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7월20일 세기의 아이콘 이소룡이 34살로 사망한다. 남긴 영화는 단 4편뿐이나 그의 공백이란 실로 거대했다. 다큐멘터리 <이소룡-들>은 그 빈자리를 메우려 한 역동적이고 기이한 움직임에 관한 영화다. 이소룡과 외양, 무술 스타일이 유사한 액션배우들이 홍콩영화계의 부름을 받아 수많은 아류작을 탄생시켰고 이는 선명한 하위 장르가 되었으며 나아가 1970년대 홍콩의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잊힌 스타에 관한 미국 다큐멘터리를 국내에 들여온 이는 뜻밖에도 ‘예능 대부’ 이경규다(그가 제작부문 대표로 있는 에이디지컴퍼니가 <이소룡-들>의 수입·배급을 맡았다.-편집자). 어릴 적 안에는 쌍절곤, 밖에는 ‘이자룡’이란 닉네임이 적힌 책가방을 들고 다녔고 청년 시절엔 이소룡의 영향을 받아 <복수혈전>(1992)이란 액션영화를 만들어 출연까지 한 그는 “여전히 이소룡은 나의 꿈”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복수혈전>을 보고 왔다. 연회장 테이블 위 음식 접시들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복수의 대상인 마태호(박동현)에게 걸어가던 태영(이경규)의 눈빛, 마태호와의 일대일 맞대결에서 보여준 태영의 돌려차기가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액션은 이소룡의 것이었나.
= 그걸 또 봤나? 허허, 참. 안 만들어야 했다. (웃음) 이소룡 액션을 흉내내고 싶지 않았고 그냥 건달의 액션을 했다. 연회장 신은 당시에 롯데호텔을 빌려서 찍었다. 그릇이 깨지면 안되니까 살살 치다가 어설퍼졌다. 그땐 쉬지 않고 찍는다고 한 장면을 이틀 동안 찍느라 나중엔 배우 입도 돌아가고 그랬다.
- 고향인 부산 근처에 극장이 많아 영화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그런데 왜 하필 액션영화에, 이소룡에 매혹됐나.
= DNA가 그쪽으로 타고난 것 같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된다. 높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면서 하루를 시작하던 소년이었다. 초등학생 땐 <외팔이> 시리즈 같은 무협영화를 보면서 종일 주인공을 따라 하다가 또 그런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1972, 73년쯤, 기억이 맞는다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이소룡 영화인 <정무문>을 보고 그에게 완전히 빠졌다. 그 뒤로는 <맹룡과강> <용쟁호투> 같은 이소룡 영화는 물론이고 이연걸이며 견자단이며 이소룡의 영향을 받은 배우들의 영화는 싹 다 봤다. 돈만 모이면 극장으로 달려가 보고 또 보고, 그땐 검표도 잘 안 하던 시절이었으니 주야장천 극장에 앉아 있었다. 이소룡이 되겠다고 아침저녁으로 몇 시간씩 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그땐 진짜 왜 그랬는지 몰라.
- 그랬으니 <이소룡-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다. 어떻게 처음 이 영화를 발견했나.
= 지금껏 나는 이소룡을 조명한 영화든, 브루스플로이테이션(Bruceploitation)이라고 불리는 이소룡을 따라 하는 사람들의 영화든 어디서 이소룡 영화가 나왔다 하면 찾아봤다. 한 20년간 소식이 없어 이젠 끊겼다 싶었는데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이소룡 영화를 튼다는 거다. 그래서 달려가서 봤고, 그게 <이소룡-들>이었다. 낯익은 ‘이소룡들’의 얼굴이 나오니까 반가우면서 나같이 이소룡을 좋아하는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 이소룡 발끝만 나와도 좋아한다. 그러니 별수 있나. 들여와야지.
- 영화를 보면 거룡, 여소룡 등 아류들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작품에 임한다. ‘이자룡’으로서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진심이었다고 보나.
= 처음에는 좋아하는 마음에 단순히 시작했더라도 하다 보면 이게 미치는 거다. 자기 이름 걸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이소룡화가 되고 평생을 바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거다. 그 시절 어느 누가 내게 이소룡 닮았다고 했다면 나도 그 길을 걸었을 거고. 그랬다면 <이소룡-들> 감독이 날 만나러 왔겠지.
- 지난해 연말 SBS 역사 토크쇼 <과몰입 인생사>에서 이소룡 스토링텔러로 활약했다. 정말 반짝이는 눈으로 진행하더라. 왜 아직도 이소룡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나.
= 어릴 때 먹은 음식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하지 않나. 중학생 때 이소룡을 보고 받은 충격이 오래가는 거다. 그의 근육, 발차기 실력, 분노를 녹여내 카타르시스를 안기던 액션 스타일까지 다 처음 본 것들이었고 뭘 모르는 눈으로 봐도 뛰어났다. 이소룡은 대단한 무술인이자 어릴 적부터 수십 작품에 출연하며 진정한 배우를 꿈꿨던 인물이다. 편견을 깨부순 1호 아시아 스타이자 사회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그건 그의 사후 50년 뒤에도 이런 다큐멘터리가 나온 걸로 증명된 셈이다.
- 추억 얘기를 실컷 했으니 현재로 돌아와보자. 2023년 7월, 개인 유튜브 채널 <르크크 이경규>에 첫 콘텐츠가 올라왔다. 콘텐츠 개수가 벌써 100개에 이르렀던데 유튜브 시작에 있어 부담은 없었나.
= 잘 모르는 세계니 뭐든 해보자는 심정으로 올렸다. 요즘은 매일 관둬야겠다, 그래도 해보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기존 방송이든 유튜브든 임하는 자세는 비슷한데 문제는 내가 너무 오래된 사람이라는 거다. 체력도 고갈되고 새로운 무언가를 내 안에서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 이 난관을 어떻게 지혜롭게 돌파해나갈지 답을 찾고 있다. 지금 채널에서 다큐멘터리 하나를 준비 중인데, 일단 이게 잘돼야 한다.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웃음)
- 채널 코너 중에 영화평론가 이경규가 되어 영화를 설명하는 ‘킬링무비’가 눈에 들어오더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가 리메이크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고 평한 게 인상적이었다.
= 아이디어가 참 좋은 영화다. 생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하라고 했을 때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는 극 중 상황이 지금 행복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아 감동이 컸다. 요즘 영화들도 챙겨 본다. <범죄도시4> <댓글부대> <시민덕희>, 다 극장 가서 봤다.
- 최근 한국 영화산업은 천만 영화가 잇따라 3편이나 나온 한편 독립영화계에선 1만명이 꿈의 숫자가 될 만큼 양극단으로 치달은 상태에 있다. 일찍이 “예능 다큐의 시대”가 올 거라고 예견한 콘텐츠 예언가로서 앞으로의 영화계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 프랜차이즈 시리즈처럼 어느 정도 성공이 담보된 작품이 아니고서야 힘들 거다. 집에 가면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우릴 기다리고 있고, 극장 가는 층이 사라져버렸으니까. 대중문화가 잘되려면 투자자들이 달려드는 젊은 스타들이 꾸준히 탄생해야 하는데 산업이 고령화되고 정체되면서 그조차도 어려워졌다. 이 문제는 한일 양국에서 공통으로 포착되는 현상이다.
- 그렇지만 영화인 이경규는 2026년 개봉을 목표로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고 들었다.
= 어찌됐든 나는 내 갈 길을 가련다! 휴먼드라마 시나리오를 한 4년째 고치고 있다. 벌써 15고다. 어서 영화 한다고 고사 좀 지내봤으면 좋겠다. 아니지, 그전에 <이소룡-들>이 잘돼야 한다. 옛 추억을 제대로 건드려준다는 칭찬도 받고, 많이들 봐서 이걸로 좀 벌면 그걸 종잣돈 삼아 다음 영화를….
이경규가 말하는 내 인생의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 젠 무술영화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영화인데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다. 연출이 좋고 이야기가 재밌고, 마지막 유리방에서의 결투 신은 진짜 끝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