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커버] 수많은 도움으로 만든 낯선 사람, <대치동 스캔들> 안소희
2024-06-18
글 : 정재현
사진 : 최성열

2007년부터 2024년까지 배우 안소희의 궤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원더걸스로 데뷔해 단 한줄의 가사로 자신의 끼를 온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이재용, 김종관, 연상호, 윤가은 감독의 러브콜을 받으며 스크린이 미더워하는 배우로 안착했다. 최근 대학로 연극무대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탄탄대로와 우여곡절을 모두 통과한 30대 배우 안소희는 지금 <대치동 스캔들>의 주연배우로 관객을 만날 준비 중이다. 영화 속 안소희가 분한 윤임은 대치동 중학생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는 국어과 일타강사다. 그는 대학 시절 소설가를 꿈꿨지만 절친했던 학과 동기 기행(박상남)과 나은(조은유)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 꿈을 접고 고독한 학원강사로 살아간다.

윤임은 자신이 담당하는 학교의 국어과 교사가 된 기행과 10년 만에 재회해 두 차례 문제 유출 스캔들에 휘말리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제 앞길을 홀로 돌파하려는 영화 속 윤임과 달리, 안소희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도움’이었다. 안소희는 자신이 거쳐온 모든 길이 배우 안소희로 사는 데 큰 힘을 보탰다고 믿는다. 데뷔 17년차. 배우 안소희가 내놓은 <대치동 스캔들>은 수많은 도움의 총합으로 이룩해낸 유의미한 성적표다. 그 중심엔 오랜 시간 대중과 함께하며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안소희의 낯선 얼굴이 있다. 현재 안소희가 공연 중인 <클로저> 속 앨리스의 유명한 대사처럼,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든 스크린 속 안소희에게 “안녕, 낯선 사람?”이라며 인사를 건네고 싶어질 것이다. 지평을 넓히길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 안소희와 <씨네21>이 나눈 대화를 전한다.

- 윤임은 대치동 중학교 국어 내신 일타강사다. 이 설정으로 인해 직접 국어 과목을 강의하는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 강의 장면이 자주 나오진 않지만 배역의 디테일을 위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워낙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10대들처럼 청소년기에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실제 대치동에서 국어 강사로 일했던 감독님의 조언을 들었고 현재 영어 강사로 일하는 절친의 도움도 받았다. 친구가 근무하는 학원에 가서 강의실의 책걸상 배치, 교무실 풍경 등을 관찰했다. 친구를 앞에 두고 빈 강의실에서 강의 시연도 했다. 친구로부터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았는데, 강의실의 규모보단 학생들의 수업 당일 컨디션에 따라 강사의 에너지가 달라야 한다는 점이 주요했다.

- 동료 강사인 동화(배유람)가 치졸하게 공격해도 윤임은 동요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귀찮네요, 뭐 하러 억울해하기까지 해요”라는 대사도 심드렁하게 뱉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윤임이 왜 공격보다는 방어를 택하며 사는지 알 수 있다. 현재의 윤임에 이르기까지의 궤적을 상상해보았나.

= 극 중 윤임은 스스로를 ‘ENTP’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윤임이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는 전적에 비추어보면 윤임은 ‘F’(감정형)의 감성도 많은 친구였다고 본다. 그리고 윤임은 친구들을 사랑했던 아이다. 그러니 친구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유난히 크고 깊지 않았을까. 윤임이 대치동 일타강사가 됐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갑옷을 한번에 두르진 않았을 것이다. 강사 경력을 쌓으며 자신이 두른 갑옷을 켜켜이 두껍게 만들었겠지. 그런데 윤임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모두가 각자만의 갑옷을 장착하지 않나. 학원가에서 일한 경험은 없지만 나 역시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만든 갑옷이 있으니 말이다.

- 곁을 쉽게 내주지 않는 윤임이 달리 보이는 두 장면이 있다. 윤임은 혼자 사는 자취방에 귀가할 때마다 사람의 리액션이 그리운 사람처럼 늘 “다녀왔습니다”라는 안부 인사를 건넨다. 또 매 강의가 끝나면 아이들을 문 앞에서 배웅한다.

= 윤임은 정말 따뜻한 친구다. “유명해지고 싶어 대치동에 입성했다”고 하지만 윤임이 제자들을 대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다.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긴 해도 윤임의 대학 시절을 보면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보인다. 더군다나 20살 때부터 한집에서 계속 자취 생활을 했으니 당연히 외로웠을 것이다. 나도 혼자 살다 보니 가끔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을 들어설 때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 그래서 본가에 가면 내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인터폰에 떠도 굳이 “언니 나 왔어~”를 외치며 들어간다.

- 윤임이 집에서 캔맥주를 마실 때 자세가 무척 현실적이다. 의도한 디테일인가.

= 윤임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머리만 대충 집게 핀으로 틀어 올린 후 의자에 다리를 올리는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제안했다. 실제로 내가 집에서 그렇게 앉아 있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장해제 상태에서 일단 앉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후자다. (웃음) 식탁에서 밥을 먹거나 유튜브를 볼 때 다리를 의자에 올려 오금을 펴는 자세가 정말 편하다. 윤임도 하루 종일 아이들, 동료 강사들, 학부모들 사이에서 긴장하며 살 테니 일단은 쉬고 싶지 않을까.

- 윤임과 기행(박상남)은 두 차례 스캔들이 나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닮은 구석이 많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둘이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자세히 설명되진 않는데.

= 두 사람이 서로 닮아서 좋아하나 싶다가도 정말 상극인 커플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관계든 양면이 함께 존재한다. 대학생 윤임은 현재 시점에 비해 밝지만 그래도 사총사 중에선 제일 시니컬하다. 그렇다 보니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인 기행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나은(조은유)은 갈등이 생기면 바로 해결해야 하는 타입이라면 윤임과 기행은 갈등이 생기면 우선 회피하고서 분노를 삭일 시간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잘 맞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 김종관 감독의 단편 <하코다테에서 안녕> <메모리즈>와 중편 <달이 지는 밤>, 이재용 감독과 함께한 단편 <아노와 호이가>, 윤가은 감독이 배리어프리로 새로 연출한 고전 <수학여행>(1969)까지. 내레이션이 전부이거나 목소리부터 등장하는 작품에 다수 출연했다. 아무래도 가수 경력이 있다 보니 스스로의 목소리를 활용하는 방식에 관해 커리어 초창기부터 고민했을 것 같다.

= 연기를 시작한 이래 특히 목소리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선배들로부터 목소리의 중요성을 많이 들었던 터라 모든 고민과 신경이 목소리에 가 있기도 하다. 사실 평소에 말할 때는 힘주어 소리를 내기보다는 성대에 힘을 많이 뺀 채 발성한다. 이 점을 좋게 봐주시고 내 목소리에서 새로운 장점을 끌어내주는 감독님들을 만나 재밌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용기도 많이 얻었다.

- <달이 지는 밤>을 보면 인상적인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대사 없이 괴이한 안무를 추듯 몸을 사용해 장면 전체를 장악해야 했다.

= 춤추고 노래한 경험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매번 느낀다. 새로운 도전이 닥칠 때마다 걱정이 들고 겁도 나지만 어떤 경험이든 미래의 내게 좋은 자산이 된다는 진리를 알게 됐다. 그래서 도전이라고 할 법한 결정을 조금씩 내리며 힘을 얻는다. 지금 하고 있는 연극 <클로저>도 그렇다.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장고를 거듭하다 가수로 활동하던 당시 내가 무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결연한 목소리로) 나 정말,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다. 그 마음을 보존한 채 재밌게 연극무대에 오르고 있다.

- 초등학생 때 단편영화 <배음구조에 의한 공감각>을 찍은 경력이 있지만 실질적인 연기 데뷔작은 권칠인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의 고등학생 강애로 봐야 하지 않을까. 엄마 영미(이미숙)와 이모 아미(김민희)를 살뜰히 챙기고 그들의 감정 소모도 모두 받아주는 역할이었다. 와중에 스스로의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등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감사하고 재밌는 현장이었다. 강애를 연기했던 게 아주 오래전이라 모든 순간이 또렷이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여태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까닭은 원더걸스로 데뷔한 지 한달밖에 안된 신인 시절 오디션을 통해 합류한 영화기 때문이다. 가수 데뷔 전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다. JYP엔터테인먼트에 오디션을 볼 때도 연기를 했고, 연습생 시절에도 연기 레슨을 함께 받았다.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내가 맡은 배역이 어려운 역할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모든 순간이 마냥 재밌고 신기했으니까. <뜨거운 것이 좋아> 덕분에 연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민희 언니와 이미숙 선생님이 당시 나를 정말 많이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의 딸과 내가 동갑이라 현장에서 나는 선생님을 엄마라 부르고, 선생님은 나를 딸이라 불렀다. 제대로 준비된 연기자가 아니다 보니 모든 게 미흡했는데도 오히려 날것의 내 모습이 많이 담긴 작품이라, 그때의 얼굴을 남길 수 있는 작품이라 감사하다.

- 개인 유튜브 채널 <안소희>를 4년째 운영 중이다. 학교생활기록부를 열람하는 콘텐츠를 보니 몇몇 교사가 학생 안소희를 두고 ‘근면함을 요함’이라고 적어두었지만(웃음) 채널의 기획자로서 게스트가 출연할 경우 토크쇼의 호스트로서 누구보다 근면하게 일주일에 한편씩 영상을 업로드하며 채널을 꾸려가고 있다.

= 많이들 나를 집순이로 보는데 생각보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걸 즐긴다. 무엇보다 나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 촬영을 마친 후 차기작 들어가기 전까지 공백기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차에 유튜브 채널을 꾸려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채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끊임없이 일하고 싶은 욕구도 충족하지만,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걸 배우기 때문이다. 원더걸스 시절엔 팀의 막내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내가 선두에서 전체를 끌고 갈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배우가 되니 오롯이 내가 내 캐릭터를 주도하며 책임져야 하고, 연기의 노선을 잡기 위해 연출진과 직접 논의해야 하는 경우도 갈수록 늘어났다. 유튜브 또한 내가 나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웃음) 기획을 겸하며 스태프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많이 배운다. 연기 외적인 일에서 얻는 지혜가 삶에 많은 도움을 주니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