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그들이 얼마나 강했는지 짚어내고 싶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이원식 감독, 배우 강하나
2024-08-08
글 : 이자연
사진 : 백종헌

일제강점기에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바다 건너 오사카의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조선 소녀들. 어느 날 우연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한 조각을 발견한 이원식 감독은 과거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발자국을 따라갔다. 우리 모두가 식민지 역사를 학습해왔듯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추위와 더위, 허기와 과로, 폭력과 멸시 등 어린 소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한편으로 익숙한) 단어들을 쏟아내지만 놀랍게도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피해의 순간보다 그것을 견디고 이겨낸 삶의 의지와 인내의 숭고함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조선인 여공들을 피해자로 위치시키기 이전에, 어엿한 노동자로 먼저 인지한 영화는 그들의 수동성보다 자주성과 주체성, 저항력 등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영화 <귀향>으로 슬픔의 역사를 재현한 강하나 배우가 이원식 감독과의 의미 깊은 여정을 함께했다. 어떤 시간은 그것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회생한다.

강하나, 이원식(왼쪽부터)

- 일제강점기 여공들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원식 2017년 업무차 오사카를 방문했다. 하루키 중학교에서 붉은 담벼락 위로 오래된 철제 십자가 몇개가 박혀 있는 모습을 보았다. ‘중학교에 왜 이런 게?’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자료조사를 해보니 1910년대 조선에서 온 여공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공장에서 세운 철조망 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높은 담벼락 위로 철사를 칭칭 감은 걸쇠가 십자가 모양처럼 보였던 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간 여공들 이야기는 많이 다뤄지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 사람들이 관심을 잘 갖지 않는 이야기, 잘 모르는 이야기를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제작의 당위성을 더 철저하게 설득해야 한다. 제작사에 어떤 점을 피력했나.

이원식 강제징용의 역사나 위안부와 관련된 일화는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왔다. 이제는 민중의 역사를 더 깊이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이들이 엄혹한 시기를 어떻게 통과해왔는지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다. 일반 조선인 여공에 대한 기록이 더 많이 필요한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다룬다는 점을 주요하게 피력했다. 펀딩을 완료하기까지 4~5년 정도 걸렸다. 한국에 남아 있는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 그때 김찬정 르포 작가가 남긴 <조선인 여공의 노래> 단행본 한권에 유일하게 기대어 지도를 펼쳐갔다. 이 책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도 나올 수 있었다. 책 제목을 따온 것도 오랫동안 여공의 증언을 기록한 존경심 때문이다.

- 강하나 배우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출연을 어떻게 결정하게 되었나.

강하나 이원식 감독님이 극단 달오름의 대표인 어머니에게 먼저 연락을 주셨다. 처음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우들이 직접 일기 내용을 읽는 것과 중간중간 당시 소녀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 새로웠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조선인 여공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계기로 내가 몰랐던 사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원식 처음부터 강하나 배우만 생각했다. 재일 코리안으로서 오사카에서 극단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재학 중이다. 조선인 여공 이야기를 전할 때 강하나 배우의 정체성이 작품과 긍정적인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의 의미가 더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팅을 잡았다. 그의 필모그래피인 <귀향>에서의 연기가 무척 좋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 한과 정서를 이해하고 있었다.

- <귀향> 이후 <조선인 여공의 노래>를 만났다. 민족, 역사, 일제강점기…. 이런 키워드가 반복되는 작품에 출연하는 게 특정 이미지로 굳어질까 걱정됐을 것 같은데.

강하나 내심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다양한 작품을 시도해보고 싶으니까. 하지만 재일 코리안이라는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나를 찾아주는 자리들이 있다. 무엇보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이렇게 의미 있는 작품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운이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나의 저변을 넓히고 싶다면 내가 앞으로 색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나아가면 된다. 언젠가 휴머니즘 가득한 드라마도 도전해보고 싶다. (웃음)

- <조선인 여공의 노래>와 함께하면서 공부도 많이 해야 했을 텐데.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강하나 정말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일본에 건너온 어린 노동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부터 시작해 여공들이 몇평 안되는 아주 작은 방에서 12시간에 한번씩 교대해가며 공간을 나눠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 힘든 나날이지만 호르몬(돼지 내장 부위로 일본인이 먹지 않고 버린 부위를 말한다.-편집자)을 구워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뭐랄까,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게 너무 부끄러우면서도 이렇게라도 알 수 있어 너무나 감사했다. 또 혹독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나가는, 밝은 면을 잃지 않는 강인함과 삶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 영화에는 당시 여공이었던 할머니들을 찾아 당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이들은 오랜 일본 생활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한다. 이를테면 “고사이노(5살) 기억은 나지만 기노 교오(어제오늘) 기억은 안 난다”와 같은 식이다.

이원식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았지만 한국의 기억과 언어를 잊지 않아 생겨난 문화적 융화다. 할머니들의 한국 내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고 뚜렷하다. 의사소통 과정엔 문제가 없었다. 모든 스태프가 일본어를 워낙 잘했고, 할머니를 만난 강하나 배우 또한 그곳 출신이라. 할머니들과 함께한 촬영은 무척 즐거웠다. 에너지가 무척 긍정적이고 밝았다. 100여년 전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 당사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내가 너무 늦었다’는 거였다. 막연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오사카 내 증언자들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엽서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기도 하고 여공들이 다닌 공장 지역을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다 한분이 노인케어센터에 계시단 소식을 들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만남도 촬영도 기꺼이 응해주셨고, 현장에서 또 다른 생존자를 소개해주셨다. 할머니들은 우리의 관심에 오히려 놀라워하셨다. 이걸 기록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반겨주셨다.

강하나 나는 출연자 중 할머니 한분을 만나뵀다. 이런 말 괜찮을까… 정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우셨다. (웃음) 첫 만남에 밝게 반겨주시는 모습에 정말 감사했다. 마치 첫 만남이 아닌 것 같은 따뜻함이 묻어났다. 개인적으로 할머니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쓰시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혼자 공감했다. 나도 집에서 자주 두 언어를 섞어 쓰곤 한다. 친근감이 높아졌다.

- 일제강점기 당시 여공들을 증언해줄 많은 일본인을 찾았다. 섭외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이원식 내 활동지가 한국 기반이기 때문에 타국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사실상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 조선인 여공과 관련한 자료와 인물을 찾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만나야 할 사람들은 대부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민간 역사가 히구치 요이치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고장을 조사하던 중 조선인 여공의 역사를 알게 돼 그 기록을 홀로 정리하신 분이다. 처음 연락했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시더라. (웃음)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주길, 다큐멘터리로 완성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선생님을 만났을 때 찌릿찌릿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트리거를 배경에 두고 있지만 반일감정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조선인 여공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동시에 극적인 분노를 조장하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이원식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한 감정에 몰두하기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장이 되기 위해 바다 건너 오사카에 올 수밖에 없었던 어린 조선인 여공의 삶과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다. 조선인 여공들은 보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들에게 잘해준 일본인 식당 아주머니가 해고됐을 때 복직을 요구한 건 여공들이었다. 한편 조선에서 온,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남자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문맹인 여공을 핍박하고 착취했다. 이러한 역사가 혼재하기 때문에 민족적 감정을 두고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할 수 없었다. 이 사실 자체를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게 중요했다. 너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자료보다는 삶의 기록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출연진에게 여공의 일기와 증언을 읽게 했다. 여공의 역할을 한 배우들, 오사카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그것을 낭송할 때 그 정서를 더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몇몇 재일 코리안 배우들은 한국어 발음이 부정확하기도 하다. 그러한 단점을 감수하면서까지 낭송을 선택한 이유는.

이원식 그게 사실 아닌가. (웃음) 증언이 막 수집됐던 1980년대 생존자들의 말투나 억양은 온전한 한국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형태였을 것이고 그것을 정갈한 한국어로 표현하는 게 더 거짓 같았다. 서툴고 다소 부정확하게 들릴지라도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방식이라면 영화의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강하나 촬영하면서 발음에 신경 쓴 것은 사실이다. 최대한 명확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게 배우니까. 그런데 감독님이 당시 소녀들의 말투가 재일 코리안이 쓰는 말투에 가까웠을 거라고, 그것을 지켜내는 게 더 좋은 효과가 날 거라고 디렉션을 주셔서 부담감이 덜했다. 또 낭송하면서 청각만 자극하는 게 아니라 내용과 관련한 이미지가 떠오르길 바랐다. 그래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최대한 담담한 톤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이원식 강하나 배우는 발음이 너무 또박또박했다. 조금 틀려주길 바라기도 했는데. (웃음)

- 그동안 일제강점기 피해 여성을 그리는 방식은 대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에 집중해왔다. 하지만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여공들을 근면성실한 노동자로 인식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분투해간 지점을 명확하게 짚어낸다. 현대적 관점과 해석이 눈에 띄는데.

이원식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나 역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할머니들의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삶의 자세를 보다보면 그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슬픔보다 그것을 이겨낸 힘을 더 말하고 싶어졌다. 물론 그분들이 엄혹한 현실을 마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너무 슬프게만 몰아세우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강했는지, 어떤 의지를 갖고 밝고 건강하게 살아왔는지 꼭 짚어내고 싶었다. 오사카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 있는데 따님 한분이 내게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비참하게 그리지 않아서, 긍정적으로 그려줘서 고맙다”고.

- 영화에 등장하는 여공들의 노래는 어떻게 구현한 것인가.

이원식 실제로 구전된 노래가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노래의 멜로디는 찾지 못해 음악감독님과 긴 논의를 거쳐 완성했다.강하나 노래를 부르는 연기를 하면서 힘겨운 나날에서 여공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휴식을 취하는 행복한 순간들을 상상했다. 내가 만난 할머니의 긍정적이고 밝은 부분들은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지켜져온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도 노래를 부르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졌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삶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