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더 에이트 쇼>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각 시대에는 나름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있다. 우리의 인식이나 생각이 만들어지는 틀로서의 패러다임 말이다. 우리는 그 틀 덕분에 특정한 생각이나 개념을, 심지어는 ‘나’라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지만, 또한 바로 그 틀 때문에 그 외부를 향하는 사유가 가로막히곤 한다. 가능성이자 한계로서의 패러다임. <더 에이트 쇼>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에 포섭되어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해진 지금의 상황을 두고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고 칭한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여기서 ‘리얼리즘’은 우리에게 익숙한 미학적 용어로서의 함의를 가지면서도, 더 넓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려는 ‘현실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감각에 장악된 우리는 내일은 좀더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아적 희망마저 잃었다.
책임은 당신의 몫
<더 에이트 쇼>는 원작(<머니게임> <파이게임>)에서 ‘게임’이라 명명한 것을 ‘쇼’라고 바꿔 부른다. 나름의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게임과 달리 쇼는 얼마나 쾌락(‘즐겨라!’라는 정언명령)에 충실한가,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규칙의 세계에서 쾌락의 세계로의 전환은 포디즘적 경제체제에서 포스트포디즘의 경제체제로 이행한 사회의 변화와 상응한다. <더 에이트 쇼>의 인물들은 각종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의 모습을 상기시키는데, 이들이 마주친 첫 질문은 CCTV와 객석의 빈 의자로 표현된 ‘본다고 가정된 주체’의 욕망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거대 세트장에 모인 8인이 시간(또는 자본)을 늘리는 방법으로 오인했던 것이 바로 포디즘적 노동이었다. 계단 오르내리기. 포디즘적 세계에서 노동자는 견고하게 분업화된 체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 하지만 <더 에이트 쇼>에서 본다고 가정된 주체의 욕망은 미지의 영역에 있다. 형식적인 룰북은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비워져 있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서 답을 찾아야 한다. 마치 변덕스러운 세계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헤매야 하는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노동자처럼. <더 에이트 쇼>의 거대한 세트장은 포스트포디즘적 ‘체험, 삶의 현장’인 셈이다. 포스트포디즘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무한히 개발해야 하고, 그들의 알 수 없는 요구에 맞춰 자신이 얼마나 변화무쌍한 인물인지, 자신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 자신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다고 가정된 주체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것이 ‘즐겨라’, 라는 초자아의 정언명령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7층(박정민)의 말처럼 그들은 “참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참 무서운 체제다.
세트장에 모인 8인이 처음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일반적으로 국가기관의 의무, 또는 공공서비스로 이뤄지는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것이다(예를 들면 오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논쟁). 주디스 버틀러는 <전쟁의 프레임들>에서 ‘책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신자유주의적 변화의 일환으로 이전에는 국가기관이 맡았던 의무나 일을 개인이나 지역 공동체가 능동적으로 알아서 해결하도록 만드는 ‘책임의 개인화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임을 개인들의 문제로 전가했을 때,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구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슬쩍 물러나면서 책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점이다. <더 에이트 쇼>에 참가한 이상,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본다고 가정된 주체는 자신의 의무(시간에 따른 돈의 지급)를 충실히 수행하기만 하면 될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참가자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책임의 전가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포스트포디즘(또는 신자유주의)에서 개인(또는 노동자)이 자본주의 체제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공모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성취에 대한 개인의 열망과 기대 속에서 유지되기 마련이다. 포디즘적 세계는 억압과 피억압의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했고, 그렇기에 적은 노동자 외부에 있었다. 하지만 포스트포디즘의 세계에서 (욕망의 층위에서 보자면) 자본과 주체의 욕망은 분리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더 에이트 쇼>의 세트장은 미셸 푸코가 언급했던 파놉티콘의 구현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트장 곳곳에 설치된 CCTV가 지향하는 것은 파놉티콘식의 감시와 통제가 아니다. 8인은 CCTV 앞에서 온몸을 바쳐 자신의 상품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그렇게 그들은 본다고 가정된 주체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럼으로써 자본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욕망의 층위에서 본다면, <더 에이트 쇼>의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모 관계다. 포스트포디즘 사회에서 노동자의 적은 그들 외부에 있지 않다. 적은 이미 그들(의 욕망) 안에 똬리를 튼 지 오래다.
넓고도 깊은 자본주의의 아량
<더 에이트 쇼>에서 계급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적 파국은 가장 돈(또는 시간)이 되는 쇼로 간주된다. 그때 자본주의 체제는 그 냉혹한 구조로 인해 파생된 누군가의 비극도 자본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더 에이트 쇼>처럼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반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 제작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태도마저도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마저 기꺼이 포용할 아량이 있다. 자본 증식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직 이 사회가 건전하다는 환상, 아직 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 그러니 우리 사회는 더 발전하고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 환상 속에서 자본주의는 번식했고, 그 영역을 넓혔고, 지금은 우리의 감각까지도 장악하다 못해 그 외부(대안)를 상상할 힘까지 앗아갔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더 에이트 쇼>에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 중 하나가 ‘공평’이다. 인물들은 자신의 층수가 우연의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는 점에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불공평이 우연에 의한 결과라는 점이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자본주의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면 어쩌겠는가? 슬라보예 지젝은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가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 이유가 자신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 믿음으로써 실패를 견딜 만한 것으로 변형한다. 비인격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자신이 실패했다고 믿는 편이 훨씬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실패 중 많은 것들이 자본이 구축한 체계의 필연적 효과다. <더 에이트 쇼>에서 그 사실이 폭로되는 순간은 ‘방 바꾸기’가 형식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날 때이다. 인물들은 마치 자신이 속한 사회가 그런 줄 몰랐다는 것처럼 좌절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계급의 폐쇄성이 드러나는 그 순간, 인물들이 겪는 불공평이 그들 외부에서 비롯된 구조적 힘에 의해 부과된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자본주의 체제와 공모한 결과라는 것, 달리 말해 그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몇몇 권력자가 아니라 개인이 그 체제와 공모한 결과라는 사실이 감춰진다. 자본과 공모 관계에 있는 한, 그 책임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욕망의 층위에서 보자면) 자본주의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불공정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불공평함이 만들어낸 ‘특권의 위치’에 올라서길 바란다. 층수에 따른 불공평한 분배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채 방 바꾸기에만 매달리는 인물들처럼 말이다. 실제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곧잘 제기되는 공정성에 대한 주장은 불공평을 야기하는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높은 층에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 또는 자신이 향유하는 높은 층을 다수가 공유하지 않도록(달리 말해, 특권이 보편화되지 않도록) 그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함부로 놓지 말라는 것에 가깝다. 몇년 전 한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려 하자 불공정성을 들고 일어섰던 취준생들의 주장이 그 단적인 사례다. 지금의 의사파업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불공평을 야기했다면, 그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욕망이다.
냉소주의적 주체의 자기변명
<더 에이트 쇼>가 이야기하는 혁명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혁명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혁명과 해방에 대해 떠들면서도 혁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에이트 쇼>는 자본주의 체제는 그대로 인정한 채, 높은 층과 낮은 층의 사람들간의 자리바꿈을 혁명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3층(류준열)과 몇몇 참가자들은 CCTV를 박살내며 쇼를 종결시킨다. 그들의 이러한 저항에는 어떤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그들의 저항은 반복되는 물리적 폭력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서이지 불공평함을 야기하는 체제를 끝장내는 것과 무관하다. 그들은 그 불공평한 체제 자체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혁명은 자본주의라는 체제 외부에 대한 상상력이 필수적이지만, <더 에이트 쇼>는 자본주의 외부를 향해서는 단 한 발짝도 내디디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 세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로 사고한다. 결국 <더 에이트 쇼>는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지평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외부를 향한 상상력은 이미 고갈되어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상상력의 토대로서의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 시대의 패러다임.
3층은 1층(배성우)의 장례식을 치른다. 7층은 죽은 1층 가족에게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큰돈을 안겨주었다. 원작에 없는 설정을 덧붙인 이 장면을 통해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체제에 남아 있는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이러한 온정주의를 부각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공고히 하는 일이다. 마크 피셔의 지적처럼,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극복할 수는 없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안정 지향자들과 자선으로 자본주의의 비도덕적 과잉을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예를 들자면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처럼 기부에 열을 올리는 자들)을 함께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현재의 정치적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나는 <더 에이트 쇼>가 본다고 가정한 주체는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준 이는 4층(이열음)이다. 자신은 여기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저 한낱 플레이어일 뿐이라는 이야기. 비판적 성찰성을 거세시킨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즉, 4층은 이 쇼가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자아(인간)와 하지만 그럼에도 그 쇼에 순응하며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려는 자아(플레이어)로 자신을 분리한 뒤, 진짜 자신은 전자이고 후자는 이 세트장에서만 존재하는 자아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세계에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렇기에 4층은 그 누구보다 그 플레이에 전력을 다할 수 있다. 진짜 자아는 따로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4층의 이러한 태도가 우리가 지금의 자본주의사회를 버텨내는 하나의 방식, 더 나아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양육한 주체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관람자 자리 역시 이와 유사할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자신이 이 사회의 병폐를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내면화된 믿음을 내세우며, 또는 이러한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사회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라 믿으면서 자본주의적 교환 행위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냉소주의적 주체. 그렇다면 우리의 진짜 자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면화된 믿음일까? 아니면 겉으로 표출된 행동일까?
*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