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로스]
[트랜스크로스] 내 주인공은 마이너스에서 출발한다, <13계단> <제노사이드>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
2024-07-18
글 : 이다혜
사진 : 오계옥

다카노 가즈아키는 제한된 시간 내에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끌어안은 주인공을 내세워,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 조형은 독자에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쾌감을 선사하기도, 때론 슬픔과 연민을 안기며 이야기를 잊을 수 없게 한다. 살인 미스터리를 해결하며 사형제에 대해 질문하는 <13계단>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에게 쫓기는 주인공이 국제적 음모에 휘말려가는 <제노사이드>는 그의 대표작으로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고, 신작인 <건널목의 유령>도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되어 꾸준히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윤석 감독이 연출하고 재현, 박주현, 곽시양이 출연한 영화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다카노 가즈아키를 만났다. 영화학도였던 그의 소설 데뷔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었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가 상영된다. 영화를 본 소감은.

= 내가 만든 캐릭터가 한국인의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는 데 굉장히 감동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여자주인공을 맡은 배우 박주현의 모습이 훌륭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가 일본에서 드라마화되었던 때 나는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편의 각본을 쓰고 연출도 맡았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감독을 하면서 내가 소설을 쓰면서 생각했던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게 되니까 특별한 경험이었다.

- 어린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지망했다고 들었다. 영화 및 TV 각본가로도 활동했고. 소설가가 되기 전에 쓴 작품들은 어떤 내용이었나.

= 각본가로서의 경력은 주로 미스터리 드라마였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써놓은 장편 시나리오들도 있었는데, 액션부터 로맨틱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의 엔터테인먼트 영화들이었다.

- 영화를 하고 싶다는 계기가 된 영화가 있다면.

= 8살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결>(1971)을 보고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소룡 영화도 좋았고, <포세이돈 어드벤처>(1978)처럼 스펙터클한 영화도 찍고 싶었다. 일본에도 사회문제나 인간 심리를 다룬 묵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주인공이 위기에 닥쳐서 관객들이 침을 삼키는 순간이다.

- 하지만 당신의 소설은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된다.

= 인생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웃음) 영상보다는 활자쪽이 사회문제를 다루기 쉬운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하는 매체다. 관객들이 느끼면서 볼 수 있도록.

- 영화를 공부하고 소설가가 되었기 때문에, 글쓰기에도 영화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당신의 소설을 보면, 카메라가 주인공의 행동을 따라다니며 항상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묘사보다는 대사와 행동 지문의 비중이 더 높다. 소설을 쓰면서 그런 점을 의식하나.

= 사건을 쓸 때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독자들이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게 쓰려고 한다. 영화 편집을 하는 듯한 인식으로 문장을 영화 편집하듯 구성해나간다. 영화도 길이가 중요한데, 소설 역시 어느 정도의 길이로 마무리할지의 분량 감각이 중요하다. 가끔 그 시간을 잘못 측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한다.

- 소설을 쓸 때 장면 중심으로 이야기를 떠올리나.

= 처음에는 시작과 끝을 정한다. 그다음 이야기의 경로에 중계 지점이 되는 사건들을 정한다. 그 뒤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본다.

-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 ‘독자를 어떻게 즐겁게 할 것인가’라는 목표를 위해 독자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게 뭔지 생각했다. 내가 찾은 답은 수수께끼를 푸는 즐거움이었다.

- 특히 좋아하는 독자 반응이 있는지.

= 나를 칭찬해주면 무조건 좋다. (웃음) 가장 많고 기분 좋은 리뷰는 책을 읽다가 지하철에서 내릴 역을 지나쳤다는 말이다.

- 에도가와 란포상 심사를 맡은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 작가는 <13계단>과 <그레이브 디거>를 언급하며, “사회에 대해 어떠한 부채를 지닌 인간이 이를 짊어진 채로 사회 (혹은 타인)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라고 한 바 있다. 이 소설들에서는 죄를 지은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독자들의 신뢰를 사게 하는 어려운 임무가 작가에게 있는 셈이다.

= 힘들고 어려운 과제를 어깨에 짊어진 동시에 강한 동기를 지닌 주인공을 만든다. 자기가 빚은 실패를 만회하려는 짐을 진 주인공이다. 내 주인공은 0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출발한다. 또한 보통 사람들도 나쁜 짓을 하거나 나쁜 말을 했을 때 후회하는 일이 흔하지 않나. 그 후회의 감정이 고조된 주인공을 만들어야 전개가 재미있어진다. 나쁘다고 생각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감동 역시 배가된다. 기본적으로 보통 사람이지만, 인생 최대의 난관에 처한 상태를 그린다. 이때 보통 사람이라는 말은 좋고 나쁜 여러 면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 <제노사이드>에는 인상적인 조연이 등장한다. 이정훈이라는 한국인 캐릭터다. 인간의 선함을 믿게 만드는 단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도쿄의 전철역에서 자신을 희생해 사람을 구한 고 이수현씨를 모델로 했다고 들었다.

= 미국 유학 시절 때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한국 사람들과 상성이 좋다고 생각했다. 한일 관계가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정훈 캐릭터를 넣었는데 계기는 고 이수현씨가 맞다. 처음에는 외모도 닮게 묘사하려고 했지만 방향을 바꾸어 선의를 지닌 이정훈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기술적으로 말하면 <제노사이드>는 적과 아군이 있는데, 누가 어느 쪽인지가 모호한 상태에서 범인을 찾는 이야기다. 전혀 의심스럽지 않은 인물부터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인물까지 다양하게 설정했다. 이정훈은 누가 봐도 의심스럽지 않은 쪽이었는데, 미스터리 팬들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의심스럽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출판사에서 등장인물 인기 투표를 했을 때 이정훈이 1위였다.

- <제노사이드>는 집필에 6년이 걸렸다. 첫 기획부터 따지면 25년이 걸린 소설이라고 들었다.

= 1984년에 인류의 진화와 관련한 글을 읽었다. 이걸 이용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없을까 생각했는데 좀처럼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여년이 흐르면서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었고, 미국에 의해 인류의 진화 증거가 감지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군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초인류가 나타난다면?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초인류를 말살하려는 미군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내고 2005년인가 2006년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너무 힘들어서 던져놨다가 2008년에 각오를 다지고 1년간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2011년 1월에 소설을 완성했는데, 당시 1년 중 340일간을 일했다.

- 집필에 집중하는 동안 작업 루틴이 있나.

=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PC 앞에 앉는다. 그때 머리가 돌아가면 쓰는데,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밥을 먹는다거나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고 다시 PC 앞에 앉는다. 쓸 수 있으면 쓰고 안되면 다시 청소를 하고 PC 앞에 앉는다. 하루 종일 그런 일의 반복이다. 결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사이다. 당연히 밤에 잘 수 없게 된다. 5시간도 잠들지 못할 때가 많다.

- 퇴고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 초고 완성보다 퇴고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길다. 처음 수정할 때는 큰 실수들이 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세 번째 고칠 때는 세부적인 내용들이 보인다. 하지만 원고를 계속 보고 있으면 어느 대목에 있는지 미로에 빠지는데, 그럴 때는 이야기의 흐름과 해당 내용이 나오는 페이지의 타임라인을 하나하나 정리해가며 흐름을 체크한다. <제노사이드>에서 마지막까지 쓰기 어려웠던 부분이 하나 있다. 미군들이 침팬지들을 살육하는 대목인데, 내가 본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연상해서 썼다. 당시 굉장히 불쾌한 감정을 많이 느끼고 힘들었던 터라 마지막까지 애를 먹었다.

- <13계단> <그레이브 디거>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등에서 ‘시간제한이 있는’ 타임 리미트 설정을 적극 활용했다.

= 마지막까지 독자들도 긴박해지는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어서 가능하면 타임 리미트 설정을 넣는다.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차이 때문이다. 미스터리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서, 서스펜스는 미래에 벌어질 참사를 막는 데서 재미가 온다. 미스터리에 서스펜스 요소를 불어넣는 게 타임 리미트다.

- 사건, 인물, 결정적인 전개…. 어떤 것부터 발상을 시작하나.

= 아무것도 안 하는데 이야기가 그냥 떠오르지는 않는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야 한다. 스토리가 먼저 해결되면 인물이나 사건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일본인 캐릭터의 경우,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캐릭터를 구상하지 못하는 편이다. 주인공의 이름만 한달 정도 생각할 때도 있다. 외국인 캐릭터와 이름은 그렇지 않지만.

- <건널목의 유령>에는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작가가 지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떻게 시작한 작품인가.

= 고등학생이던 16살 때 영화 서클에서 활동했다. 그때 영화를 찍으면서 건널목에서 테스트 촬영을 했는데 이상한 형체가 사진에 찍혔다. 그게 유령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잘 모르겠는 형체가 있어서 ‘건널목의 유령’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또 1962년 도쿄 미카와시마역 열차 탈선 사고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160명이 사망할 정도의 큰 사고였는데, 사망자 중 한명의 신원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그 한명은 누구였을까? 그 생각을 하다가, 건널목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그 장소에 나타나는 유령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유령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호러 소설로 분류되는데, <건널목의 유령>은 일반적인 소설 안에 유령이 나오는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 16살 때 생각한 이야기는 <건널목의 유령>과 얼마나 닮았나.

= 이야기의 틀은 거의 비슷하고, 정치인들이 개입된 전개는 이번에 쓰면서 새로 넣었다.

- 16살 때 쓴 이야기를 수십년 만에 다시 보니 어땠나.

= 지금 판단하기에도 16살의 나는 발상이 뛰어났다. 스토리는 정말 잘 썼더라. 하지만 설정이나 대사는 아이가 썼다는 느낌이 있더라. 예를 들어, 죽은 여자와 같이 살던 술집 종업원이 남자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이용만 당했음을 알게 되고 “모든 게 다 끝났어”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16살 때 그 장면을 썼으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설교하는 식의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 <건널목의 유령>은 전작들과는 분위기가 꽤 다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레퍼런스로 삼았던 소설이나 영화가 있었나.

= 스토리를 정리하던 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천국과 지옥>(1963) 스틸 사진이 떠올랐다. 영화의 라스트신, 유괴범이 면회실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그 사진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는데 결국 그 장면의 영향이 <건널목의 유령>에 담겼다.

- <13계단>부터 시작해 <제노사이드> <건널목의 유령> 같은 작품은 모두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다. 취재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 먼저 활자 정보로 조사할 수 있는 만큼 다 조사한다. 신문, 잡지, 단행본을 다 살피는데 잡지를 가장 많이 본다. 젊은 여성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알려면 그들이 많이 보는 패션 잡지를 샅샅이 보는 식이다. 게다가 일본은 잡지 전문 도서관이 있어서 기사 검색이 수월한 편이다. 그렇게 활자로 볼 수 있는 정보를 전부 조사한 뒤에도 해결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면 전문가를 찾아간다. 전문가를 만났을 때는 내가 조사한 전문용어를 전부 리스트업한 뒤,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해 질문을 시작한다. 전문가는 그 리스트만 보고도 내가 얼마나 노력해서 조사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조사가 철저할수록 취재가 쉬워진다. 그러니까, 전문가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뭘 알고 싶은지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쓰려는 스토리가 어떤 정보를 요구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해야 한다. 한명의 전문가를 만나 취재하는 시간은 4시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또한 취재한 내용은 그날 전부 정리한다. <건널목의 유령> 이전에는 녹음을 일절 하지 않고 전부 직접 적었다. 비밀스러운 내용을 이야기할 때는 녹음을 꺼리는 취재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 취재원은 집필의 어느 단계에서 만나나.

= 구상을 전부 끝내고 집필하기 직전에. <제노사이드>는 집필에 걸린 시간이 길기 때문에 계속 취재원을 만나며 쓰긴 했다.

- <건널목의 유령>은 199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이유가 있나.

= 16살 때 쓴 작품은 1980년이 배경이었다. 그런데 2020년대에 보면 1980년은 너무 옛날이더라. 하지만 1995년을 넘기면 안됐는데, 1995년 이후엔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서 유령 이미지를 조작하기도 수월해져서다. 이유는 또 있다. 1995년에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오컬트에 관련된 내용이 잡지에서 사라져버렸다. 또 1994년은 버블붕괴로 일본 사회가 어두운 분위기로 접어들었다는 점도 있다.

- 지금 염두에 둔 새로운 작품이 있나.

= 생각 중인 이야기는 몇 있는데 좀처럼 재밌다는 느낌이 없어서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이다.

- 당신에게 그 ‘재밌다’는 느낌은 어떤 식으로 오나.

= 마약을 했나 싶을 정도로 머릿속에서 이야기에 취하는 느낌이 든다. 누구에게나 그런 느낌이 있지 않을까. 소설을 쓰면서 힘들 때가 많은데, 그때는 처음에 ‘이거다’ 생각했던 때의 흥분을 생각하면서 극복한다.

- <건널목의 유령>은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화 계획은 없나.

= 내가 쓰고 연출할 생각이 있어서 판권은 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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