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자신의 전부를 잃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파산의 경험을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오만이 의심스럽긴 해도 나는 기꺼이 그 비극성의 속도에 관해 물어보고 싶다. 어림잡아 파멸의 사건이 한순간일 수 있다는 것쯤은 알겠다.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가 행성 충돌의 순간을 위한 영화가 아니듯이, 언제나 사건 이전과 이후가 과연 어떤 속도로 흘러갈 것인지가 문제다. <멜랑콜리아>의 진짜 고통은 자매가 서서히 미쳐버릴 수 있는 시간을 라스 폰 트리에가 너무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주었다는 점일 수 있다. 종말의 여파 속에서 시동을 건 조지 밀러 감독은 어떨까. 지금껏 <매드맥스> 시리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폭주하는 속도로 관통해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잃은 인류의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 중 하나가 광기와 분노일 것이라 예언해왔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의 프리퀄 격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에 이르면 서사의 지지대가 달라진다. 고통의 뿌리가 구체화되어, 고전 비극의 원형에 수렴하는 구조가 한층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낙원과의 이별. 어머니의 끔찍한 죽음. 남성으로 변장한 여성 전사가 겪는 생사의 위협. 그리고 마침내 작은 구원이 있으려는 찰나 연인마저 잃는 퓨리오사의 운명은 영웅이 겪는 필수불가결한 수난의 행로 위에 서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메모를 품고 다니는 70대의 노장 감독이 원하는 것은 “영화 밑바닥에 있는 불가해한 것들, 궁극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인류학적, 영적 경험을 관객이 갖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현대의 신화를 만드는 데 심취한 조지 밀러에게 ‘비극적인 것’의 요체는 그 거창함이 아니다. 그에게 원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관객이 스스로 알든 모르든 이미 머리 속에 박혀 있는 것을 (재)확인시키는 과정에 가깝다. 의사이자 영화감독, 그리고 점점 더 인류학자의 풍모를 풍기는 이 감독에게 좋은 이야기의 자질이란 생존 본능에 가닿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소멸과 상실의 필연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때로 불가역적인 손상의 서사를 통해 고통을 미리 경험하길 원한다. (물론 극복은 픽션의 주인공이 한다.) 액션만큼 이야기의 임무가 중요해진 이번 영화에서 그래서 속도의 조절은 더욱 중요해졌다. 치닫는 질주 이후 일순 잦아드는 리듬이 마련될 때에야 비로소 고통이 끊임없이 공회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위법적 관점에서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것은 서사의 음악성이다. 샬리즈 세런의 영화는 액션을 최대의 중심축으로 삼고 배경 스토리는 놀라울 정도로 간명하게 압축했다. 이때 감탄하게 되는 것은 어린 시절 납치됐다는 최소의 정보값만으로 구현된 감정의 풍부한 밀도일 것이다. 반면 애니아 테일러조이의 영화는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따르되 그 위에 액션 세트피스를 훌륭한 장식물로 얹는다. 실시간으로 달려나가는 전작은 3일 동안의 일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후자는 15년에 걸친 사가를 5개의 소제목이 달린 챕터로 나눈다. 2시간30분 안에 15년을 소화해야 하니- <3000년의 기다림> 이후 동화적 형식미에 골몰 중인 조지 밀러의 취향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챕터 구조는 퍽 합리적인 선택으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단순히 비교한대도 훨씬 경제적이어야 하는 쪽은 <퓨리오사>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감상대로 전작보다 더 느리고, 부분적으로 장황하며, 리듬의 휴지기를 더 많이 갖는 영화는 <퓨리오사>다.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장면 하나. <퓨리오사>의 중반부에는 기름, 콜라, 모유를 잔뜩 실은 장갑 트럭 워 리그에 탄 퓨리오사가 납치범들의 습격을 받는 하이라이트 신이 나온다. 197개의 컷, 78일의 촬영 기간으로 완성된 이 정신 나간 액션 시퀀스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놀랍게도 완벽한 적막이다. 총구의 연기와 북소리가 걷히고 괴물 숨소리 같은 차의 엔진음은 점차 멀어져간다. 도로 위에 남겨진 것은 단 한 사람, 퓨리오사뿐이다. 여기서 첨언하자면 조지 밀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말할 때 악의 세부를 설명하는 데 도통 관심이 없는 작자다. 구태여 프리퀄의 기회를 만들고서도 스카브로스 스크로투스, 릭투스 에렉투스, 식인종 등 다종다양하게 불쾌한 악당들을 세공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아포칼립스의 연원을 특정 악당에게서 찾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종말의 고통스러운 속성을 단독자의 숙명에서 찾는다. 갈망하던 시타델로부터의 탈출을 알리는 이 장면에서 갑자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해방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애니아 테일러조이는 조지 밀러가 경탄해 마지않는 서부극의 주인공들처럼 도로 위에 서서 캐릭터에 부과된 침묵보다 더 큰 세계의 적막을 감내한다. 바로 직전까지 열기를 뻗쳐댄 카 액션이 무색하게 찾아온 급격한 소강의 리듬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종말의 슬픔을 체감했다. 태양, 텅 빈 황무지의 지평선, 살아남은 퓨리오사. 그리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음….
조지 밀러는 “전작이 스타카토의 영화라면 <퓨리오사>는 아다지오(Adagio, 매우 느리게, 천천히)의 순간을 위해 마련된 영화”(<뉴요커>)임을 분명히 밝힌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연료로 삼는 <매드맥스> 시리즈의 세계관을 스스로 깨부수는 조용한 선언인 셈이다. 필살의 아다지오는 <퓨리오사>에서 관객이 가장 궁금해하는 잘린 팔의 행방을 보여줄 때에도 쓰인다. 인물이 자동차 운전석에서 내려오는 순간 숏을 쪼개는 데 급격히 인색해지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비극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만한 사건의 긴박한 묘사는 통째로 생략됐다. 우리는 연인 잭이 죽어갈 때 수갑에 묶인 자기 팔을 잘라내는 퓨리오사의 고통스러운 몸짓이나 피를 뚝뚝 흘리며 나아가는 비장한 걸음을 보지 못한다. 다만 쓰임이 다하면 가차 없이 대체되는 사물들과 다를 바 없이 남겨진 한 덩이 몸의 일부를 본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자의 고통은 물리적 실체가 되어 회화적 프레이밍 속에 박제되어 있다. 다시 한번 아다지오! 멈춘 숏의 지속 시간은 비록 짧으나, 비극의 속도를 조절하는 지휘자의 존재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쉴 새 없이 원형으로 휘도는 디멘투스 일당의 야만적인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 줄인 자리에 천천히 흐르는 것은 연대기상 머지않아 샬리즈 세런의 그것으로도 승화될 육중한 슬픔과 집념이다. 비극의 아다지오는 고통만큼 아름다움도 배가시켜서, 나는 일그러진 손아귀의 정물화가 내뿜는 데카당스한 마력에 줄곧 사로잡혀 있었다. 이후 카메라가 시타델의 구더기 소굴로 들어간 이후에도 한참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