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얼굴의 스펙터클
2024-09-20
글 : 송경원

리뷰 쓸 때 ‘배우의 존재감으로 성립하는…’ 따위의 수사를 간혹 사용한다. 실은 부끄러울 만큼 게으른 표현이다. 영화 글쓰기에서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같은 표현을 다른 영화에 썼을 때 위화감이 없다면 그건 실패한 글쓰기다. 속된 말로 영화 안 보고도 쓸 수 있는 표현. 소심하게 항변하자면 때로 그런 표현들은 불가항력을 마주한 일종의 항복 선언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는 대상은 언어로도 포획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다름 아닌 배우다.

영화의 서사나 구성, 감독의 연출이나 의도 바깥에서 기이한 활력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있다. 찍을 수는 있지만 의미를 고정할 수 없는 대상들. 배우의 몸짓, 배우의 동선, 배우의 실루엣, 배우의 육체, 무엇보다 배우의 얼굴이 거기에 해당한다. 어쩌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가르는 기준은 필름이 아니라 배우의 유무일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통제 불가능한 대상인 동시에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다. 그 어떤 스펙터클도 배우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이길 수 없다. 카메라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최상의 장소 역시 배우의 얼굴이다. 우리가 배우의 얼굴에 매료되는 이유는 바로 그 설명 불가능한 상태를 제 한몸에 담아내기 때문이라 믿는다.

<파친코> 시즌2를 보며 오랜만에 얼굴의 스펙터클을 실감했다. <파친코>의 카메라가 많은 장면에서 인물에 포커싱을 맞추고 주변을 아웃포커스로 날린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클로즈업된 얼굴이 감정과 상황, 서사까지 모두 납득시켜버리는 이미지의 힘을 설명하기 어렵다. 선자 역의 김민하 배우는 시즌1에서와 또 다른 얼굴을 들이민다. 약간의 흥분과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모니터 화면이 거대한 스크린처럼 느껴질 만큼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신비한 얼굴이 거기 있다. 여전히 소녀 같으면서 이미 늙어 있고, 뼈대 굵은 억척스러움 뒤편에 섬세한 영혼의 떨림이 살갗 바로 밑까지 진동하는 것 같다. 화면을 오롯이 장악한 선자를 마주할 때마다 순식간에 1930년대 일본으로 끌려간다.

고개 돌려 극장가를 보니 새삼 배우들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한국이 싫어서>의 고아성 배우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시대의 공허가 담겨 있다. 매섭게 추운 한국에서 텅 비었던 눈동자가 따뜻한 뉴질랜드에서 점차 생기가 도는 것만으로도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을 시간들마저 납득된다. <그녀에게>의 김재화 배우가 보여준 서글픈 피로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장애아의 부모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무게는 인물의 육체를 점차 무너트리는데, 그 과정은 ‘메소드’라는 몇 마디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경계에 선 그 얼굴을 마주하며 스크린 안 영화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 놓인 가교가 결국 배우의 육체로 지어졌음을 실감한다. 마지막으로 <베테랑2>의 정해인 배우의 새까만 눈동자. 검은 먹을 떨어트린 듯 한줌 빛도 반사되지 않는 눈동자와 군데군데 피가 묻어도 여전히 해맑은 얼굴은 빈틈 많은 이 영화 최고의 아웃풋이다. 이 얼굴들을 커다란 화면에서 정면으로, 오랜 시간 마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극장까지 발걸음을 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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