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2>는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편의 맥을 잇는 준수한 여운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나도 이 평가에 동의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아쉬움을 상쇄했다고 거론되는 종막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을 계획이다. 여기서는 속편의 상상력이 전편보다 부족하게 느껴진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그 아쉬움은 제작진의 역량 부족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이 연작이 근간을 두는 원칙의 한계 자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1편과 2편의 차이에 주목하며 그 한계를 둘러싼 논점을 숙고해보도록 하자.
<인사이드 아웃2>는 전편에서 라일리의 성격 섬 중 가장 큰 크기를 차지했던 가족 섬이 가장 왜소해진 정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속편이 전편과 달리 안정적인 가족 공동체 바깥을 다룰 것임을 암시하는 이 변화는 주제의식의 측면을 넘어 미장센의 전반적 변화와 직결된다. 1편은 식탁과 같은 전통적 가족의 공간에 주목했으며, 주로 화면 중앙에 놓인 라일리를 양쪽의 부모가 둘러싸는 구심적 미장센이 작동하곤 했다. 현실뿐 아니라 내면세계에서도 라일리의 콘솔이 화면 정면을 향하는 것과 달리 부모의 콘솔은 측면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중심부의 라일리를 감싸는 배치를 구조화한다. 가족과 작별한 라일리가 여러 친구 집단 중 한쪽을 선택하는 2편에서는 이 구심력이 시종 붕괴된다. 라일리는 연습 시합에서 경기장 양쪽으로 갈라진 중학교 친구들과 ‘밸’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며, 수많은 군상이 모인 로커 룸의 원심적 구도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난다. 일견 선택과 책임이 중시되는 성인의 우주로의 이행을 반영하며 세계관 다변화를 모색할 바람직한 계기로 보인다. 하지만 가상 세계를 건축한다는 애니메이션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변화다.
부연을 위해 잠시 우회해 픽사 애니메이션이 현실과 환상을 매개하는 전략의 몇 가지 유형을 세분화해보자. 첫 번째 유형은 현실과 환상이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합돼 공상적 디제시스를 빚는 경우다(<월·Ⓔ>와 <업>). 두 번째 유형은 현실과 환상이 시공간적 차원을 공유하되, 양자 사이에 은밀한 분리의 원칙이 작동하는 경우다(<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에서 장난감과 물고기는 인간과 같은 차원에 속하지만 인간의 시선 앞에서 종종 말과 행동을 결빙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현실과 환상이 물리적으로 격리된 채 관념적 연결고리만 공유하는 경우다.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현실이 분리된 채 간접적으로만 연결되는 <코코>, 여러 감정과 라일리가 분리된 공간을 점유하는 <인사이드 아웃>이 이 유형이다. 감정들은 본부에서 콘솔을 조작할 뿐 <토이 스토리4>의 우디가 보니의 유치원에 잠입했던 것 같은 직접적 행동을 취할 순 없다. 1편에서는 이런 분리의 원칙 덕분에 가상 세계를 구현하는 애니메이션의 역량이 현실과 분리된 내면에 오롯이 집중될 수 있었다. ‘추상적 사고’ 구역에서 기쁨이 일행이 1차원으로 이동하는 장면, 빙봉이 사탕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현실의 제약을 벗은 상상력이 무엇보다 찬란한 마술성을 개화했던 사례다.
속편에서 새로 등장한 ‘불안이’는 감정의 근거를 자아에서 현실 속 타자의 방향으로 변경하며 이 원칙을 교란한다. 불안이가 다른 성격과 구별되는 점은 부산스러운 언행보다는 그가 상상이라는 매개를 건너뛴 채 외부 현실과 지나치게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데 있다. 그는 라일리의 주변인에 즉각 반응하고 행동하며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 게다가 기쁨이가 뮤지컬적 안무를 추고, 버럭이가 불을 뿜으며 고유한 애니메이션적 개성을 내보일 때, 불안이는 스크린을 통해 현실에서 일어날 일을 시뮬레이션적으로 구현하며 현실에 지표적인 이미지를 출력한다. 이런 식으로 현실과 타인이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면 분리의 원칙에 따른 내면세계의 상상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근본적으로 상상의 차원에 속하는 것과 달리 타인이란 근본적으로 현실의 차원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1편에서는 이 점과 관련해 대조해봄 직한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기쁨이 일행은 내면세계의 기계에서 출력되는 라일리의 상상 남자 친구를 발견하고 묻는다. “너 같은 애는 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상상 남자 친구가 답한다. “난 캐나다에 살거든.” 사소한 유머지만 내면세계의 애니메이션 조형이 현실의 지리학적 사실성과 무관하며, 오히려 그렇기에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음을 암시하는 근사한 메타적 진술이다. 이와 달리 <인사이드 아웃2>는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상상의 준거점은 내면이 아니라 현실에 둔다는 근본적 딜레마를 끌어안는다. 그 딜레마가 단적으로 부각되는 장면은 라일리가 코치의 사무실에 침투해 노트에 적힌 선수 평가를 보는 장면이다. 검은 글씨로 적힌 단어 몇자일 뿐이지만 어떤 애니메이션 기교와 은유적 상상도 불허하는 타인의 구체적 흔적이다. 불안이는 기존의 감정들에게 라일리에게는 더 섬세한 감정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 장면은 그 말을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관계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심화해 불안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아무리 섬세하다고 해봤자, 어차피 너도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실제 타인의 반응보다 얼마나 더 구체적일 수 있는데?”
그런 이유에서일까. <인사이드 아웃2>가 새롭게 선보인 요소는 시종 자율적 상상과 지표적 현실 중 어디에 근거를 둘지 몰라 허둥댄다는 인상을 준다. 가령 1편처럼 3D가 아닌 질감을 수록해야 한다는 강박이 빚어낸 블루피와 랜스는 라일리의 고유한 상상에서 비롯된 빙봉과 달리 외부의 매체에서 외주화된 형상이다. 그들의 몸짓도 지극히 평면적인 설정에 종속된다. 그런가 하면 무전기, 보안 금고, 다이너마이트 등 현실적인 사물이 정말 그 현실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상상력의 자리를 편의적으로 대체하곤 한다. 후반부에서 기쁨이 일행은 산더미 같은 구슬 위에 놓인 신념 조각을 보고 외친다. “어떻게 저기로 올라가지?” 나는 생각한다. ‘오, 1편에서는 빙봉의 로켓을 타고 절벽을 올랐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저 산을 오를까?’ 다음 장면을 보면 그들은 그냥 손으로 등반해 정상에 도착한다. (…?)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단숨에 본부로 복귀한다. (…??)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개그 신에 활용되는 캐릭터간 궁합이다. 1편에서 듀오를 이룬 기쁨이와 슬픔이의 만담이 탄력적이었던 이유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들의 성격이 리드미컬한 대화의 굴곡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가령 기쁨이가 슬픔이에게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라고 하면 슬픔이는 “오, 너 예전에 개가 죽었던 영화 기억나?”라고 한다. 기쁨이는 방방 뛰며 다시 발랄한 기억을 연상한다. 그들의 만담은 급격한 감정의 낙차를 에너지로 삼는 동력 발전 시스템이다. 속편에서 콘솔을 만지는 불안이와 부럽이에게는 이런 리드미컬한 합이 없다. 애초에 안이 아니라 밖에 존재론적 근거를 두는 그들은 고유한 내면적 개성이 추상화돼 있으며, 시종 밖을 관찰하느라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당황이와 따분이는 참여도가 저조한 예능프로그램 MC처럼 구석에 박혀 있다). 은유의 지평을 축소하는 어른의 세계에 던져진 라일리의 상상은 이제 알록달록한 색채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이 점이야말로 시리즈의 존립 근거와 연관된 <인사이드 아웃2>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