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데일리 2호에서 정한석 프로그래머는 올해 한국영화에 드러나는 경향으로 ‘다양한 여성 인물형과 출중한 신인 여배우들의 출현’을 꼽았다. 그렇다면 어떤 얼굴이 스크린을 환하게 밝혔을까. <씨네21>은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눈에 띄는 여성 배우 3인을 함께 만났다. PCB 공장에서 일하는 세 여자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새벽의 Tango>, 문창과 교수 미투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그를 마주하는 시간>, 주인공 환희와 그의 주변 사람을 멀리서 관찰한 <환희의 얼굴>까지 자기만의 관점으로 영화의 한끗을 완성한 권소현, 석희, 정이주 배우를 만났다.
- 권소현 배우는 <새벽의 Tango>에서 주희를, 석희 배우는 <그를 마주하는 시간>에서 수연을, 정이주 배우는 <환희의 얼굴>에서 환희를 그렸다. 각 인물 별로 어떤 특징을 주요하게 내세웠나.
권소현 <새벽의 Tango>는 탱고를 통해 관계를 배워나가는 세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상처가 있는 친구, 이기적인 친구, 착해보이기만 한 친구가 일터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희가 착해보이 기만 한 친구다. 처음엔 살짝 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주희가 이렇게 선할 수 있는 건 그가 남들보다 책임감의 강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깊은 이해심을 지닌 모습을 잘 드러내고 싶었다
석희 <그를 마주하는 시간>은 제목만 보면 ‘그’가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수연이 자기자신을 마주해간다고 생각했다. 문창과 성폭행 고발 이후 수연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문제를 외면한다.우리 사회에는 피해자가 되기 위해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수연은 관객에게 괴로움을 주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정이주 단편 소설 모음집 같은 <환희의 얼굴>은 총 4개의 장으로 이뤄져있 다. 장마다 환희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 각 에피소드는 유사한 듯 연결되지 않는다. 현실 같기도 하고 상상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 공백을 내 마음대로 채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해석을 넣기 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희의 감정과 행동에 집중하려 했다. 관객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길 바랐다.
- 세 캐릭터의 공통점은 모두 묘하게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이들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음을 관객에게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공들인 장면은 무엇인가.
정이주 첫 번째 챕터 ‘소설가의 집’ 첫 장면이 떠오른다. 상담실에서 남영과 12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게 원테이크다. (일동 탄성) 너무너무 길었다. 이 장면을 위해 남영 역의 김시은 배우와 연습도 여러 번 하고 이제한 감독님께 디테일도 많이 물었다. 체력적으로 여러 번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배우로서 환희의 여러 면모를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는 게 너무 행복했다.
석희 회의실에서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전달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촬영하는데 정말 심장 떨렸다. 수연이 속내를 처음으로 털어 놓는 순간이지만 그 조차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책임감을 많이 느꼈다. 에둘러 자신을 보호하려는 태세 변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려 신경 썼다.
권소현 공장에서 사고로 손을 다친 현우의 이야기를 들은 주희가 지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내가 책임지고 싶다고. 선하게만 보이던 주희가 사실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신을 찍기 전까지 사실 나도 주희에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장면을 기점으로 인물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 지점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이 외에 공들인 건 아무래도 땅고 추는 모든 장면이 아닐까?(웃음)
- 연기의 바탕이 되는 가치관이 있다면.석희 최근 연출자와 배우간의 이미지 공유가 정말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 혼자만의 판단에 빠져서 작품이 의도한 방향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 그런 날이면 정말 괴롭다. 그래서 나를 너무 믿지 말고 감독님과 더 적극적으로 공유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를 마주한 시간>에서도 감독님과 소통을 많이 하면서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조절해 나가려 했다.
권소현 <그 겨울, 나는> 이후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바로 핍진성이다. 여러 작품을 통해 실제 나와 다른 인물을 마주하지만 그 사이에 어떻게든 진짜 같고 그럴 듯함을 보여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계속 “이게 진짜 같아?” 물으며 검열하기도 하고. <새벽의 Tango>에서는 주희가세 여자의 관계 안에서 너무 붕 떠 보이지 않게 연기하려 했다. 다른 인물과의 균형을 이루는 과정도 필요하다.
정이주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가 있다. 바로 사람과 삶. 연기도 영화를 만드는 것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잘 살아가는 게 정말 중요하다. 카메라 앞에서는 캐릭터가 되어 잘 사는 게 중요하고, 독립영화의 작은 프로덕션에서 서로를 돌보며 함께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너무 귀한 만큼 모두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라는 감각이 독립영화의 큰 자산이다.
- 마지막으로 다음에 꼭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마음껏 피력해보자.
권소현 그동안 아프고 착하고 슬픈 역할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번엔 살인마. (웃음)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
석희 얼마 전 복싱 관련한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글쎄 내가 몸을 너무 잘쓰더라. 엄청 멋진 액션 작품 하고 싶다.
정이주 그럼 나는 히어로물! 광활한 그린스크린을 점령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