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메라>는 필름으로 촬영됐다. 영화용 디지털카메라는 최근 6K를 넘어서 12K의 사양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에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왜 필름으로 영화를 만든 것일까.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눈길을 끈 것은 영화 프레임의 테두리였다. 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영화 보기를 체험하게 된다. <키메라>는 프레임 테두리 위에 앉은 먼지의 움직임을 봐야 하는 영화다. 이 먼지는 필름 게이트에 앉은 먼지들의 그림자가 필름 위에 남긴 흔적들이다. 촬영 당시 그 공간과 시간 안에 있었던, 눈으로 보이는 가장 작은 존재의 흔적들이다.
영화의 프레임 테두리를 중점으로 보면 재미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카메라의 움직임, 배우들의 동선, 인물들의 배치, 컷과 컷 사이 간격, 몽타주의 방향성, 프레임 안 여백의 감흥, 주인공의 감정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는 사물들의 감정, 외화면의 이미지와 사운드, 디지털 상영에서 보편화된 블랙 마스킹 위의 이미지들까지 정말 많은 것이 새로이 보인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영화 속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감독의 생각이나 의도에서 멀어지고 감독의 이름도 영 기억나질 않는다. 당연히 고정된 의미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중심을 지워가며 화면의 테두리로 관람하는 영화 보기의 다른 방식은 영화의 더 다양한 의미를 만나게 한다.
<키메라>는 화면비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존재뿐 아니라 주인공의 꿈과 판타지까지 하나의 존재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 한 장면 안에서도 서로 다른 화면비를 사용한다. 필름에서 한 장면 안에 서로 다른 화면비를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귀찮고 번거롭고 고비용의 비효율적인 행위다. 필름 영화에서 화면비가 달라지려면 필름의 규격뿐 아니라 카메라도 달라져야 한다. 필름의 워크플로 공정은 일관적이지 않다. 화면비에 따라 매번 촬영 현장과 후반작업 공정까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필름 촬영본을 디지털로 스캔하면서 필름 게이트의 흔적까지 최종 상영본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대부분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들은 디지털화하면서 필름 입자의 질감은 살리지만, 필름 게이트의 흔적은 자르고 지워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필름 게이트의 테두리에 붙어 있는 먼지까지 그대로 다 기록해두려 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감하게 흘려보내는 쓸모없는 순간까지 기억하려는 것처럼. 영화 속 이탈리아 땅속에 묻혀 있는 유물처럼 언젠간 소중해질 지금의 순간들을 필름이라는 물리적 매체 위에 온전히 남겨두려고 한다. 세상에 드러난 존재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존재, 규정 가능하고 명확한 존재뿐만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에 선 존재들마저 다 담아내려는 듯하다.
화면비의 근원
화면비의 시작은 필름 카메라의 필름 게이트였다. 원래 화면비는 필름 위에서 이미지와 동시에 새겨지는 그림 액자 같은 틀이다. 실제 필름은 필름 위에 프레임 테두리가 없다. 우리가 보는 프레임이라는 틀은 필름 카메라 렌즈와 카메라 보디 사이의 네모난 필름 게이트라는 구멍에 의해 결정된다. 필름 게이트는 필름 사이즈와 관계를 맺는다. 8mm, 16mm, 35mm 같은 필름의 규격과 필름을 이동시키는 퍼포레이션의 위치와 필름의 폭에 따라 결정되며 게이트의 가로세로 비율도 다르다. 필름 게이트의 크기인 화면비는 필름의 물리적 크기와 면적에 따라서 달라졌다. 필름은 화면비를 촬영 단계 전에 결정해야 한다.
반면에 디지털은 화면비에 상관없이 카메라 센서 가득 이미지를 담아내고 후반작업에서 화면비를 결정한다. 즉 디지털에서 화면비의 변화를 주는 방법은 쉽지만, 필름의 화면비를 바꾸는 일은 까다롭다. 필름 카메라는 같은 규격의 필름에서도 필름 게이트에 따라 화면비가 달라지고 게이트를 바꾸려면 카메라의 물리적 구조를 변경해야 한다. 필름 위에 기록된 화면비는 절대 고정으로 후반작업에서 바꿀 수 없다. 그래서 필름 촬영은 디지털 촬영보다 화면비에 대한 고민을 더 신중하고 깊이 있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편의 필름 영화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화면비를 사용한다.
하지만 <키메라>는 규격이 다른 16mm와 35mm 필름으로 촬영하고 같은 규격 필름에서도 감도가 다른 필름을 사용한다. 다양한 필름 입자의 질감과 함께 1.33:1, 1.66:1, 1.85:1 등 다른 화면비로 영화를 구성한다. 주인공 아르투의 꿈이나 판타지 장면들은 1.33:1 화면비에 16mm 고감도 필름으로 촬영하여 가장 거친 질감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아르투의 현재 삶은 1.66:1 화면비에 16mm 중감도 필름을 사용한다. 1.33:1 화면비 장면보다는 부드러운 질감이지만 1.85:1 화면비보다는 거친 질감이다. 베니아미나와 관계된 현재의 공간들과 흔적들(그녀가 살았던 집과 그녀가 남긴 유품들),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을 발견하는 장면, 아르투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서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은 1.85:1 화면비에 35mm 필름으로 촬영해 다른 화면비보다 깨끗한 질감으로 표현했다. 과거와 현실과 현재, 아르투의 판타지와 꿈을 화면비와 질감의 차이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화면비와 질감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장면은 아르투가 그의 연인 베니아미나의 집을 찾아간 시퀀스다. 아르투의 설레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 카메라는 미세하게 핸드헬드로 흔들린다. 아르투가 그녀의 어머니인 플로라 부인의 방에 들어가는 순간 흔들리는 카메라가 멈추고 안정적인 카메라로 트래킹한다. 아르투가 집을 나와 플로라 부인을 만나는 이 장면까지는 1.66:1 화면비에 16mm 필름의 거친 질감이다. 이어지는 집 안 베니아미나의 사진 장면에서부터 화면비가 1.85:1로 변한다. 화면의 질감도 거친 질감에서 좀더 부드러운 35mm 필름의 질감으로 바뀐다. 화면비가 변하면서 필름 게이트의 프레임 테두리 모서리도 달라져 있다. 1.66:1 화면비는 프레임 테두리가 각진 모서리였는데, 1.85:1의 화면비로 바뀌면서 프레임 테두리도 둥글고 부드러운 모서리로 바뀌었다. 이 신 이후부터 베니아미나의 집은 깨끗한 질감의 35mm 필름 1.85:1 화면비로 보인다. 이후 성벽 아래 낡은 판잣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 아르투가 있고 1.33:1 화면비의 가장 거친 16mm 필름의 질감으로 꿈속 장면이 보인다. 꿈속에서 베니아미나가 땅속에 박힌 붉은 실을 잡아당긴다. 다음날 아침 현실로 돌아온 아르투의 모습은 다시 1.66:1 화면비의 16mm 필름 질감에서 보인다. 꿈 장면보다는 깨끗하지만 35mm 필름의 베니아미나 집보다는 거친 질감으로 표현된다.
지금까지는 과거와 현재, 판타지(꿈) 장면이 신별로 다른 질감과 화면비로 보였다. 그런데 한 시퀀스 안에 과거, 현재, 판타지가 함께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심지어 한신 안에서 액션과 리액션 컷이 서로 다른 화면비와 질감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목이 잘린 에트루리아의 유물 경매가 이뤄지는 배 안 장면이다. 기억되고 보존되어야 할 유물이 도굴돼 경매가 이뤄지는 실내 공간은 35mm 필름의 깨끗한 질감에 1.85:1 화면비로, 경매장 밖 선상 위에서 스파르타코를 기다리는 아르투와 도굴꾼들은 1.66:1 화면비의 16mm 필름으로, 중간 아르투의 판타지는 1.33:1 화면비의 고감도의 거친 질감의 16mm 필름으로 찍혔다.
아르투가 유물의 두상을 바다로 던지는 장면은 감독의 진심이 담긴 최고의 장면이다. 한신의 같은 인물을 서로 다른 화면비로 보여준다. 비닐에 싼 두상을 들고 나오는 아르투는 1.66:1의 16mm 필름으로 촬영하고, 아르투를 바라보는 도굴꾼과 경매상들도 같은 화면비와 필름으로 촬영한다. 액션 컷과 리액션 컷이 같은 화면비와 필름으로 보이고 다시 이어지는 아르투의 액션 컷에서 아르투는 유물의 비닐을 벗긴다. 유물을 맞이하는 카메라는 35mm 필름에 1.85:1 화면비로 바뀌어 있다. 한신에서 액션과 리액션, 이후의 액션을 서로 다른 카메라와 화면비로 촬영한 것이다. 실제 촬영장의 선상 위에는 16mm와 35mm 두대의 필름 카메라와 다른 규격의 필름이 있었을 것이다. 한 장면 안에서 이어지는 주인공의 동선을 서로 다른 카메라와 필름으로 따로 나누어 찍고 편집으로 이어서 보여준 방식이다.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이성적으로 말도 안되는 낭비적 촬영인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감독은 왜 이런 수고를 굳이 하는가. 모든 것은 쉽게 잊힌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애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장면은 아르투의 마음과 감정을 기록하고 애써서 보전하려는 정성과 진심이 만든 진정한 영화적 이미지다.
영화라는 유물, 혹은 예술 고대인들은 자신과 죽은 이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정성스레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들고 흙을 빚어 공예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리스 이전에 살던 영화 속 에트루리아 문명은 대문자로 기억되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 가려져 잊혔다. 영화의 시작은 예술이 아니었다. 삶의 기록과 기억으로 출발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삶을 기록하는 태도였다. 그래서 무엇으로 기록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가 모든 영화의 고민이기도 하다. 디지털로 쉽게 기록되고 삭제되는 시대에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고고학자가 유적지에서 부드러운 붓과 손으로 정성스레 유물을 발굴하는 일과 같다.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 함부로 훼손되지 않도록, 나의 손길에 의해 부서지거나 변형되지 않도록 흙 속에 파묻힌 작은 뼛조각도, 형체를 알 수 없는 유물의 작은 파편들도 고고학자는 편한 기계가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아주 조심스레 발굴한다. 감독은 유물을 발견하는 고고학자의 태도처럼 <키메라>를 만든 것이다.
필름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신중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35mm 필름 400ft 한롤로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4분 30초가량이다. 필름의 시작과 끝은 빛으로 노광되어 사용할 수 없기에 실제 촬영 가능 시간은 4분 정도뿐이다. 4분을 찍는 데 쓰는 비용은 네거티브필름, 현상, 디지털 스캔을 포함하면 100만 원을 훨씬 넘긴다. 필름 촬영은 비용뿐 아니라 한 번에 찍을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창작자가 안고 시작하는 일이다. 감독은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나 감정과 상황을 4분 남짓에 표현해야 하고, 필름 한롤을 다 쓰면 곧장 이어 찍을 수 없고, 다시 필름을 카메라에 장착할 때까지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다려야 한다.
영화 속 고대인들이 지하에 묻은 조각상과 유품들은 예술을 신격화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예술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남기는 행위를 한 것이다. 고대인들의 땅속 유물들은 지금처럼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고, 예술이 돈의 가치로 전환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삶에 대한 기록을 그들 주변에 가장 흔했던 돌과 흙으로 형상화했다. 어두운 땅속에서 그들의 삶은 온전히 그대로 기록되어 남아 있었다. 도굴꾼들에 의해 빛이 닿는 순간 고대인들의 남긴 삶은 예술로 분리되고, 예술은 돈의 가치로 변한다. 필름에 기록하는 것은 카메라 밖 존재들을 디지털 데이터가 아닌 물질 그대로 보존하려는 행위다. 필름은 디지털처럼 기록되는 이미지를 곧장 볼 수 없고, 기록되면 지울 수 없지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로 보존한다. 감독은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긴 유물처럼 필름 위 입자에, 필름만의 화면비와 질감을 활용해 우리의 현실을 물리적으로 기록해 놓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최근의 영화들은 그때 거기에 있던 존재들을 담아내지만, 그 흔적들을 디지털로 분해하고 흩트려 0과 1로만 기록한다. 그 기록된 존재 자체를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는 없다. 컴퓨터라는 도구가 있어야만 데이터가 돼 흩어진 기록을 모아 볼 수 있다. 하지만 필름은 게이트로 나눠 놓은 프레임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다. 필름은 게이트 안에 온전히 그때 거기에 있었던 모든 존재들의 흔적들을 물리적으로 기록하고 그대로 보존한다. 그러니 감독의 필름 작업은 대문자에 가려 드러나지 못하는 모든 소수성에 대한 기록이며 이것이 <키메라>를 필름으로 찍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키메라>의 의미는 우리 주변에 사라지는 존재들, 그래서 만지지도 볼 수도 없는 존재들을 물리적으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이다. ‘키메라’는 마치 주인공 아르투의 심정과 같이 먼저 떠나보낸 사랑하는 존재들을 여기 그대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필름으로 촬영하고 필름 게이트 먼지의 흔적까지 모두 물질로 담아내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스스로 ‘키메라’가 됐다. 과거와 현재, 이승과 저승, 현실과 판타지, 영화 밖과 영화 안의 경계에서 감독은 예술이라는 유물을 발굴하고 복구해내려는 작업을 했고 우리는 그것을 영화라고 부른다.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다양한 매체와 포맷이 범람하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이미지를 감각하고 있는가.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는 서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영화 속 물질들로 영화 읽기를 시도한다. 빛, 색, 질감, 렌즈 등 촬영 도구들로 영화를 감각하며, 이미지를 감각하기 위해선 응시와 관조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사와 담론을 벗어난 이미지들 사이에서 영화 속 무수한 물질들이 만들어가는 또 다른 의미들의 세계를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