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하겠다고 설친 지 10년쯤 되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최근 저의 음악 취향은 왜소하고 황폐해졌습니다. AI가 추천하는 플레이리스트로 허접하게 음악을 찾고, 감상보다는 확인한다는 느낌으로 듣습니다. 뭔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언제 마지막으로 가졌던가요.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냥 게을러져서인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음악을 들으면 앨범도 아티스트도 노래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모양과 색깔로 앨범 커버를 찾고, ‘좋아요’ 표식으로 노래를 기억하고 맙니다. 이 행위를 ‘음악을 듣는다’고 표현해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단순하게는 이것은 시대의 흐름과 도구의 변화입니다. 애초에 음악을 어떻게 즐기는가는 각자의 방식대로일 테니 시디플레이어 앞에서 가사지를 읽으며 노래에 집중하는 것이 플레이리스트 듣기보다 더 우위에 있는 행위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창작자는 이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어떤 반응을 기대해야 하는지, 아니 애초에 기대라는 걸 해도 되는지 막막해집니다. 그렇게 막막해하면서 추천 플레이리스트를 듣습니다….
이런 시절을 지내다 보니 손에 잡히는 뭔가가 정서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테면 종이책, 영화 포스터, 열차 기차표 같은 것이요. 따지고 보면 ‘진짜’라는 건 없겠지만, 그것에 가까운 것을 가지고 싶어집니다. 음악의 뭔가가 그리운데 뭐가 그리운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LP 플레이어를 사고 카세트테이프를 모으는 거겠지요. 그 어딘가에 느슨하게 속해 있는 저는 라디오에 몰래 마음을 기대고 있습니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거나 규칙을 선망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서로를 듣지 않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 라디오의 내용을 구성하고 손수 음악을 틀고 디제이가 방송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은 귀중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수작업(?)이 이제는 생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웃기죠. 큐레이션에 의도가 있다면 분명 그걸 찾는 구체적인 청자도 생깁니다. 쏘아 올린 신호는 단조로운 드라이브 속 차 안에서, 독서실을 나서는 교복 주머니에서, 거실 창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수신됩니다. 지금도 다른 공간에서 같은 것을 듣고 있을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새벽 1시에 KBS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의 오프닝 송과 전기현 아저씨의 다정하고 노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저 같은 사람들이요.
어느 날은 이 방송을 들으며 누워 있다가 어떤 노래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언젠가 봤던 영화에 나온 음악이었는데 뭐였지, 가사를 추측해서 찾아보니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Rain and Tears>.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쓰리 타임즈>에 나왔었고 그럼 아주 예전에 대구의 동성아트홀에서 봤던 영화입니다. 라디오를 듣던 밤의 침대에서 빠져나와 자세를 고쳐 앉고 노트북으로 노래를 다시 듣습니다. 이제는 그때도 그 공간도 없고 영화 내용도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이 노래는 그 영화관 의자의 감촉과 먼지 냄새 같은 걸 떠올리게 합니다. 어둡고 낡은 노란 조명과 흰색 검은색 빨간색으로 구성된 공간의 느낌, 무려 ‘다음 카페’에 있던 상영 시간표, 영화관 주변의 그 후미지고 쇠락한 느낌의 상권. ‘예술’을 이해하는 ‘어른’들의 공간에 들어간다는 두려움과 설렘. 이런 공간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된 스스로에 대한 자뻑….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과 감각을 순식간에 소환한다는 점에서 노래가 가진 힘은 셉니다.
이런 플래시백은 진짜 저의 기억에서 배달된 것인지 소리에서 오는 감각으로 내가 무의식의 꿈처럼 만들어내는 건지 (아님 둘 다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이가 들어도 예전 언젠가의 기억과 감각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다니, 그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수 있다니 근사한 일입니다. 근사하긴 한데 어쩐지 서글퍼집니다. 살아 있다는 괴로움입니다. 모든 것이 한번뿐이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슬프고 기쁜 것도 결국 사라진다는 허망함입니다. 인간에게는 영원함이 없기에 그걸 갈구하고 결국 영원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의 존재통을 주장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영화까지 만들어버리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 예술은 나 자신과 누군가가 탈 수 있는, 정말로 기능하는 타임머신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삶의 유한함을 잠깐이지만 뛰어넘는 순간입니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에 도전하길 원한다니 인간은 얼마나 오만하고 나약한 존재입니까.
얼마 전에는 일본으로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일정 마지막 날 몇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을 밴드 일행과 나른하게 걸어 다녔습니다. 기후 위기와 전쟁, 세상만사의 고통과 불평등이 없는 척하는 듯한 너무 밝고 맑은 날씨를 느끼며 비현실적인 평화와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시기로 한 곳은 신주쿠에 있는 한 카페였습니다. 일행 중 한명이 추천한 곳이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예전에 다닌 것으로 유명한 깃사텐(일본식 다방)이라 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알았습니다. 그곳은 제가 20대 초반에 혼자 처음 일본을 왔던 때, 여행 일정의 첫날 간 가게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번 일정의 마지막 장소가 된 것이지요.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때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바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서 칵테일을 시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루키에 대한 흔적과 단서를 찾고 상상하던, 신주쿠 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 포도 가지에 붙어 있는 건포도 안주, 아주 작은 타일들이 예쁘고 깔끔하게 붙어 있는 일본식 건물들에 대한 질투, 3층 침대의 맨 위 칸과 게스트 하우스 욕실에 널려진 세계 각국의 샴푸들. 살아갈수록 추억할 것이 많아진다는 점이, 아름다움은 상실을 동반한다는 점이 아픕니다. 눈앞의 현실에 감사하고 집중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네요. 그렇지만 운이 좋다면 먼 훗날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 이 순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죠. 그때 무얼 타고 여기로 돌아올 것인지 한번 잘 정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