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를 어떤 계보나 맥락에 놓고 봐야 할까. 이런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영화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본 듯한 이미지가 넘실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거의 영화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좀 심하게 들린다면 적어도 한국영화처럼 보이지 않았다. 배우 탕웨이의 에피소드에서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가 뒤섞이는 상황이나 영화의 배경이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영향도 물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영화가 주는 이질감은 무엇일까.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김태용 감독의 전작 <만추>(2010)를 떠올려보자. <만추>의 배경인 시애틀은 안개의 모티프를 생성하기 위해 소환된 장소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안개처럼, 이 장소 속 두 주인공 역시 그렇다. 안개는 제삼의 캐릭터이자 감정을 고취하는 적절한 조정자였다. <원더랜드>에 이르러 영화의 장소는 그보다 추상적으로 인식된다. 김태용 감독은 전작의 일시적 장소이자 플랫폼으로서의 영화적 시공간을 밀어붙여 가상의 플랫폼 ‘원더랜드’를 만든 것 같다. 전작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여러 형태의 관계들로 파생된다. 캐릭터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모인 다양한 세대를 조명한 <가족의 탄생>(2006)이 연상된다. 다만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공감을 일으킬 수 있었던 관계망에서 ‘원더랜드’라는 가상 플랫폼으로 옮겨가면서 공감과 조망의 균형이 깨진 모양새다.
영화의 장소는 어디인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가 죽거나 죽음에 가까운 이들에게 제공한 가장 두드러진 장소는 사막과 우주다. 사막과 우주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을 상상하는 매개다. 한편 사막과 우주는 종종 ‘영화적’이라는 수식어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스펙터클의 장소다. 사막은 고고학적 우주이고, 우주는 미래형 사막이다. <스타워즈> 시리즈가 사막화된 우주를 통해 잃어버린 풍경을 되찾고자 한 이래로 재현의 맥락에서 사막과 우주는 맞물려왔다. 상상의 장소로서 주목받던 우주개발 열풍이 한풀 꺾인 사이, 사막은 영화의 회고적 경향 속에 최근까지도 발굴되는 중이다. 사막을 계승한 <듄> 시리즈, 사막이 우주를 초월하는 속에서 새롭게 재생한 <매드맥스> 시리즈 등이 그 사례다.
반면 <원더랜드>의 우주와 사막은 두 공간이 재현되어온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다. 우주도, 사막도 정밀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각각이 주는 표면적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불러오는 쪽이다. 이것은 영화의 설정에서 파생된 당연한 흠결처럼 보인다. 두 장소는 서비스 이용자들이 죽은 사람이 갈 만한 장소로 즉각적으로 떠올린, 단순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공간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바이리(탕웨이)의 사막과 태주(박보검)의 우주가 영상통화의 배경 이미지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관객에게 그들이 살아 있음을 설득해야 하는 장소라는 뜻도 된다. 영상통화가 끝난 뒤에도 남은 존재를 오롯이 마주하는 건 바로 관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배경 장소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묘사할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파생된 이미지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말’이다. 바이리의 세계 속에 출몰하는 원더랜드 소속 AI 직원 성준(공유)은 혼란에 빠진 바이리에게 ‘당신이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가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당연하게도 그 메시지는 영화를 보는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 메시지는 적절한 시간대에 효과적으로 송출된 것 같지는 않다.
간략한 장소 재현과 함께 느슨하게 남겨진 지점은 개별자들의 사연이다. 세상을 떠난 가족과 AI 기술을 통해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 MBC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만 떠올려봐도, 보편성 안에서 특수한 사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은 수많은 신청자 중 선택된 가족이며, 이들의 사연이 안타까울수록 만남에의 공감도 커진다. 반면 <원더랜드>가 그리는 세계는 서비스가 상용화된 이후로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다. 영화가 선택한 이들의 사연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져보면 사연이 제대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어린 딸을 노모에게 맡겨둔 채 떠나야 하는 엄마, 코마 상태에 빠진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는 여자의 사연은 비슷한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그 자체로 몰입을 끌어내기 충분한 설정은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사연을 구축해 관객의 몰입을 끌어낼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 선택은 실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야기는 때론 관객의 눈을 가리는 상투적인 전략에 불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영화가 취한 반대의 전략이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원더랜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로 작동하는 극영화다. 영화의 전략을 뒷받침하기에는 배우의 캐스팅은 화려하고, 이런 불균형으로 인해 캐릭터로 인식하기 전에 배우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마주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배우의 연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관객이 배우를 인식하는 상태는 감독과 제작자의 의도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일 수 있다. 고객이 진짜처럼 믿게 만들어야 하는 원더랜드의 존재 목적은 그대로 극영화의 존재 목적과 일치한다. 주연배우 정유미와 최우식에게 원더랜드 운영자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각자의 서사를 주면서 영화는 개별자들의 사연만이 아니라, 플랫폼으로서의 시스템 자체에 시선을 주도록 유도한다. ‘공항’이 주된 장소 중 하나로 등장하는 이유도 ‘세상을 떠난다’는 표현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죽음과 여행을 유비시켜온 관습 때문만은 아니다. 원더랜드 속 세상과 투명 스크린으로 분리된 운영자들의 공간은 배우와 연출자,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계자들은 서비스를 신청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짜’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감독과 유사하다. 영화는 이를 드러내듯,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연극 연습을 한다든지, 배우의 연기에 도움을 주는 보조 출연자를 심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반영성과 작위성은 다른 문제다. 영화제작을 연상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 없는 서사
구구절절한 사연을 건너뛰면서, <원더랜드>는 서사 없는 영화를 상상하게 한다. 영화에는 4명의 중심인물과 주변 인물이 등장하여 다양한 관계 속에 이입의 폭을 넓힐 것으로 기대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듯 보인다. 그 원인을 옴니버스 장르가 지닌 태생적 문제와 연관지을 수 있다. <원더랜드>는 상상에 기반을 둔 SF와 보편성을 요구하는 옴니버스를 접목했으나, SF의 혁신과 옴니버스의 보편이 상생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멈춘 모양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옴니버스라는 오래된 형식이 영상 소비와 제작의 대중화 맥락에서 새롭게 보이는 지점이다.
한국에서 옴니버스영화 제작이 대중적으로 활발해진 시기는 대략 2000년대 초반이다. 이전에는 영화제 특별 기획 프로그램의 하나로 유명 감독들이 협업하는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면, 2000년대 이후 단독 연출 형태의 대중영화가 두드러졌다. 여기에는 리처드 커티스의 로맨틱코미디 <러브 액츄얼리>(2003)의 성공을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다양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연결한 영화 방식은 한국으로 이식되어 특정 상황에 놓인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지금 여기의 몽타주로 이어졌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새드무비>(2005) 등 관계를 강조한 기획은 <결혼전야>(2013), <새해전야>(2020), <더 테이블>(2016) 등 보편의 힘을 믿으며 활발하진 않아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옴니버스 작품은 가족이라는 맥락에서 옴니버스를 시도한 김태용의 전작 <가족의 탄생>과 정윤철의 <좋지 아니한가>(2007)이다. 이 영화들은 2000년대 이후 가족을 비롯한 사적관계를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와 연결할 때 주목할 지점이 도출된다. ‘사적 다큐멘터리’로 명명되는 작품들은 오늘날 범람하는 개인 제작 영상에 앞선 초기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일상의 조각 그 자체보다는 이를 통해 의미를 도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으나, 오늘날 개인의 영상 제작과 공유가 숨쉬기만큼 일상적인 것이 되면서 의미화의 강박에서 어느 정도 놓여난 듯 보인다. 기존의 주류 콘텐츠 역시 이같은 영상문화 흐름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오늘날 역전된 흐름은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원더랜드>는 영상문화의 변화와 옴니버스영화의 관계를 상상할 계기를 마련한다. 앞서 언급한 ‘서사 없는 영화’라는 예측은 옴니버스영화의 맥락에서 <원더랜드>를 살필 때 두드러진 지점이다. 옴니버스영화가 평범한 인간 서사의 가치를 발견해왔다면 <원더랜드>는 새로운 옴니버스에 인간 중심성이 사라질 것임을 예견한다. 둘 혹은 셋 정도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던 전통적 방식의 서사에서 다중 주인공으로 분산되는 경향을 지나 이제는 거의 인간 없는 영화를 꿈꾸게 된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국내 개봉한 해외영화를 보면서도 이같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와 <프렌치 수프>(2023)는 물론 소재의 특성도 있으나 서사가 기존 방식으로는 작동할 수 없음을 예감케 하는 결과물이다.
<원더랜드>를 보면서 세상에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질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아니다. 원더랜드 서비스가 탄생시킨 인간은 어디까지나 프로그램을 통해 작동하는 인간이고, 영화가 초점을 두고 묘사하는 죽음 역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데이터의 죽음이다. 다양한 사연 중에서도 핵심은 바이리의 이야기다. 바이리는 짧은 인트로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데이터 기억체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어떤 형태든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머니 화란(니나 파우)의 서비스 종료 신청으로 인해 데이터 속 바이리가 통째로 사라질 위험에 처한 상황은 영화 속 가장 큰 위기로 그려진다. 데이터 삭제는 바이리의 육체적 죽음보다 더 큰 죽음일 수 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과연 데이터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에 있다. 정도는 다르지만, 다른 이들의 사연 속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발견된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연인 태주가 깨어나면서 정인(수지)은 우주에서 영상통화를 나누던 다른 태주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지만 이미 일상이 된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한다. 정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 AI를 비교선상에 두고 저울질하게 된다. 잔인하게도 우주의 태주는 뇌 손상을 입어 전과 같지 않은 태주보다 정인에게 더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물론 재생된 AI가 기존 인간이 지닌 저열한 본성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도 있다. 원더랜드에서 유학생이 된 진구(탕준상)는 자신에게 쩔쩔매는 할머니에게 짜증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며, 멋진 아이템을 갈취하는 데만 골몰한다. 그렇다고 해도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마치 단죄하듯 그의 유일한 생존 창구가 미련 없이 꺼질 때, 거기에서 일말의 잔인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AI가 인간임을 학습해온 참이기 때문이다.
AI가 제작한 영화가 만들어질까
<원더랜드>는 미완의 상태로 폴더 속에 방치했던 습작을 다시 열어보게 했다. 나는 매체가 변함에 따라 그 모든 목소리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낡아서 쓰지 않는 휴대전화 속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들은 꺼진 채 방치된 전화기가 다시 울리기를 기다리는 도청자이자, 전화가 끊긴 뒤에도 공간에 남았던 자들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목소리 데이터가 이따금 재생되는 암흑 속에서 대화하는 목소리다. 영상통화를 기반으로 한 <원더랜드>의 세계에서 시각화는 기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할 때 그 이미지는 어느 정도 뻔해진다. 영화 초반 형형색색의 데이터 물결은 마치 스마트폰 광고나 컴퓨터 화면 보호기의 현란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물론 데이터의 물결은 인간의 형상이 되었다 다시 흩어지며 그 안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원더랜드>가 주는 어색함은 감독이나 제작자의 역량 혹은 비역량을 드러낸다기보다는 만약 AI에 영화의 기획, 연출, 제작을 맡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해보게 한다. 이러한 상상은 영화 안팎에서 충분히 언급되지 않은 문제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원더랜드에 의한 데이터 관리의 맹점은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열람하거나 활용한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할 수 있다면 죽기 전에 대상자의 동의를 받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많은 경우에 남은 사람에게 동의를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죽음과 함께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사라지는가. 또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세계에 관한 저작권은 과연 데이터 제공자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를 바탕으로 존재와 삶을 구현한 최종 제작자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지분을 요청하게 될 것인가. 그런 세계에서 죽음 이후가 있다는 것은 과연 희망일까, 절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