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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공모자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2024-10-02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아무도 없는 숲’, 죄지은 자(죄를 목격한 자)에게 아무도 없는 숲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어떤 일이 일어났건, 나 하나만 눈 꼭 감고 모른 척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곳이 되니 말이다. 불현듯 날아온 돌멩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회색지대를 남긴다. 어쩌면 그 회색지대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통사람’의 자리일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 누구와도 공모할 수 있는 자들의 회색지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피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를 징벌하는 표면적 이야기 속에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쿵, 하는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라고 말이다. 달리 말해, 아무도 없는 숲속에 홀로 서 있는 당신은 누구와 공모할 것인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라는 질문.

침묵과 외면의 돌

삶의 터전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상준(윤계상)이 운영하는 레이크뷰 모텔의 살인사건은 만천하에 공개되고, 영하(김윤석)가 운영하는 펜션의 살인사건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쿵, 하는 소리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소리를 외면하는 것, 그것이 영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영하와 상준이 겪는 사태는 꽤 유사해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영하에게는 성아(고민시)의 범죄(의 가능성)를 세상에 알릴 몇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영하는 그때마다 그 기회를 외면한다. ‘선택의 기회’, 이는 상준과 영하의 처지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다. 상준에게는 그 어떤 선택의 기회도 없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가혹하게 몰아세우는 세상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사건이 벌어졌던 레이크뷰 모텔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상준의 모습이 등장할 때다. 상준은 지향철(홍기준)이 여자를 업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과 데스크에 엎드려 잠든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삶이 무너지던 그 참혹한 순간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무력감, 그것이 상준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다.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그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상준은 그 해답을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죄책감이라는 형벌을 내리고, 그 족쇄에 평생을 갇힌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상준의 과거와 영하의 현재를 병치시키는 교차서술을 통해, 다소 그 동기가 불명확하게 제시된 영하의 선택과 행동을 합리화하려 한다. 상준이 겪은 일련의 상황은 영하가 내리는 여러 선택과 행동의 이유처럼 작동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두 사람의 처지를 하나의 결로 바라보면서 영하를 상준과 동일한 처지의 개구리라고 오해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물론 영하 역시 느닷없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상준과 달리 가해자의 공모자로서 위치한다. LP판에 묻은 피의 흔적과 욕실의 락스 냄새를 지우고, 그리고 성아가 홀로 떠나는 모습을 블랙박스 영상으로 확인한 순간에 그는 자신의 펜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영하의 선택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숲의 유혹, 분명,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없었던 것이 된다.

그 침묵의 대가는 성아의 귀환이었다. 성아가 1년 만에 다시 펜션에 돌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성아에게 펜션은 아무도 없는 숲속이기 때문이다. 큰 나무가 쓰러져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곳, 그렇기에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욕망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 그것이 성아가 펜션을 숲처럼 꾸미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하가 침묵한 1년은 성아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아는 영하를 자신의 공모자로 삼는다. 영하는 성아가 벌인 사건 외부에 존재했지만, 그와 연루됨으로써 가해자의 일부가 된다. 그는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개구리를 외면한 자, 그렇기에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이고,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이다. 영하의 자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사이 어디쯤이다.

상준의 에피소드에서 영하와 유사한 인물을 찾는다면, 영하는 피해자를 외면했던 자들, 아니 상준 가족의 불행을 자신의 권리처럼 굴었던 자들, 심지어 조롱하고 이용했던 자들과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준 가족이 겪는 불행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지만 가족의 삶을 불행의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동력의 일부라는 점에서 ‘가해자의 공모자’인 셈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영하에게, 그리고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귀에는 쿵, 하는 소리가 안 들렸는가, 라고. 지금 당신 손에는 침묵과 외면의 돌이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보통사람

영하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는 몇번이고 가해자와 맺은 공모 관계를 끊어낼 기회를 갖지만 그 기회 앞에서 반복해서 머뭇거린다. 성아의 위협이 점점 커질 때마다, 영하는 윤보민(이정은)과 반복해서 마주친다. 또 다른 유혹. 성아가 피묻은 LP판으로 영하를 자신의 공모자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윤보민은 그 반대편에서 그 공모 관계를 끊어낼 기회를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셈이다. 영하를 사이에 둔 보민과 성아의 힘겨루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보민과 성아의 대립 관계가 단지 경찰과 살인자라는 신분상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젊은 시절의 윤보민이 상준과 함께 감옥의 지향철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녀의 얼굴에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슬쩍 새겨진다. 그 표정에는 경찰로서 느끼는 흥미 이상의 정감이 있다. 어쩌면 이는 (보민의 말을 빌린다면) “재밌는 놀이의 술래”로서 느끼는 흥분감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즉, 보민은 경찰이라서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살인사건에 매혹된 자신의 욕망을 (합법적으로) 분출하기 위해 경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보민은 성아와 상반된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두 사람은 ‘재밌는 놀이’로서 살인사건을 대한다는 점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다르면서도 같다.

영하는 보민과 성아가 각각 내민 손길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머뭇거린다. 영하가 머뭇거림을 멈추고 성아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전환의 계기는 멧돼지 에피소드부터일 것이다. 영하는 불안이 불러낸 멧돼지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이 장면은 성아가 아내와 겹쳐지며 자신을 유혹했던 판타지와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하는 그제야 자신이 내뱉었던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쳤을 것이다. 멧돼지가 나타나면 자기 집 하나만 위험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어린 시현의 죽음을 외면했던 그의 (그릇된) 선택은 가족과 친구, 이웃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영하와 유사한 선택을 한 이는 상준의 아들 기호(찬열)다. 레이크뷰 모텔에서 사건이 있던 날 밤, 기호와 마주친 지향철의 경고. 눈 감고 귀 막아. 그 지시에 따른 대가로 찬열의 가족은 수렁에 빠진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서 영하는 죄책감을 떠안음으로써, 달리 말해 자신이 가해자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성아와 맺은 공모 관계를 끊는다. 영하는 영화 내내 누군가의 공모자로 자리한다. 다만, 그 공모의 대상이 바뀔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공모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영하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단순한 구도의 작품에서 벗어난다. 세상이 굴러가는 방향을 결정짓는 힘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그들과 공모 관계를 맺는 회색지대의 사람들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그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영하는 지키기 위해 싸웠다. 펜션을, 가족을, 친구를, 그리고 개구리가 되지 않는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는 그 싸움의 끝에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인물인 기호를 만나고, 끝까지 그의 편에 선다. 어쩌면 이 회색지대야말로 보민이 말하는 ‘보통사람’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하거나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때로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하는 보통사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영하의 각성을 통해 (다시 한번 보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끝내 관객에게 남겨진 질문은, 당신은 누구와 공모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공모자일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 가해자든, 피해자든.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때, 또는 누군가의 고통받는 얼굴을 마주할 때,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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