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지극히 영화적 순간들, <퍼펙트 데이즈>
2024-07-24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제목이 빚어내는 단언적 인상에 비해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의 일상엔 순환의 피로감과 은근한 불화가 가득하다. 당초 공중화장실 개선 작업인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한 영화는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일이 더러움에서 깨끗함이라는 일회적 전환이 아닌 그 두 상태의 지속적 순환임을 절감시킨다. 히라야마는 마치 정화를 목표로 도를 닦는 일종의 ‘수행자’처럼 정성껏 화장실을 쓸고 닦는다. 그런 히라야마의 모습을 카메라는 장인의 기예를 관찰하듯 공들여 포착한다. 말하자면 히라야마는 내일이면 더러워져 있을 공간을 오늘 깨끗이 하는 일에 온 힘을 쏟는 자다. 동료 타카시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다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히라야마와 그의 사연에 대해 영화는 히라야마의 과묵함을 반영하듯 그저 그의 일상을 조용히 담아내며 그가 듣고 읽는 노래와 소설을 통해 그의 전사를 종종 은유할 뿐이다.

노동만큼 중요한 일상과 루틴

히라야마의 일상엔 노동만큼 중요한 활동들이 있다. 카세트테이프로 옛 노래 듣기, 취침 전 독서하기,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 듣고, 읽고, 찍는 일련의 유희 활동에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것에 의문이 들면서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영화제작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히라야마의 꿈에 돌연 흑백 몽타주가 펼쳐진다. 감독 히라야마(그의 감독으로서의 면모는 이후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인화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컷은 과감히 버리는 모종의 편집 행위에서도 드러난다), 관객 히라야마로 이뤄진 그 영상은 그의 기억과 상상으로 뒤섞였는데, 이는 현실과 비현실의 불안정한 결합인 영화와 닮아 있다. 극장에 가지 않고도 극장을 나선 관객의 표정을 한 채 깨어나는 히라야마는 반복되는 현실의 루틴을 수행한다. 기상과 출근, 퇴근과 취침, 중간중간 식사와 목욕이 더해지는 그의 반복적 일상은 몇몇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변화를 맞이한다. 단출한 일상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유지하는 그이지만 그럼에도 만남과 이별이 그의 정중동의 세계에 틈입하는 것이다.

어느 날, 히라야마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상징하는 조카 니코가 그를 찾아온다. 니코는 히라야마의 노래와 책과 사진을 함께한다. 둘 사이에 히라야마의 과거와 니코의 고민에 관한 대화가 이따금 오가지만 핵심을 우회하는 느슨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이뤄질 뿐이다. 니코는 히라야마가 습관처럼 사진을 찍는 나무를 가리켜 삼촌의 친구냐고 묻는다. 그 나무 앞에 선 니코의 뒷모습을 히라야마가 카메라로 찍는다. 앞서 니코도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모습을 자신의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한 적이 있다(이때 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를 힐끔거리는 어떤 여학생의 표정도 함께 포착된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카메라에 서로를 담는다. 축소된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타인이라는 세계가 이미지로 감각된다. 이는 찍히는 존재와 찍는 존재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미지의 역량이다. 두 사람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히라야마의 동생이자 니코의 엄마인 케이코가 그들 앞에 나타나 니코를 데려간다. 짧은 포옹으로 이별한 뒤, 히라야마는 눈물을 흘린다. 그날 밤, 그의 꿈-영화엔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삼촌과 조카가 낮에 본 강의 소리일까, 조카를 떠나보낸 삼촌의 흐느낌일까.

한편 히라야마가 호감을 갖고 있던 술집 주인의 전남편 토모야마는 히라야마의 다가오지 않은 미래, 요컨대 죽음을 노정한다. 어느 밤, 히라야마는 어둠이 내려앉은 강을 바라보며 토모야마와 대화를 나눈다. 죽기 전 헤어진 아내를 만나고 싶었다며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토로하던 토모야마는 문득 질문을 던진다.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그 질문에 히라야마는 두 그림자를 겹쳐보자고 제안한다. 겹쳐진 그림자가 변하지 않았다는 토모야마의 말에 히라야마는 변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후 두 사람은 아이처럼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한다. 그림자는 구체성이 제거된 인간의 삶을 형상화한다. 그림자로 위시되는 두 세계는 부서지거나 파괴되지 않고도 운동감을 배태한 채 공존하며, 서로의 영향으로 미세한 변화를 겪는다. 히라야마가 낮에 니코와 나눈 대화가 단절되거나 연결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밤에 토모야마와 나눈 대화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그리고 그건 픽션과 리얼리티라는 두 불완전한 세계의 공존을 꾀하는 (극)영화라는 것의 태생적 과제와도 공명한다). 다가올 죽음 앞에서, 당장의 어둠 속에서 히라야마는 암시된 가능성을 가늠해본다. 그날 밤에도 그의 꿈-영화엔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찬가지로 이건 그날 본 강의 소리일까,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어느 사내의 회한의 울음일까.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영화의 마지막, 출근하는 히라야마의 얼굴이 보인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이른 새벽, 그가 웃는지 우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명배우 야쿠쇼 고지의 열연이 돋보이는 이 장면에서 빛과 어둠, 웃음과 울음, 기쁨과 슬픔, 생과 죽음이 그의 얼굴을 무대 삼아 순환한다.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일렁이는 배우의 얼굴은 일순간 연기라는 기술의 차원을,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정념에 가닿지만 곧 대도시의 일부로 스며들고 만다. 영화의 시작 또한 도시의 풍경이었음을 기억한다. 이때 들리는 노래 <Feeling Good>은 새, 태양, 갈대, 물고기, 강물, 꽃 등에게 자신의 느낌을 아느냐 묻는데, 그 탈중심적 질문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상기시킨다(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벤더스는 40여년 전 오즈의 도쿄와는 달라진 80년대 도쿄의 모습을 담은 영화 <도쿄가>를 만든 바 있으며, 히라야마라는 이름은 오즈의 영화에서 류 지슈 등이 맡은 배역의 이름이다). 인간에게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오즈의 영화처럼, <퍼펙트 데이즈> 또한 그러한 시점으로 세상을, 인간을 바라보는, 보기보다 (물론 인간 입장에서) 무정하고 사늘한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엔딩 신을 보며 들었다(애초 이 영화의 제작 출발점이 인간이 아닌 공간이었음을 떠올려본다). 한편 이 영화가 분명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다. 히라야마의 일상 속에서, 때로는 그의 꿈-영화 속에서 나뭇잎은 바람에 나부끼고 그 풍경 안에서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이때 ‘고모레비’(木漏れ日: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가 존재하는 즉물적 순간은 빛과 어둠의 원리로 작동하는 지극히 영화적 순간에 다름 아니며, 극장을 나선 관객은 그렇게 자신이 삶-영화라는 순간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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