상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류의 상승>(The Human Surge, 2016)을 언급하고 싶다. 아르헨티나, 모잠비크,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는 청년들의 일상을 유사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찍은 이 작품은 과거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들이 순수한 시청각적 이미지를 제시하여 선형적인 이야기 전개와 구조를 피하려고 했던 시도를 계승한다. 그리고 그런 형식적인 실험을 동시대의 사회적 조건에 맞추어서 하나의 주제 의식을 만들어낸다. 주요 인물들은 거리와 공터를 끊임없이 배회한다. 그들의 최종 종착지는 핸드폰의 스크린과 컴퓨터의 모니터로 묘사된다. 지하실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매개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익명의 누군가와 채팅하는 어느 청년의 모습,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거리를 걸으면서도 핸드폰만을 쳐다보는 또 다른 청년의 모습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이 영화의 청년들은 평소 어둠에 갇혀 지내다가 디지털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안식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의 상승>은 특정 대상이 물리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있다가 그곳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이곳과 저곳 또는 현실과 가상으로 구분되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예를 들어 컴컴한 방 안에서 인터넷 실시간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한 청년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 화면을 찍던 카메라는 일순간 시점을 바꾸어 실시간 영상을 송출하고 있는 사람들의 방을 비춘다. 비슷한 방식으로 찍힌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한 청년이 소변을 보는 모습을 찍던 카메라는 소변 줄기의 흐름을 따라 개미굴로 들어간 다음 미로 같은 내부를 지나 입구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온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류의 상승>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인터넷에 상시 접속된 채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그리고 디지털 장치와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영화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검은 구멍은 인간의 시선을 극복하고 다른 시선을 통해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매개체와 같다. 이 연재 글 또한 그런 검은 구멍을 통과하는 하나의 오디세이를 그려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디지털영화의 등장을 둘러싼 성급한 예찬과 냉소적 비판이 수그러든 상황에서 지난날의 변화를 문자 그대로 캡처해 보고 싶었다. 21세기의 대중 영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영화가 관객을 매혹하는 방식과 관객이 영화에 반응하는 모습을 교차해서 생각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