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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기계는 벌레를 포획할 수 있는가?, <미래의 범죄들>
2024-08-14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의 중핵은 인간 신체를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훼손하는 변형의 공포가 아니다. 물론 그의 영화는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절단되는 신체와 부서지는 살덩어리, 쏟아지는 분비물과 짓이겨진 얼굴을 스크린에 전시하며 정상적인 인간 규격에 야유를 보내는 혐오스러운 비체(abject)의 영화다. 크로넨버그는 신체의 일관된 질서로부터 추방된 부위들의 조각과 점액을 건조한 기계장치들과 병치시키며 스크린의 매혹으로 교정한다. 그의 영화는 고정된 몸을 변형하는 급진적인 유혹과 역겨운 형태로 변형된 몸이 건네는 두려움의 모순적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의 진실만을 가리키는 진술이다. 그가 묘사하는 과격한 신체의 변형은 한 가지 특수한 절차를 전제하고 있다. 크로넨버그 영화의 유혹은 이 절차에서 비롯되는 긴장에 있다.

가시적 무대와 비가시적 침입

많이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것은 새로운 발명품이나 현상을 발표하고 전시하는 장면들이다. 그의 카메라는 물체를 순간 이동시키는 전송기를 발명한 과학자의 프레젠테이션(<더 플라이>)을 경청하고,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가상현실게임을 테스트하는 리허설 현장(<엑시스텐즈>)에 입회한다. 대형 리무진을 타고 뉴욕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억만장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창밖에 펼쳐진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리무진에 탑승한 각기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세계의 현황이다(<코스모폴리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인물이 감각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원리를 공개하고 전달하는 장면은 그들의 신체가 파괴되는 장면만큼이나 특별한 비중으로 묘사된다. 그의 영화를 두고 끊임없이 언급되는 ‘미디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텔레비전이나 게임과 같은 특정한 매개를 일컫는다기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특정한 대상과 대상을 연결하고 접속하는 형식에 관한 진술이 된다.

인물과 세계, 혹은 인간의 몸과 기계장치를 접속하는 과정에서 크로넨버그 영화는 일종의 교육학적인 기능을 제공한다. 위험하고 범죄적인 그의 세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표현 같지만, 신체를 새로운 규칙에 접합하기 위해선 그 규칙을 인지하고 몸을 교육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교육을 뜻하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educare)에 ‘밖으로 이끌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크로넨버그는 인간 신체에 잠재하는 가능태를 바깥으로 배출한다는 교육의 기능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작가일 것이다. <코스모폴리스>에서 리무진이라는 닫힌 장소에 머무는 억만장자이자 정신적 미숙아인 에릭 패커는(그가 목적지로 삼는 곳은 유년기의 기억이 깃든 이발소다) 세계가 돌아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달받고 마침내 리무진 밖으로 나선다. <폭력의 역사>에서 중서부의 평화로운 동네에 정착해 살던 톰은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범죄자들에 의해 집 밖으로 나와 킬러의 정체성을 안고 동부로 향한다. 크로넨버그에게 교육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몸에 담겨 있던 부속물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 익숙한 공간에 머물러 있던 신체를 외측으로 방출하는 것은 크로넨버그가 구축한 교육적 무대의 근간에 있는 원칙에 따르는 현상이다.

한쪽에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교육의 무대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선 그 무대의 형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신호가 침입한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비가시적 신호란 대부분 벌레의 외형과 소리다. 기계장치에 끼어든 파리의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해 신체가 변형되고 마는 <더 플라이>의 비극은 크로넨버그적 픽션의 긴장을 예시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보이지 않는 파리의 침입에 기계장치는 패배한다. 기계장치를 만들어낸 인간의 몸은 신체의 일관된 질서를 벗어난다. 기계를 작동하던 인간의 손은 점액이 되어 떨어져 나간다. <더 플라이>는 가시적인 기계장치의 작동과 보이지 않는 벌레의 움직임이 일으킨 오류의 압력으로 포화 상태에 도달하는 한 인간 신체의 비극이다.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은 크로넨버그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신호를 들려주고 있다. 선한 아버지인 것처럼 보이던 톰이 그를 찾아온 갱들과 마당에서 대치하는 장면이다. 톰은 갱들에게 붙잡힌 아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이때 마당에서 대치 중인 톰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갑자기 실내로 위치를 옮겨 2층 창문 사이로 마당을 지켜보는 무인의 시점 숏으로 화면을 전환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실내를 비추는 장면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벌레 소리다. 누구의 시선도 아닌 이 시점 숏은 두 차례 반복해서 나오고 그때마다 화면에는 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에 벌레가 포착된 것도 아니다. 크로넨버그는 의식적으로 이 순간에 벌레 소리를 끼워 넣고 있다. 그 의도를 묻지 않고는 넘어가기 힘들다. 왜 바깥이 아닌 실내 공간에서 이토록 선명하게 벌레 소리가 들리는 걸까?

이 장면에는 결핍과 과잉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언급한 대로 이 모호한 시점 숏에는 시선의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에 들어온 톰의 아내와 아들은 1층에 머물러 있다. 2층 창문 사이로 마당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존재는 이 집에 없다. 시선의 주인이 되는 존재가 결핍된 시점 숏이다. 하지만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미묘한 과잉, 다름 아닌 화면 바깥의 벌레 소리다. 눈에 보이지 않고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벌레 소리는 분명히 화면에 개입하고 영화의 결핍에 침입해 있다.

시각 정보 없이 소리로만 들려오는 벌레의 침입은 서사 바깥에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지극히 평화롭고 단조로워 보이던 톰의 집 안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세계가 잠들어 있다. 카메라는 그 세계를 완벽하게 포획할 수 없다. 영화라는 기계장치는 벌레를 보여주지 못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폭력의 역사>가 묘사하는 톰의 집 안에서 가시적인 표면을 지켜봤을 뿐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에 선량한 이웃이자 다정한 아버지였던 톰은 잔혹한 킬러인 조이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갱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벌레 소리는 하나의 유혹이다. 영화에 담기지 않은 은폐된 세계가 존재하고, 그것이 언제든 스크린에 침입해 분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유혹이다. 크로넨버그는 그 유혹을 연주한다. 그는 독창적인 신체 훼손의 이미지와 기계장치의 미장센으로 영상을 건설하는 위대한 건축자이지만, 동시에 영화가 완벽하게 붙잡을 수 없는 ‘소리’를 창조하고 그 부유하는 소리의 근원을 관측하지 못하는 영화의 미완적 조건을 노출하는 폭로자다.

몸은 현실이다, 하지만 몸은 변형된다

2022년에 만들어진 <미래의 범죄들>은 문제적인 영화다. <맵 투 더 스타>를 완성한 뒤 8년 만에 복귀한 크로넨버그의 신작이자 그가 <엑시스텐즈> 이후 20여 년 만에 다시 만든 바디 호러 장르물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독특한 설정이나 신체 훼손의 시각 효과가 아니다. 이 영화를 두고 “인류 진화에 대한 명상”이라고 말한 크로넨버그는 <미래의 범죄들>에서 가시적인 무대와 비가시적인 소리의 불화를 가장 집요하게 포착한다. 이야기나 주제가 요구하는 논리를 넘어 통합할 수 없는 두 요소의 경합을 삽입하고 끝내 해소되지 않는 세부로 남겨두는 이 영화는 크로넨버그적 말년의 양식에 해당하는 사례일 것이다.

<미래의 범죄들>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몸에 새로운 장기가 생겨나는 과도기적 진화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사울 텐서와 카프리스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사울의 몸을 해부하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장기를 제거해 전시하는 행위로 예술을 실천한다. 두 사람의 행위예술은 크로넨버그적 교육학 무대의 최종적인 판본이다. 한편 플라스틱을 소화하는 인간 브레켄이 어머니에 의해 살해당하고, 아버지인 랭 도트리스는 사울과 카프리스에게 브레켄의 시신을 가지고 공개 해부 공연을 진행해 달라고 요청한다. 랭은 죽은 브레켄의 장기를 세상에 공개해 인류의 진화를 선보이려고 하지만, 정작 해부된 브레켄의 몸에는 오염된 평범한 장기들만이 남아 있다. 이것이 사울에게 접근하던 국립 장기 등록소 직원인 팀린이 손 써둔 일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일은 복잡하고 모호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사울과 랭이 합작한 시각적 무대의 기획은 결국 실패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실패의 성질을 지닌다.

몸속을 해부하고 새로 자란 장기를 제거하는 사울과 카프리스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에 놓인 두 대의 텔레비전에 ‘Body is Reality’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몸은 현실이다. 그런데 이는 몸이 현실의 선명한 기반이라는 표어가 아니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몸은 한 가지 고정된 현실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신체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중이고 크로넨버그가 설정한 인류는 과도기에 존재한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선 복수형의 현실이 펼쳐지고, 그 안에 거주하는 서로 다른 몸이 제시되곤 한다. <데드 링거>의 쌍둥이가 공유하는 몸, <엑시스텐즈> 속에서 분리되는 현실의 몸과 게임 속의 몸, <폭력의 역사>에서 ‘톰’의 세계와 그 안에 숨겨진 ‘조이’의 세계로 나뉘는 1인 2역의 몸.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복수형으로 나뉜 현실 감각에 위계를 설정하거나 명료한 구분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언제나 경계의 교란이다. 몸은 현실(Reality)이고, 현실은 모든 곳에 미완성적이고 과도기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확신할 만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심에 사울의 몸이 있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그의 몸은 크로넨버그적인 픽션의 긴장이 긴밀하게 충돌하고 매개하는 장소다.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이 그랬듯이, 크로넨버그가 묘사하는 사울의 몸에는 가시적인 증상과 비가시적인 신호가 뒤엉켜 있다. 가시적인 축은 그의 몸 안에 새로운 장기가 자라나고 그것을 해부하고 제거하는 예술적 퍼포먼스의 측면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미래의 범죄들>에서 영화의 카메라는 외과의사의 손과 같은 기능을 드러낸다(사울을 만나 예술가가 되기 전 카프리스의 직업은 외과의사였다). 드러나지 않는 신체 내부를 관측하려는 해부학적 욕망은 초기영화의 기원적 충동을 환기한다. “영화는 몸짓의 꿈”(조르주 아감벤)이며 신체를 마비시키는 구속을 해방하는 이미지의 충동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표어처럼 몸이 현실이라면, 사울의 몸을 해부하는 카프리스의 퍼포먼스는 현실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포착하려는 영화의 열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신호들이 사울의 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둘러싼 그의 의상은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포착하려는 시각적 충동을 차단하는 가림막으로 기능한다. 하나의 신호는 그의 목소리다. 사울을 연기한 비고 모텐슨은 거의 발음이라고 말하기 힘든 방식으로 대사를 내뱉는다. 장기가 자라나고 식도가 막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의 신체는 영화의 카메라와 가시적인 미장센으로 확신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또 다른 단서는 사울의 주변에 윙윙거리는 크로넨버그 특유의 벌레 소리다. 바깥으로 나온 그의 신체 근처엔 언제나 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미래의 범죄들>에서도 벌레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영화 카메라는 인간 진화를 폭로하고 미래의 인류를 가늠하려 들지만, 여전히 사울의 주변에 맴도는 벌레를 관측하지 못한다. 영화라는 기계장치는 벌레 소리의 난입에 다시 패배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래의 범죄들>은 결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던 크로넨버그의 가시적인 축과 비가시적인 축의 충돌을 일으키는 영화이며 그 대결에서 패배하는 시각장치의 운명을 직시하는 영화다.

패배하는 시각장치

수술대를 조종하던 사울은 카프리스의 몸을 메스로 베어버린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사울이 말한다. “기계가 한 거야” 카프리스는 대답한다. “아니, 당신이 한 거야”. 수술이 곧 섹스인 <미래의 범죄들>의 세계에서 카메라는 메스로 타인의 몸을 베는 성적 충동이 사울의 욕망인지 기계장치의 욕망인지 불분명하게 남겨둘 수밖에 없다. 시각적인 현상을 재현하는 영화는 보이지 않는 신체적 욕망을 관측할 수 없다. <미래의 범죄들>은 몸을 포착하지만 몸의 비밀에 다가서지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브레켄의 장기를 바꿔치기한 팀린의 행동처럼, 가시적인 관측은 무기력하다. <미래의 범죄들>에서 카메라와 텔레비전으로 매개되는 모든 현상은 그 비가시성에 무력하다. 그러므로 화면에 벌레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자각한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잉여에 패배하는 시각장치다.

<미래의 범죄들>의 도입부에서 크로넨버그는 브레켄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뒤로 고통스럽게 꿈에서 깨어나는 사울의 모습을 병치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프리스는 통증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는 사울을 깨운다. 몸으로 고통을 느낀 사울은 말한다. “꿈의 일부분이 되는 것 같아” 신체는 통증을 지각하고 꿈의 한 부분으로 변해간다. 어쩌면 이 영화는 죽은 브레켄의 고통을 공유하려는 사울의 악몽 같은 열망일지도 모른다. 잉태와 출산이 삭제된 크로넨버그의 세계에서 인간은 악몽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나 꿈은 영화의 무대인 화면 바깥에 있다. 사울은 마침내 유독성 플라스틱 바를 섭취한다. 하지만 <미래의 범죄들>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가 내내 보여주던, 신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노골적이고 프로노그래픽한 이미지가 아니다. 카메라는 흑백으로 전환된 화면에서 플라스틱을 섭취한 사울이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한 방울의 건조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의 신체는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도록 변화했고, 미래의 인류로 거듭난 것 같다. 하지만 미래의 신체는 영화적 미장센에 포획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신체의 겉면을 지켜볼 뿐이고, 변형된 조직은 감춰진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가 여전히 남겨져 있다. ‘몸이 현실이다’Body is Reality라는 명제를 되돌아본다면, 이 순간 <미래의 범죄들>은 잠재된 현실의 변형에 마지막으로 패배한다. 말년의 크로넨버그는 이 장면에서 패배하는 영화의 운명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심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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