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야마(야쿠쇼 고지)의 차 안에 올드팝이 흐르는 순간, 그의 단순한 일상은 어엿한 영화가 된다. 평범한 금요일 저녁을 <퍼펙트 데이즈>의 한 장면처럼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준 것 또한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익숙한 선율이었다. 지난 8월23일 저녁 강북문화예술회관 강북소나무홀에서 <강석우의 시네마콘서트>가 개최되었다. 영화 속 친근한 음악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며 그에 담긴 추억과 정서를 공유하고자 <씨네21>과 강북문화재단이 공동 기획한 공연이다. 아직 후덥지근한 평일 저녁이지만 객석은 가득 찼다. 리모델링을 거쳐 8월 재개관한 강북소나무홀의 깔끔한 로비가 모처럼 북적였다.
이날 공연의 진행을 맡은 중견배우 강석우는 연예계 대표 클래식 음악 애호가다. 지난 2015년부터 2022년까지 CBS 음악FM <아름다운 당신에게>의 DJ로 나른한 오전을 채울 클래식 음악을 큐레이팅했고, 지난해부터는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의 사회를 맡으며 클래식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그리움조차> <4월의 숲속> 등의 가곡을 직접 작사·작곡한 현역 음악인이기도 하다. 영화와 음악 사이를 매개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진행자다.
“강북구 분들은 점잖으시네요? 다른 곳에서는 환호성도 지르던데. (웃음)” 가벼운 도발과 함께 입장한 강석우 배우 덕분에 새 단장한 홀처럼 낯설었던 객석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감동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눈에 맺히는 눈물을 떨어트리게 하는 것이 바로 음악입니다. 공포영화도 음악이 없다면 하나도 무섭지 않겠죠.” 클래식이 친숙하지 않은 분도 많을 거라 예상한다는 강석우 배우는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 기억하는 음악은 더욱 쉽게 다가올 것”이라고 관객을 안심시키며 공연으로 이끌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영화와 음악의 깐깐한 기준을 모두 만족시킬 법한 탄탄한 구성이었다. 1950년대 프랑스영화의 대표작 <금지된 장난>과 70년대 마피아 누아르의 규범인 <대부>, 모두가 기억할 세기말의 한국영화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2016년작 <맨체스터 바이 더 씨>까지 세대와 취향을 넘나드는 친절한 큐레이션이 돋보였다. 음악적으로도 충실하고 다채로웠다. 바흐와 비발디, 모차르트, 라흐마니노프의 대표곡으로 서양음악사의 굵은 줄기인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를 훑었다. 여기에 탱고와 재즈, 전통민요 등의 장르까지 아울렀다. 이웅 음악감독은 공연 후 인터뷰에서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등은 대중적인 목적의 클래식 공연에서 흔히 연주되는 곡은 아니”라며, “너무 뻔하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균형 잡힌 선곡을 목표했다”고 밝혔다.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이경원과 현악 앙상블 ‘소나레 아키’가 이날의 무대를 책임졌다. 여기에 오보에, 클라리넷, 클래식기타, 성악 소프라노 등 곡마다 다양한 독주 악기가 주선율을 얹었다. 특히 정규 클래식 공연에서도 종종 연주되는 핵심 협주곡들이 눈길을 끌었다. 스페인 작곡가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 2악장의 격정적인 카덴차를 선보인 클래식 기타리스트 이미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특유의 달콤쌉사름한 고전미를 십분 끌어낸 클라리네티스트 이서영이 각 악기의 가능성과 매력을 담뿍 뽐냈다.
이웅 음악감독의 편곡에서는 각 영화의 장면과 음악이 더욱 효과적으로 조응하도록 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다. 주로 현악 편성으로 연주되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는 오보이스트 유예동의 처연한 음색을 만나 한층 비극적인 색채를 띠었다. 삶의 절망을 삼키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인물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로웰 메이슨의 <내 주를 가까이>는 <타이타닉> 속 악단이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 끝까지 연주하던 곡이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먼저 멜로디를 도입하는 명장면을 재현하듯 지휘자 이경원이 바이올린을 들고 나와 연주를 시작했다. 이내 현악 앙상블이 파도처럼 들이치자 객석도 음악 속에 깊이 잠겨 들어가는 듯했다.
적절한 해설은 음악감상을 한층 즐겁게 도와주었다. 빌라 로보스의 성악곡 <브라질풍의 바흐 5번>의 후반부는 가사 없이 모음으로만 부르는 ‘보칼리제’로 진행된다. 가사가 없으니 심심할 것이라는 편견을 안다는 듯 강석우 배우가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에 대해 설명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석규씨가 마음속 깊은 슬픔을 품는 장면입니다. 만약 이 곡에 가사가 있었다면 우리의 생각이 가사를 따라갔을 거예요. 가사가 없기에 우리가 그 슬픔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프라노 박현진은 풍부한 성량과 넓은 비브라토를 바탕으로 음률의 사이를 매끄럽게 활강했다. ‘아’와 ‘어’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음의 미묘한 뉘앙스를 귀로 쫓는 감상법은 가사의 의미를 곱씹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강석우 배우의 다감한 해설에 수줍게 화답하던 관객들은 어느새 두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깊게 몰입했다. 이제 마지막 순서가 다가오고 있다는 멘트에 아쉬움 섞인 탄식이 새나오기도 했다. 한창 뜨거워진 분위기에 앙코르가 빠질 수 없었다. 강석우 배우의 가곡 작업에도 참여한 이웅 음악감독은 진행자의 가곡 중 <4월의 숲속>을 앙코르로 준비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대를 호흡하리니/ 4월의 숲속에는 햇살이 가득 차네.” 사랑과 재회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가사처럼, 마음을 두드리는 선율이 흐르던 금요일 저녁의 강북소나무홀도 영화에 얽힌 각자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는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흔히들 고통은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이겨낼 수 없는 고통도 있는 법이죠.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그런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흐르는 ‘아다지오’는 가을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저리게 할 곡입니다.” 사실은 20세기 음악학자 레모 지아초토가 작곡한 위작이라는 강석우 배우의 설명에 뒤이어 오보이스트 유예동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미션>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오보에의 평화롭고 따뜻한 음색을 강조하는 곡이라면, <아다지오 G단조>의 애수 어린 선율은 오보에의 쓸쓸하고 애달픈 표정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본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뛰어난 바이올린 교육자인 이경원씨는 이날이 지휘자 데뷔 무대였다고 한다. 이경원 지휘자는 매 곡 독주 악기와 연주자가 바뀌는 까다로운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이끌어갔다. 여기에 더해 <타이타닉>에 사용된 음악 <내 주를 가까이>에서는 구슬프고도 단단한 바이올린 독주 또한 선보였다. 강석우 배우와 관객들의 응원도 분명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날 연주를 맡은 현악 앙상블 ‘소나레 아키’(Sonare Archi)는 ‘현이 울리다, 현으로 노래하다’라는 뜻의 고이탈리아어를 모토로 삼는다. 2004년 창단 이래 꾸준히 체임버 오케스트라 및 여러 악기를 포괄한 다양한 편성의 곡들을 연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영화 속 음악이 드라마를 보강하고 이야기를 풍요롭게 해주는 역할을 하듯, 소나레 아키의 앙상블은 독주 악기들을 받치는 협주 반주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죽음을 두달 남긴 모차르트는 어찌 그런 아름다운 멜로디를 쓸 수 있었을까요?” 강석우 배우의 해설 덕분인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의 익숙한 멜로디가 조금은 서글프게 다가왔다. 클라리네티스트 이서영의 연주는 여유로운 호흡을 바탕으로 한 유려한 프레이징과 섬세한 강약 조절이 돋보였다. 이날 독주 이외에도 오보이스트 유예동과 함께 앙상블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현악 위로 따스한 목관의 소리를 불어넣었다.
소프라노 박현진과 클래식 기타리스트 이미솔이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5번>을 연주했다. 클래식기타의 넓은 음역대와 특유의 다정한 음색은 오케스트라의 빈자리를 완벽히 메웠다. 두 연주자가 눈을 맞추고 호흡을 조율하며 선율을 쌓아나가는 모든 과정이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공연 내내 바삐 움직였던 앙상블 소나레 아키의 단원들도 잠시 눈을 감고 음악 속에 깊게 몰입했다.
MBC 표준FM <여성시대>, CBS 음악FM <아름다운 당신에게>로 다져진 강석우의 진행력은 청중을 휘어잡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개인기에서 빛을 발했다. 물론 듣는 사람에 따라 개그 취향은 갈릴 수도 있겠다. “음악 공부를 하다 보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유럽 언어가 많이 사용되어서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불어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경찰서 형사과입니다. 얌마, 바른대로 불어….”
강석우 배우의 해설에서는 영화 속 장면과 음악 작곡 당시의 비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아우르는 깊은 이해도가 돋보였다. 마지막곡 <포르 우나 카베사>(Por Una Cabeza)의 장르인 탱고의 기원을 설명할 때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19세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전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녀 성비는 10:1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성 앞에서는 있는 힘껏 춤을 추어 구애해야 했죠. 바로 탱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