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프리실라’, 우아한 고독과 고상한 허무, 소피아 코폴라의 초지일관 오트 쿠튀르
2024-06-19
글 : 정재현

1959년, 14살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케일리 스페이니)는 서독에 주둔한 공군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낯선 독일에서 생활 중이다. 어느 날 프리실라는 이웃의 호의로 서독에서 군 복무 중인 엘비스 프레슬리(제이컵 엘로디)의 파티에 방문한다. 엘비스는 처음 만난 프리실라에게 관심을 보이고 둘은 잦은 만남을 가지며 금세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프리실라는 학업을 다 마치지 않은 미성년자 학생이고 10살 연상의 엘비스는 이미 전세계를 들썩이는 슈퍼스타다. 프리실라는 미국으로 돌아간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며 엘비스의 음반과 잡지에 실린 스캔들 기사로 그를 추억할 뿐이다. 1962년, 프리실라는 가족의 동의를 얻어 엘비스가 사는 멤피스로 향한다. 프리실라는 재회의 환희 속에 독일 귀국을 거부하고, 엘비스와 동거하며 미국 가톨릭계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길 택한다. 프리실라는 급우들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비스 소유의 저택에 살며 학업과 연애를 병행한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프리실라와 엘비스는 연인이자 부부로 살며 서로를 진심으로 위한다. 하지만 프리실라는 엘비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염문설에 혼란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엘비스가 보이는 폭력성과 통제광의 면모는 프리실라에게 상처를 입힌다.

<프리실라>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회고록 <엘비스와 나>를 원작으로 하는 극영화다. 영화는 제목과 원작의 내용에 걸맞게 철저히 프리실라의 관점에서 프리실라의 이야기를 전한다. <프리실라>는 통상의 멜로영화라면 힘주어 연출했을 법한 사랑의 결정적인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그린다. 이를테면 두 연인이 처음 키스를 나누는 순간, 결혼식 당일, 프리실라의 이혼 통보 등이 그렇다. 당장의 큰 충격도 시간이 지나면 작은 일로 느껴지듯, 영화가 프리실라의 ‘회고’에 기초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납득 가능한 연출이다. 영화는 달콤한 로맨스를 최대한 소거한 대신 찰나만 머물고 항상 어디론가 사라지던 엘비스가 프리실라에게 남긴 파문과 여진으로 작품의 정념을 채운다. 영화의 시간축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디스코그래피가 아닌 두 캐릭터의 애정 전선 속 기념할 만한 몇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다. 프리실라는 “나는 욕구가 있고 욕망의 대상이 있는 여자야”라고 말하지만 영화는 그녀를 권리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으로 그리진 않는다. 프리실라는 남편의 폭압적 요구에 대부분 순응한다. 14년의 시간 흐름 속에도 딸 리사 출산 전까지 엘비스가 사랑했던 외양을 그대로 유지하는 프리실라의 일관된 스타일이 그 증거다. <프리실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남성 배우자 아래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고통받는 여성을 다시 그릴 때 취할 법한 재해석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카메라가 프리실라의 몸부림을 아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은 다양한 앵글숏을 통해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는 프리실라의 허무를 반복하여 쌓아 나간다. 일찍이 <처녀 자살 소동>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매혹당한 사람들> 등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탁월하게 묘사한 적 있는 소피아 코폴라의 장기가 십분 발휘되는 대목이다.

CLOSE-UP

<프리실라>엔 오프닝을 포함해 인상적인 몽타주 시퀀스가 등장한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의 슬롯머신과 마티니 샷으로, 한없이 제공되는 입주 가정부의 룸서비스 케이터링으로 시간의 흐름을 압축한 시퀀스는 탐미적이. 특히 영화 초반 1959년에서 1962년으로 도약하는 몽타주 시퀀스는 감독의 전작 <마리 앙투아네트> 속 신발 선택 시퀀스 못지않게 예쁜 것들로 꽉 차 있다. 촛대와 유리접시, 향수와 꽃, 압화 엽서와 오르골, 재봉틀과 크리스마스카드…. 소피아 코폴라식 페티시로 가득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주인공들의 방이다. 캐릭터가 침묵하는 순간에도 공간과 소품들이 대사 이상으로 정확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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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61

소피아 코폴라는 2022년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를 묻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에 10편의 영화를 적어냈다. 그중 <밤>도 있었다. <밤>과 <프리실라> 속 여성들은 관계 속에서 하나같이 공허와 소외를 느끼고, 이들이 느끼는 불만은 무심한 남편에게서 비롯한다. 소피아 코폴라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탄 당시 연단에 나서 “작품을 써내려갈 때 영감을 준 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며 수상 소감을 통해 자신의 영화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배 감독을 추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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