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오디세이]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총알의 시간과 정면 승부, 블릿타임의 도래와 할리우드의 신영웅주의
2024-08-07
글 : 이도훈 (영화평론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한발의 총성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탄생했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매트릭스>(1999)는 주인공 네오가 몸을 젖혀 총알을 피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360도로 움직이는 가상 카메라를 통해 네오의 움직임과 총알의 궤적을 느리게 표현한 그 장면은 관습적이면서도 혁신적이다. 과거 서부극이나 필름누아르의 주인공이 총격전에서 뽐낸 것과 같은 민첩함과 더불어 총알의 속도와 움직임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매트릭스>의 블릿타임은 디지털 영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영웅의 형상, 즉 속도의 한계를 넘어서 시공간의 질서를 다스리는 영웅을 상징적으로 그리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블릿타임은 정지된 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전환하는 영화의 기본 법칙을 뒤흔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법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새롭다는 말은 아니다. 일찍이 움직임의 환영을 중단하기 위해 슬로모션이나 프리즈프레임을 사용한 영화들이 있었다. 블릿타임은 시간의 연속적 흐름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기존의 시도에 더해 느려진 시간의 흐름을 공간적으로 표현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1880년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단축법 연구, 1980년대 팀 맥밀란의 실험영화, 1990년대 미셸 공드리의 광고와 뮤직비디오 등에서 블릿타임의 기원과 계보를 찾는다. 그 작품들에 쓰인 주요 기법은 시간의 연속성보다는 공간의 변별성을 통해 사건의 동시성, 시점의 복수성, 사물의 입체성을 구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물을 단순히 느리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보면서 다르게 보는 것이다. 비비안 솝책의 논의를 참고해서 말하자면, 블릿타임과 같은 시도는 인간 중심적인 지향과 습관적 지각의 한계를 드러내거나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매트릭스>

네오는 총알의 속도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눈과 몸을 가지고 있다. <매트릭스>의 블릿타임은 초당 1만2천장의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초고속카메라 122대를 360도로 정렬해서 얻은 이미지에 디지털 합성, 선형보간법(interpolation), 가상 카메라 기법 등을 적용해서 영상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을 만든 결과물이다. 시간적으로 찰나의 순간을 기계적인 시선을 매개로 표현한 것이면서, 공간적으로 특정 대상이나 상황을 총체적으로 탐색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블릿타임 속에서 네오는 가상 세계의 시공간적 질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 일련의 과정에 대응하기 위해 행동하는 순서를 밟는다. 그가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블릿타임 직후에 등장하는 말과 몸짓을 통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네오가 요원의 총알을 처음 피한 직후 아직 자신은 완벽히 빠르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과의 결투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여러 총알의 속도를 정지시키고 그중 하나를 손으로 만지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처럼 블릿타임과 그것에 연계된 일련의 서사적 요소를 통해 주인공 네오는 가상 세계의 질서에 맞설 수 있는 메시아적 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매트릭스> 이후 블릿타임은 동시대 미디어 전반에 걸쳐 하나의 상품처럼 통용됐다. 이 기법은 영화 외에도 광고, 뮤직비디오, 컴퓨터게임, 스포츠 중계 등에서 쓰이면서 하나의 소장르로 자리 잡았다. 또한 대중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놀이가 되기도 했다. 고프로나 인스타360과 같은 액션캠은 비교적 손쉽게 블릿타임 효과를 낼 수 있는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선보였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는 블릿타임의 장르적 확장성을 바탕으로 이 기법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퀵실버가 동료들과 함께 펜타곤 지하에 있는 감금 시설에서 매그니토를 빼낸 후 주방을 지나 탈출하는 장면을 블릿타임 기법으로 표현한다. 그 장면은 그린스크린 기반으로 찍은 퀵실버의 표정과 몸짓을 3D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로 만든 배경 또는 대상과 합성한 것이다. 간수들이 권총을 발사함과 동시에 영화 속 외화면에서 짐 크로치의 <Time In A Bottle>이라는 포크송이 흘러나온다. 퀵실버는 천장의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방울을 맞으면서 벽면을 타고 가볍게 달리듯이 움직인다. 그는 주방 집기, 식자재, 총알, 간수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정지된 대상을 찌르거나 만진다. 블릿타임이 진행되는 동안 퀵실버가 행한 사소한 동작으로 인해 주변 사물들의 위치와 상태가 난장에 가깝게 바뀌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처럼 영화, 뮤직비디오, 코믹북, 컴퓨터 게임의 장르적 속성을 혼합한 이 장면에서 퀵실버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규칙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플래시>

퀵실버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블릿타임은 영웅의 선택적 행위를 암시한다. 네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그것을 피했다. 퀵실버는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사물의 배치를 바꾸었다. 전자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위기에 대한 본능적 반응에 그리고 후자는 타인과 관련된 위기에 계산적 반응에 가깝다. 두 경우 모두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 위한 선택적 행위와 관련이 있다. 이런 식으로 블릿타임이 서사적 요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영웅의 찰나적 선택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 타인을 위한 행동, 공동체를 위한 행동으로 구분된다. 영웅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한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도식이 블릿타임의 영웅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블릿타임에서 영웅의 선택이 복잡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플래시>(2023)가 있다. 이 영화 초반부의 한 장면에서 플래시는 붕괴 직전의 건물에서 떨어지는 신생아와 간호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플래시는 극심한 허기에 시달리면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다는 독특한 신체적 특징이 있다. 건물이 무너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플래시는 초코바를 먹을지 아니면 떨어지는 사람들을 구할지를 놓고 고민한다. 다행히 그는 두 가지 모두를 수행해 자신의 영웅적 위신을 지킨다. 이런 싱거운 고민과 선택은 플래시가 빛의 속도로 달려 멀티버스의 세계로 진입했을 때 인류의 운명이 걸린 문제로 바뀐다.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는 직선적인 시간관이 사라진 그 영도의 지점에서 플래시의 선택은 기존 세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블릿타임에 결부된 영웅주의는 햄릿이 저주했던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난’ 순간과 그에 따른 누군가의 생사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블릿타임의 주인공들은 총알의 시간과 정면 승부를 걸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디지털영화의 등장을 둘러싼 성급한 예찬과 냉소적 비판이 수그러든 상황에서 지난날의 변화를 문자 그대로 캡처해보고 싶었다. 21세기의 대중영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영화가 관객을 매혹하는 방식과 관객이 영화에 반응하는 모습을 교차해서 생각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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