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대치동의 국어과 학원강사 서혜진(정려원)은 학부모들이 줄을 서는 등급 올리기의 귀재다. 그가 전설을 쓰기 시작한 건 14년 전, 꼴찌가 특기인 고등학생 준호(위하준)를 공부시켜 명문대에 보내면서다. 졸업 뒤 대기업까지 입사해 영원한 자랑으로 남을 줄 알았던 제자는 어느 날 혜진의 학원에서 하는 신입 강사 채용에 응시할 거라면서 혜진을 기겁하게 한다. 얼마 뒤 둘의 관계는 사제에서 동료로, 그리고 더욱 밀착된 사이로 변해간다.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등 세밀한 디테일을 그러모아 만든 유려한 이미지 속에서 한국 사회의 곪은 문제들을 날카롭게 찌르고 우아하게 터뜨렸던 안판석 감독이 5년 만에 신작을 냈다. 세속적 욕망이 들끓는 대치동의 학원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tvN 드라마 <졸업>은 20년간 홍보 업계에 있다가 창작의 세계에 입문한 박경화 작가의 첫 장편 드라마이기도 하다. <졸업>이 2화까지 공개된 뒤 안판석 감독과 박경화 작가를 만나 이토록 견고한 드라마의 협업 과정과 이야기의 향방에 대해 들었다.
- 지난 5월11, 12일에 <졸업> 1, 2회가 방영했다. 어떻게 지켜보았나.
안판석 그럭저럭 괜찮군. 현장 생각이 많이 났다. 간만의 연출이라 간혹 머릿속이 정리가 안되는 순간이 있어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박경화 너무 긴장해서 화면에 내 이름 뜨는 것도 제대로 못 봤다. 지인들이 잘 봤다며 보내준 인증 사진을 보면서 드디어 드라마가 세상에 나왔다는 걸 실감했다.
- <졸업>의 시작이 궁금하다. 안판석 감독이 오펜(CJ ENM이 신인 창작자의 발굴과 육성을 위해 2017년부터 시작한 프로그램.-편집자)으로 눈여겨본 박경화 작가에게 <졸업> 1회 집필을 먼저 요청했다고 알고 있다.
안판석 오펜 작품집에서 박경화 작가의 단막극(<스톡 오브 하이스쿨)을 읽었는데 잘 썼더라. 그래서 같이하자고 했다. 처음 써온 1회 대본이 괜찮았는데 문제는 이 이야기 자체가 장편과는 어울리지 않아 16회까지 끌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부터 둘이서 뭐 쓰지, 어떡하지 하다가 한회 나오고 사라질 수 있는 학원 원장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하나가 잡혔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무엇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건드리는가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의 범위를 최대한 좁혔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빠지고 연상연하의 두 남녀를 선생과 제자로 설정했다. 그것만 가지고 1회를 시작해서 작가님이 깊이 있는 관찰로 한회 한회 써나간 거다.
박경화 감독님이 처음부터 1회부터 16회까지 완벽하게 짜서 갈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자고로 이야기란 새롭게 생기는 문제와 갈등으로 세계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거다. 그 얘기가 힘이 됐다. 1회 중에 “고인 연못에 메기 한 마리를 풀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물고기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른다”란 원장(김종태)의 대사가 있다. 나는 그저 연못가에 서서 남자주인공이라는 메기가 튀길 흙탕물과 물보라를 관찰하자는 심정으로 작업해나갔다.
- <졸업>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일상의 허리로 들어가는 안판석 감독의 작품다운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혜진이 후배 강사 채윤(안현호)에게 학부모 상담을 연습시키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철저한 성격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박경화 초대장을 보낸다는 마음으로 1회 1신을 썼는데 받아들여진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인다. 오프닝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명확했다. 우리 드라마는 혜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 이 장면에서 혜진은 독서 활동이 학생부 평가 항목에서 빠졌는데도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채윤의 대답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조언한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혜진에게 있지 않나. 그렇지만 혜진의 대답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과 고민을 차단하고 점수만 올리면 된다고 말하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드라마가 될 거라고 시청자에게 처음부터 말을 건 것이었다.
안판석 이 신 찍을 때를 기억한다. 대본 그대로 드라마가 됐다. 우리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그랬지만 글 좋고 배우들은 알아서 자기 위치 딱딱 잡아주니 액션! 한번 하면 끝나는 거다.
- 주연 캐릭터 얘기를 해보자. 혜진은 어떤 인물인가. “스승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래?”라는 혜진의 대사를 들었을 땐 그가 여전히 교육자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박경화 적어도 1, 2회에서의 혜진은 스승이 되고 싶어 하는 인물이 아니다. 집안이 크게 망한 대학 시절, 고수익 아르바이트란 이유로 학원으로 흘러들어왔고 국어 전공자도 아니지만 점수 잘 올려주니 대치동 최고의 학원강사가 됐다. 교육자의 길 같은 걸 돌아보는 순간 너무 괴롭기 때문에 앞만 봤다. 그런데 이렇게 자괴감을 외면한 채 일해 온 게 혜진뿐일까. 너, 나, 우리 모두일 것이다. 다만 혜진은 드라마 주인공이니 사건을 하나 겪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준호다. 혜진은 준호에게 공부는 시험 보기 위해 하는 거라고 가르쳤고 그 결과 준호는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금쪽이가 됐다. 그런 준호가 강사로 들어오면서 혜진의 고민이 진짜 시작되는 거다.
안판석 준호가 학원강사를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안된다고 말한다. 직전까지 자기 일이 끝내준다고 했던 혜진이 말이다. 그 발언의 저의를 찾아나가는 것이 우리 드라마의 제일 중요한 포인트다.
- 재밌는 건 준호다. 2회까지의 준호는 전형적인 연하남와는 거리가 있다. 사랑을 퍼주는 무해함보다 성공에 대한 갈망을 더 크게 강조한 캐릭터다.
박경화 혜진은 명확한 상이 있었는데 준호는 좀 어렴풋해서 감독님과 여러 번 수정 과정을 거쳤다. 첫 번째 버전에서의 준호는 관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반듯하고 혜진을 첫사랑으로 고이 품어온 남자였다. 그런데 자꾸 강남 사는 공부 못하는 남자애가 어느 날 갑자기 학원에 다니더니 성적이 쫙 오르면서 명문대 타이틀까지 얻었는데 과연 무해하게 컸을까란 의문이 드는 거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도 못 가져본 강남 신축 아파트 계약서를 가져오겠다고 말하는 금쪽이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준호 캐릭터를 이렇게 가는 게 맞나 두렵기도 했다. 그래야 가짜가 아닐 거라는 감독님의 이정표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준호 캐릭터가 거기서 끝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를 성장시키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 멜로드라마의 남녀가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게 흥미롭다. 준호는 매해 스승의 날에 혜진을 만나러 온 듯한데, 둘을 지속적으로 교류해온 사이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안판석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간사에서 당연한 얘기다. 여자는 좋고 예쁘고, 남자는 제자라고 해도 참 괜찮잖나. 공부가 끝났다고 해서 서로를 싹 잊어버리는 게 외려 더 이상한 거다.
박경화 감독님 표현대로 하면 ‘저~기 머리 뒤끝에 서로가 있는’ 애틋함을 품은 관계에서 시작해보고 싶었다. 혜진에게 준호는 1년에 한번쯤 만나오면서 어느 날 툭 하고 생각나는 존재가 됐고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혜진을 따랐던 기억이 있는 준호는 스승의 날을 구실 삼아 혜진과 연을 이어나간다. 즉 준호가 혜진을 오랫동안 공전하면서 둘은 이제 놓을 수 없는 어떤 궤도에 오른다. 앞으로 사랑인지도 모르게 쌓였던 감정이 준호가 학원에 입성한 뒤 어느 순간 터져나올 것이다.
- 긴 싸움을 각오했다고 선언한 표상섭 교사(김송일), 혜진을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은 윤지석 강사(장인섭) 등 주변 인물의 활약도 기대된다.
안판석 사실 이들이 더 중요하고 더 잘 봐야 한다. 주인공의 내면과 본질은 이들을 통해 결국 나온다. 재미나게 표현하자면 주변 인물들은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거다. 예컨대 혜진에게 상섭, 지석이라는 리트머스를 댔을 때 혜진의 반응이 각각 다를 거지 않나. 그걸 다 종합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혜진을 알 수 있다.
- 두분에게도 잊지 못할 은사가 있나.
박경화 안판석 감독님이 내겐 은사다. 진심이다. (웃음) 작법이 아닌 작가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고 초반부터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감독님이 해주신 “드라마작가는 이 시대의 마지막 문학가라는 사명을 잊지 말라”는 말을 믿고 계속 이 길을 가려 한다.
안판석 문학과 예술이란 시작할 때 반대되는 걸 제시해서 갈등을 만들어내고 그 갈등을 깊이 파고든 끝에 뜻있는 결과를 얻는 거다. 본디 그런 것이기에 초반 반응은 어떻게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여전히 드라마가 문학의 본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이야길 작가님들에게 늘 한다. 문학의 시대는 간 게 아니라 영원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