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프로그램의 경향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경향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늘 그렇게 생각해 왔고 대체로는 경향보다는 지향을 강조해 왔다(이 지면의 소재와 관련된 올해의 실무적 지향이라면, 작년에 비해 비전 섹션을 10편에서 12편으로 다시 늘렸다는 점이다. 독립영화 감독들과 신인 감독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다만, 경향 면에서 올해의 경우에는 말해볼 만한 색다른 것이 있는 것 같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전부 모아 놓고 보니 어떤 경향 한 가지가 보인다. 물론 여기 모인 작품들 사이에서 그어진 우연의 선일 수도 있겠지만, 경향이란 어차피 그런 발생을 두고 하는 말 아니던가. ‘다양한 여성 인물형과 출중한 신인 여배우들의 출현’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너무 확실하고 많아서 다소 놀라는 중이다. 뉴 커런츠 섹션의 한국 작품 2편과 비전 섹션 12편을 대상으로 생각해 보았다.
<새벽의 Tango>를 먼저 말해 볼 수 있겠다. 세 명의 여성 인물형이 등장한다. 셋은 너무 다르다. 한 명은 합리적이고, 또 한 명은 헌신적이고, 또 한 명은 이기적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분별없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하고 막연한 성격의 복합성을 하나씩 떼어 내어 별도로 강조하며 각각의 인간형으로 빚어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될 정도다. 대체로는 이 지점에서 도식에 빠지게 되는데, <새벽의 Tango>는 그렇지 않다. 감독의 뛰어난 연기 연출 능력과 함께 이 세 인물을 연기하는 이연(합리성), 권소현(헌신성), 박한솔(이기성)은 각자 맡은 바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연기하여 세 인물 사이의 교감과 실패, 슬픔과 아픔의 이야기를 완성해 낸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도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두 명은 비교적 신인이다. 정보람, 정회린. 정보람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정회린은 <다음 소희>에서 각인될 만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 이들이 맡은 인물들은 각자의 특별한 사연과 이야기를 겪게 되는데, 감정적으로 유능하지 않다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그 미세한 부분들을 무리 없이 포착해 내고 있다.
<그를 마주하는 시간>을 보는 동안에는 강력한 감각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는데, 이 영화의 은근히 강렬한 형식의 힘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저 배우가 빚어내는 뛰어난 연기 때문에도 그렇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성폭력 소재를 다룬 최근의 독립영화들을 몇몇 보아왔는데, <그를 마주하는 시간>은 완전히 다른 가능성과 결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석희라는 이 유능한 배우는 어떤 주제가 아니라 상태를 연기로 설득해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어서 영화 선정을 마친 뒤에 검색을 해보았는데 이미 꽤 많은 사람이 먼저 알고 있었다.
<수연의 선율>에서 수연도 만만치 않다. 수연이라는 인물과 이 역을 맡은 김보민이라는 낯설고 어린 여배우에게는 매혹적인 괴력이 넘친다. 처음에는 그저 좀 불쌍하고 유약한 아이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착각이었다. 소녀는 세상에 쉽게 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들이 가르치고 바라는 만큼 착하지도 않았으며 우리 관객이 알았다고 말할 만큼 해석되지도 않았다. 특별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해, 할머니와 단둘이 살다가 할머니를 여의고 혼자 남게 된 소녀의 생존기라고 종종 설명하곤 하는데, 부질없다고 느낀다. 어둡고 슬프고 연약하고 영악하고 위태로운 그 얼굴과 표정을 보고 있으면 모종의 삶의 실체가 전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돌연 두려움이 밀려온다. 수연은 막강한 인물형이고 김보민은 뛰어난 배우다.
출품작 정보를 의식적으로 미리 보지 않는 편인데, 그렇다 보니 신인 감독 작품들의 경우에는 감독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가 들었는지, 젊은지, 알 길 없는 상황에서, 작품 시사를 마친다. 배우도 때때로 마찬가지다. 때로는 무지와 무식이 작동하는데, <환희의 얼굴>에서 환희를 맡은 배우를 보는 내내 <지옥만세>의 그녀를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배우로서는 성공한 셈이 아닐까. 임오정 감독의 화제작 <지옥만세>에서 학교 폭력을 일삼았으나 사이비 종교에 귀의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역을 맡았던 배우 정이주는 <지옥만세>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였고, <환희의 얼굴>에서도 역시 뛰어난 연기를 보인다. 단편소설 같은 네 개의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그녀는 여러 가지 표정을 짓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같은 표정을 거의 짓지 않는다. 환희 역을 맡은 정이주는 과장하지 않으면서 다중의 정체성을 보유하는 신기를 발휘한다.
<허밍>의 주연 배우 박서윤은 작년에 뉴 커런츠 섹션 작품 <그 여름날의 거짓말>로 부산에 왔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왔다. 사실 그녀는 단편 영화계의 샛별 같은 존재였다. 개인적으로는 단편 <시체들의 아침>, <여고생의 기묘한 자율 학습> 등을 보고 매력을 느꼈다. <허밍>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 즉 1년 전 세상을 떠난 어린 여배우이자 여고생은 사실 잡히지 않는 인물이다. 그녀는 우리 관객에게 과거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하다. 박서윤이 특별해 보이는 건 그런 애매하고도 정체불명인 역할을 하는데도 인물의 생생함은 내내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에서 배우 원향라와 그녀가 연기하는 미주는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는 미주가 섀도복싱을 하는 장면을 첫 손에 꼽고 싶다. 박송열-원향라 커플은 <가끔 구름>,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로 독립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감독-배우 커플이지만, 원향라의 뚝심 있는 연기는 아직 덜 알려진 것 같다. 박송열의 영화 속에서 원향라가 맡는 역할은 지독하게 매력적이거나 멋진 것과는 완전히 반대여서 늘 조금은 심심한 편인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행동하고 말할 때마다 어떤 의지나 신념이나 도덕 같은 것들이 전해져서 승복하게 된다. 신뢰가 가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섀도복싱을 하는 미주는 그 자체로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화신인 것처럼 느껴져서 감동적이다.
<파동>의 박가영도 빼놓을 수 없겠다. 박가영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독립영화계에서는 뛰어난 연기로 인지도를 넓혀 왔다. 특유의 차분하고도 단단한 연기력을 지닌 좋은 배우다. <파동>을 보며 이런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배우 입장에서 꽤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어떤 행위를 따라가고, 기억을 좇고, 환상을 출몰시켜 나간다. 이런 경우 배우는 연기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고 우린 묻게 되지만, 박가영은 그 추상성을 몸으로 체현해 내는 드문 성취를 이룬다.
<봄밤>의 한예리와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공민정이 기성 배우가 아니었다면, <인서트>의 문혜인과 <홍이>와 <아이 엠 러브>의 장선이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기존 수상자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이름과 성취도 여기 덧붙여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