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미덕을 품고, <문경>
2024-08-28
글 : 이우빈

문경(류아벨)이 경상북도 문경시로 떠난다. 3일간의 휴가를 빙자한 사회로부터의 도피다. 문경은 예술 전시 등을 기획하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여느 사회생활이 그렇듯이 쉽지 않은 난관들이 그를 괴롭힌다. 가장 큰 걱정은 한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초월(채서안)의 존재다. 업무 실력도 뛰어나고 성실하며 함께 일하기도 편한 후배이지만, 회사 사람들은 초월의 성과를 이기적으로 활용할 뿐 그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생각을 통 하지 않는다. 결국 초월이 회사에서 자취를 감췄고, 문경은 심란한 마음에 초월의 고향인 문경으로 돌연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곳에서 문경은 비구니 가은(조재경)과 주인 잃은 강아지 길순이를 우연히 만난다. 푸르른 녹음의 문경에서 길순이의 주인을 찾던 문경과 가은은 유랑 할매(최수민)라 불리는 노년의 마을 주민에게 신세를 지게 되고, 할매의 손녀인 유랑에게 얽힌 아픈 과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문경, 가은, 유랑은 각자의 아픔을 속에서 바깥으로 꺼내 나누며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

영화의 뼈대는 도시 직장인 문경과 비구니 가은이 문경의 고즈넉한 풍경을 후경 삼아 펼치는 로드무비다. 전반부 30분 정도는 문경과 초월이 중심이 된 오피스 드라마로서 근래 사회의 구조적인 고용 문제나 직장 내 갑질 등을 건드리지만, 본격적인 영화의 진의는 시골길에서 이뤄지는 자그마한 소동과 조용조용한 대화로 완성된다. 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강아지 길순인데, 주요 인물들의 동선과 목적지가 길순이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이동 등으로 추동되기 때문이다. 문경과 가은이 만나는 유랑 할매 역시 길순이와 닮은 강아지를 잃어버린 경험 때문에 두 사람을 집에 들이고 손녀 유랑의 이야기를 터놓으며 교감하게 된다. 커다란 자극이나 서스펜스는 없더라도 순간순간 맨발로 흙바닥을 걷는 걸음과 숨겨뒀던 진심을 고백하는 나긋한 목소리, 드넓은 문경의 풍광만으로도 2시간의 러닝타임이 꽤 충만하게 채워진다.

<방문자>부터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로 이어진 ‘관계 3부작’을 내놓으며 독립영화계에서 고유의 스타일을 펼쳐온 신동일 감독의 신작이다. 이후 꽤 긴 공백을 거쳐 현대사회의 가족극 <컴, 투게더>를 내놓았고 <청산, 유수>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문경> 역시 신동일의 스타일이라 부를 만한 이질적인 존재들의 관계 성립, 사회적 이슈의 후경화, 인위적인 굴곡 없이 자연스레 흐르는 서사 등이 돋보인다. 이전 신동일 감독이 그리는 관계의 구도가 외국인노동자와 여고생(<반두비>), 외환은행 딜러 부르주아와 노동자계급의 부부(<나의 친구, 그의 아내>) 등으로 계급의 차이에 집중했던 것과 다르게 <문경>은 조금 다른 존재들일지라도 충분히 합일할 수 있고 서로의 인연을 기분 좋게 마칠 수 있다는 낙관의 전언을 남긴다. 또한 신동일 감독은 그간 캐릭터 설정에 죽음의 모티프를 꾸준히 다뤄오기도 했는데, 이번엔 가은의 전사에 얽힌 죽음의 의미가 실제 우리 사회가 겪었던 사회적 죽음의 여파로 이어지며 한층 더 확장되기도 한다. <문경>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서 상영된 바 있다.

close-up

전반부 도심에서 펼쳐지는 문경, 초월의 이야기와 후반부 문경에서 일어나는 문경, 가은의 이야기는 공간의 촬영 방식이나 인물들의 대화 속도, 화면의 색감까지 여실히 다른 차이를 보인다. 두 공간의 층위가 영화에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지 살피면 더욱 흥미로운 감상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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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감독 임순례, 2018

도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낀 한 청년이 시골에 돌아와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는 뼈대가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와 일견 겹쳐 보이기도 한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리틀 포레스트>가 주인공 혜원(김태리)의 내면 변화에 가장 집중하는 단독 극에 가까웠다면 <문경>은 인물들의 관계 일변에 더 초점을 두는 관계 극에 가깝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치유의 시간이 필요함을 두 영화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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