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봤던 신기한 영상이 요즘도 종종 생각난다. ‘딥페이크의 긍정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영상에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활짝 웃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늘 엄숙하고 어딘가 경직된 표정으로 기억되던 독립유공자들의 (상상 속) 미소를 보니 오랜 지인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한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날 이후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딱딱한 얼굴보다는 수줍은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퍼진다.
살아 움직이는 영상은 이토록 강력하다. 물론 그게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2013) 개봉 후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목소리가 링컨의 목소리로 기억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링컨 대통령의 육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가 재현한 링컨의 목소리, 동작, 표정은 현실을 덮어씌울 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 중요한 건 정보의 진위가 아니다. 그걸 진짜라고 느낄 만한 감각이 때론 진실을 손쉽게 압도한다. 감각이 사실 위로 덧칠되는 것을 오랜 시간 방치한다면 어느새 진실 따윈 하찮아질지도 모른다. 영화학자들이 영화의 강력한 설득력, 프로파간다적인 요소를 경계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AI 기술을 활용한 딥페이크 영상에 대한 우려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왔을 때, 그 기술의 위험성이 인지되었을 때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말 중 하나다. ‘어떤’ 기술이냐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라는 원론적이고 상식적인 견해.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기술은 도구다. 누구의 손에 들리냐에 따라 요리하는 칼이 될 수도, 사람을 해치는 흉기로 변모할 수도 있는 건 당연한 사실. 다소 극단적인 예로 인류가 핵에너지를 손에 넣었을 때 문제의 방점을 어디에 찍을 것인가가 있었다. 인간 복제, 유전자 조작 기술 등 위험성을 통제하기 힘든 기술들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 ‘기술은 죄가 없다’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사안이라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 같은 영화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동시에 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는 자유의 범주를 설정해준다. 테두리 없는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AI가 발견한 미지의 대륙, 새로운 영상기술의 테두리를 설정하는 중이다. 조심하되 배척해선 곤란하고, 두려워하되 경배해선 안된다. 그 시발점에서 <씨네21> 역시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한다. 영화란 무엇인가. 수많은 답이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엔 ‘배우의 얼굴, 인간의 표정’이라 말하고 싶다. 찍는 영화에서 그리는 영화로 넘어가는 흐름 속에 최후의 보루가 배우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정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 철옹성 같은 장벽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딥페이크는 ‘얼굴의 스펙터클’마저 정복할 수 있을까.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구분하기 힘든 두근거림 속에 문을 두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