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인사이드 아웃2>는 전작만큼 끌리진 않았다. 성공한 작품의 속편이 다소 가혹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알기에 반대로 칭찬해줄 마음을 가득 품고 봤지만, 끝내 실패했다.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니 ‘불안이’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불안이는 전작의 슬픔이만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슬픔이와 비슷한 포지션임에도 어딘지 마음이 가질 않았다. 캐릭터의 외견부터 독선적인 행동까지 이유야 붙이기 나름이지만 제일 신경을 긁은 건 불안이가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힌 모양이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불안이 중심 감정이 되어버린 자의 가벼운 동족 혐오일지도.
‘불안이’는 불안의 ‘감정’에 집중한 캐릭터라기보다는 이후 이어질 행동의 결과물이다. 굳이 말하면 불안보다는 협소한 개념에서 ‘계획형 비관주의자’라는 명명이 더 어울릴 법하다. 기쁨, 슬픔, 분노 등 초기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집중하고 표현하는 반면 새롭게 등장한 감정들은 감정 다음에 이어질 행동의 의인화에 가깝다. 말하자면 기초 감정들은 오늘을 살고, 성숙함과 복잡함을 자처하는 새로운 감정들은 미래에 매달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여기에 없는 걸 걱정하는 게 어른의 조건인 걸까. 문득 오늘날 픽사의 발 빠른 변화와 불안이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 대중들이 보고 싶은 걸 먼저 계산하고 있는 픽사, 픽사의 애니메이터들은 여전히 자기 안의 기쁨이들을 자주 만나고 있을지 모르겠다.
불안이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애초에 현실의 변수를 모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할 때 새로운 번뇌와 고통이 싹을 틔울 뿐, 어차피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관객들은 개연성 없는 시나리오를 곧잘 비판하지만 실은 현실처럼 개연성이 희박한 서사도 드물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어느 날’과 ‘그냥’과 ‘문득’으로 채워져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불행과 비극이 당신의 방문을 두드릴 때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이유를 찾아 헤매는 순간 슬픔의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영화 <메기> 속 대사처럼) 구덩이에 빠졌을 땐 이유를 찾아 헤맬 게 아니라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일어난 일을 외면하지 않고 대면할 작은 각오와 다짐이다.
불안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현재를 빼앗겼지만 때론 정반대로, 부재하는 것이 오늘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번주 황망한 소식을 마주했다. <씨네21> 창간부터 사진기자로 일했고, <씨네21> 최초로 정년퇴임을 한 손홍주 사진기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황망한 이별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헤어진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개연성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일로 이어질 기억을 운반하는 일이다. 영화도, 글도, 기록하고 기억하는 매체다. 마침 우리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평생 한국영화의 순간을 기록해온 그의 궤적을 이제 우리가 찬찬히 되돌아보고 정리할 차례다. 영화로운 안녕을 고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