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를 넘어 동시대의 위대한 시네아스트로 인정받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수십 편의 영화에는 그의 인장이 확연히 박혀 있지만, 그의 영화를 언어로 풀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잡히지 않는 인물과 불안, 기어코 그것을 포착하는 순간의 짜릿함은 그래서 더욱 커진다. 신작을 집중적으로 쏟아낸 올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그의 영화를, 쉬운 해독을 허용하지 않는 몇 가지 코드를 중심으로 엮어본다.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장르
장르의 대가들이 그러하듯, 구로사와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의 호러, 그의 스릴러의 피부는 손을 대면 시릴 정도로 차갑지만, 그 아래 흐르는 뜨거운 피는 영화에 대한 열정에서 기인한다. 공식적인 데뷔작 <간다가와 음란전쟁>에서 장 뤽 고다르의 이름을 대놓고 표기하고 자크 리베트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던 청년이 장르에 진입해 자기 이름의 색깔을 매번 진하게 채색해온 과정은 바야흐로 한 작가의 세계를 이루었다. 일반적인 의미의 장르명을 붙이는 건 맞지 않은 까닭에, 그의 영화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불러야 할 것이다. 호러든, 스릴러든, 드라마든 그렇게 분류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장르쯤은 훌쩍 초월한 세계. 그러므로 간혹 실패한 시도로 평가받는, 예를 들면 <로프트> 같은 영화를 폄하하는 우를 범하면 안된다. 그럴 때, 양식화된 영화인 <거대한 환영>이나 <카리스마> 등도 추상적이지 아닌 게 된다. 구로사와의 장르는 그의 영화 세계 전체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호러의 작가주의가 부흥한 21세기,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장르는 사뭇 예언적이기까지 하다.
갇히다 | 구로사와의 모든 인물은 갇혀 있다. 누군가가 그를 가두거나 반대로 <큐어>에서처럼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한다. 때론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의 악(마)처럼 공간에 눌어붙어 지배한다. 갇힌 인물만 있을 뿐,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사이를 가르는 선은 흐릿하다, 언제나 무채색 톤을 유지하는 그의 영화처럼 말이다.
갇힌 소년의 구출기로 시작했던 구로사와는 자기 영화의 리메이크인 신작 <뱀의 길>에서 나쁜 놈들을 다시 가둬놓는다. 귀신조차 한 공간 속에 고집스럽게 머무는데, <절규>의 소리치는 귀신은 역사적 의미마저 득한다. <회로>의 인물들은 마침내 재난과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지만, 대해에 떠 있는 배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즉 갇힌 공간으로서의 일본에 다름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벗어나려는 <스파이의 아내>의 인물이 실패하는 건 필연이 다. 제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미치는 것뿐이다. 제목 그대로 활보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산책하는 침략자>는 역으로 구로사와의 인물의 감금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공간에 갇힌 몸은 (지구인의 몸에 기어든 외계인처럼) 기실 몸 안에 깃든 어두운 영혼의 재현인 거다. 죽음과 환영에 사로잡힌채 저택 안에 머무는 <은판 위의 여인>의 인물들처럼, 죽지 않는 한 자유로울 수 없다.
불안하다 | 일본 고전기 영화의 확고한 정서와 감성은 구로사와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그것을 파괴한다. 그러니까 구로사와가 완성 중인 재팬 누아르는 고전기의 장르와 성격이 다르다. 장르이면서 장르가 아닌 누아르의 정체를 이어받아, 그의 재팬 누아르는 형식이면서 그 자체로 주제를 이룬다. 당연히 그 주제는 불안이다. 20세기 초반, 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의 시간에서 인간들이 느꼈을 불안을 반영한 누아르가 세기말은 물론 21세기의 초로 이어지는 현실, 그게 구로사와의 누아르다. 그 속에서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불안의 원인을 찾거나 그것을 치유할 방안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자의 태도. (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도쿄 소나타> 같은 작품에서조차) 근심하는 척하지 않는 대신 감지하는 걸 영화에 반영하는 쪽이다. 그러므로 정의하기 전에 대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곤 한다. <큐어>의 불가해한 남자에서 보듯 불안과 공허는 분노 비슷한 신과 같아서, 그 운명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요원하다. 간혹 불안은 그의 영화에서 스르륵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벽에 달라붙은 검댕의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끝없이 불안을 재생한다.
여성성의 대두 | 남성적이라는 측면에서 구로사와도 대다수 장르의 생산자와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는 남성이며, 거기에 서린 정서는 자연스레 남성적 체취를 풍겼다. 그러던 그의 영화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중이다. 점점 이동 중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2024년 버전 <뱀의 길>이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게 대표적인 예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에 남성이 개입하는 설정을 여성의 손으로 넘겨준 것이다. 얼핏 남자가 주인공으로 보이는 근작들 <해안가로의 여행>, <산책하는 침략자>, <스파이의 아내>, <지구 끝까지> 등에서 열쇠를 쥔 건 여성이다. 사건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은 유령, 진실에 접근한 자의 깨달음이다. 드디어 여성이 그 역할을 해내는 게 구로사와 영화다(생각해보니 데뷔작에서 소년을 구하는 것도 여성이다). 그녀들은 더 이상 마녀나 저주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구로사와가 희망이란 단어를 함부로 구사하는 걸 좋아하지 않겠지만, 여성 인물이 덜 불안해하는 데서 낯선 미래를 찾게 된다. 역시 구로사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이러한 주제를 형성한 게 아니란 점이다. 그런 억지스러움은 그의 영화가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터득한 이치의 결과가 여성의 영화로 귀결된 것에 가깝다.
쌓아올리다 | 한 다큐멘터리에서 목격한 바, 그는 현장에서 쓰일 각본에 대사 외에 거의 써놓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에 대한 표현도 자제한다.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본의 기계적 실현이 아닌, 현장에서 구축하는 게 그의 영화인 셈이다. 문자에서 느끼지 못할 이미지 특유의 아우라가 그의 영화에서 각별한 연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게 모방하지 못할 경지를 낳는다. 그렇다면 <은판 위의 여인>의 사진작가는 구로사와의 거울일까. 예술의 완성을 향한 작가적 고집과 기술적 완결성에의 헌신은 비슷하지만, 구로사와가 그처럼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관념적인 소재를 다루고 머릿속을 헤집으면서도 그의 영화는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그는 애써 교훈적인 주제를 설파하지 않지만, 그의 영화에서 시대의 기운이 감지된다. 그런 것들이 구로사와 예술의 윤리다. 저예산 B무비에서 출발했던 그를 진정한 예술가로 평가하는 것은, 영화를 다루는 그의 손길이 영화의 육체를 축조해내는 동안 예술로 길을 냈음이다. 그는 여전히 젠체하지 않으며 출발선에 섰을 때처럼 자유롭다. 영화가 열세하니 TV로 돌아서는 현 시류와 달리, 그는 애초에 중단편 작업이나 시리즈의 연출 및 촬영 미디어에 선을 긋지 않았다. 앞서나간 게 아니라 자기 작업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자세다. 끝으로, 영화가 주는 인상이 어둡다고 해서 그를 비관론자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의 영화가 불안을 주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 까닭이다. <밝은 미래>가 아무리 역설적인 제목일지라도, 그가 소년들이 걸어가는 길을 정녕 무심코 바라보기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큐어>보다 더 중요한 도착은 세기말에 연이어 등장했던 <인간 합격>일지도 모른다. 길은 갈 데가 없을 때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