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과 이주승이 9년 만에 만난다고 전하자 이주승은 시간이 벌써 그만큼 흘렀냐며 놀라워했다. 이주승과 <씨네21>의 마지막 만남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장편과정 7기 작품이었던 <소셜포비아>였다. 9년 새 이주승은 브라운관과 스크린, 연극무대를 넘나들며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마침내 KAFA 글로벌 프로젝트의 일환인 영화 <다우렌의 결혼>으로 돌아왔다. 그가 분한 승주는 단독 연출작 입봉을 간절하게 꿈꾸는 다큐멘터리스트다. 승주는 입봉의 기회를 잡기 위해 촬영감독 영태(구성환)와 카자흐스탄으로 가지만, 모종의 사고로 카자흐스탄에서 찍기로 한 고려인 결혼식을 놓친다. 결국 이들은 카자흐스탄 시골 마을 사티의 미혼 여성 아디나(아디나 바잔)와 함께 가짜 결혼식을 만들어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고자 한다. 오랜만에 <씨네21>을 찾은 이주승에게 <다우렌의 결혼>과 그와 만나지 못했던 지난 9년의 시간에 관해 물었다.
- 데뷔작 <장례식의 멤버>를 시작으로 <사브라> <소셜포비아> 그리고 이번 <다우렌의 결혼>까지. KAFA가 제작한 영화와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2016년엔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빛낸 10인의 파수꾼상’도 받지 않았나.
= <장례식의 멤버> 이후 많은 독립영화를 찍게 됐고, 독립영화로 필모그래피를 거듭 채우며 배우로서 명확한 브랜딩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장편영화 주인공을 맡은 <장례식의 멤버>는 공교롭게 KAFA 장편과정 1기 작품이었다. 고로 KAFA와 나는 서로의 시작을 함께한 동기다. 나조차도 KAFA 학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웃음) KAFA의 전작들과 달리 <다우렌의 결혼> 속 청춘 이미지가 편안해서 좋았다. 디즈니 영화 같았달까. KBS 드라마 스페셜에 출품해도 손색없을 무해함이 느껴져 신선했다.
- 언급한 대로 승주는 KAFA 영화 중에서도, 배우 이주승이 영화에서 연기한 역대 캐릭터 중에서도 손에 꼽게 무해하다. 승주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명확한 기준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 나름 딜을 할 줄 아는 수완도 갖추었다.
= 사건의 무게가 큰 영화가 아니라서 아무래도 편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청춘이 눈앞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이야기 아닌가. 평소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영향을 받는 편인데, 카자흐스탄의 풍광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번 영화처럼 로드무비를 찍을 때 가장 재밌다. 낯선 로케이션에 계속 나를 두다보면 예상 못한 감정이 신선하게 나올 때가 많다. <셔틀콕> 같은 작품이 특히 그랬다. 안 그래도 이번 시사회에 <셔틀콕>의 이유빈 감독님이 오셨다. “주승씨는 아직도 떠돌고 있네요”라고 하시더라. (웃음) 아직 공개되지 않은 오멸 감독님의 <파미르>도 로드무비다. 몽골에서 홀로 자전거 횡단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솔직히 촬영 당시엔 오멸 감독님을 원망하던 시간이 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바양울기까지 비행기가 있는데도 나를 자전거로 2주간 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침반만 보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려니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여정이 끝난 후, 내가 이 과정을 온전히 겪지 않았다면 캐릭터의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척박한 환경에 나를 내던지는 게 결론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 영화를 보면 승주의 입봉이 늦어지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승주는 흔히 통용되는 사회생활에 무딘 청년이고, 그가 피칭하는 <갈치의 꿈> 같은 작품은 아무래도 현실화가 어려워 보인다. 곳곳에 난관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승주가 입봉의 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승주는 메인 PD의 크레딧으로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 때 비로소 꿈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승주의 관점에선 아직 시작도 못한 것이다. 꿈을 꾸는 과정에서 꿈의 알맹이만 놓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알맹이만 보존한 채 산다면 다른 곳에 잠시 흘러갔다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승주가 그런 친구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을 보려 했지만 승주에겐 입봉작 연출을 넘어 진실한 작품 하나를 만들겠다는 일념이 있다.
- 승주는 말하지 않아도 아디나의 감정을 알아챈다. 승주가 두번의 우연으로 아디나를 카메라에 담고, 두 차례 아디나의 카자흐스탄어를 통역 없이 알아듣는 장면이 대표적인데.
= 승주가 아디나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설정했다. 그래서 승주는 아디나가 말하는 언어의 진의까진 해석하지 못해도 그 뉘앙스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디나가 짓는 표정, 아디나의 에너지, 아디나의 말에 실린 여러 선택의 가능성 등에서 말이다. 작품을 찍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으로 인해 아디나를 마음속에서 배제했지만, 아디나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같은 해석을 아디나 바잔 배우와 나누기도 했나.= 딱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상대 배우와 너무 가까워지면 자칫 가벼운 리액션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승주와 아디나의 적당한 관계만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친하게 지냈다. 물론 밥은 늘 함께 먹었다. 평소에도 카메라 밖 관계가 어쩔 수 없이 연기에 물든다고 생각한다.
- 2020년대 들어 <혈안> <돛대> 두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해 영화제에 출품했다. 두 작품 모두 제목이 중의적이고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또 서사를 한 방향으로 일단락짓기보다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엔딩을 택한다.
= 지금껏 내가 연기한 배역들의 성격과 내가 쓰는 이야기는 결국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중성을 지닌 캐릭터, 이야기의 반전을 담당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덕분에 다면성을 염두에 두는 사고가 유독 발달해 있다. 연기할 때든 연출할 때든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작품의 비밀을 숨긴 채 충격을 전할지 많이 고민한다. 스토리텔러로서 문을 닫는 결말보단 새로운 차원으로 문을 열어주는 편을 선호한다. 관객들마다 영화를 둘러싼 자신의 해석과 진위가 다를 텐데 답을 획정해버리면 그들이 사고할 기회가 없어진다. 신선한 질문을 건네는 게 창작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두 영화의 각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주동 인물의 서사를 만들 때 고심하는 지점이 있다면.
= 프로타고니스트는 고민과 선택 속에 매 사건을 마주한다. 이때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고민한다. 언젠가 “왜 당신이 사랑하는 캐릭터에게 이런 고통을 선사하나”와 같은 피드백을 받은 적 있다. 그런데 그게 서사 아래서 작동하는 주인공의 숙명 아닐까. 나는 연쇄적인 불행과 실패 속에서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는다. 고통을 이겨낼 때 사람의 외연이 넓어진다. 그럴수록 주인공이 겪어야 할 사건에, 주인공이 내려야 할 선택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 2018년부터는 1년에 한번씩 연극무대에 오르고 있다. 꾸준히 무대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연극엔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훈련 시간이 존재한다. 그게 배우를 무조건 성장시킨다. 근래 올렸던 연극 <테베랜드>는 2시간40분 동안 한 공간에서 실수 없이 상대 배우와 공연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달리 말하면 관객이 그 시간을 객석에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예술엔 배우의 절대적인 훈련의 양과 고민의 양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운동 열심히 했다고 바로 쉬면 금방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나. 나는 연기도 꾸준한 훈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극무대를 놓지 않으려 한다. 물론 힘들다. 1년에 연극 한편을 하면 두달 연습해 두달 무대에 오르는데, 결국 1년의 1/3은 대학로에서 보내는 셈이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연기 근육을 연마할 수 있다. 다방면의 근육을 갖고 있는 게 배우로서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 관찰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통해 인간 이주승의 일상을 시청자들에게 공유하고 있다. 프로그램의 무지개 회원으로서 접점이 없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한다. 이 경험이 배우 이주승의 지평을 어떻게 넓히나.
= 배우로 살다보면 작품에 깊게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세상을 넓게 보아야 할 때가 있다. 내게 예능프로그램은 후자다. <나 혼자 산다>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고 다종의 경험을 하는 중이다. 연기를 하며 악플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예능프로그램에서 일상을 공개한 후 나에 대한 불호의 반응을 처음 접했다. 지금껏 없던 일이라 재밌다. 다양한 피드백을 수렴하며 배우로서 자세를 다잡게 된다. 사람들이 나의 어떤 모습을 좋아할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끝없이 자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