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카구치 겐타로입니다.” 그의 능숙한 한국어 인사는 극 중 홍(이세영)에게 한국어를 배우던 준고를 떠올리게 한다. 2010년 모델로 데뷔한 후 배우로 영역을 넓힌 사카구치 겐타로는 일본에서 드라마, 영화를 바쁘게 오가며 활동 중이다. 많은 한국 관객들에게 로맨스 장르에서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지만 <헬 독스>에서 사이코패스 야쿠자 역을 맡아 지난해 제46회 일본 아카데미에서 우수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선 분위기를 바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쿄를 찾은 홍과 사랑에 빠지는 준고를 연기한다. 말보다 눈빛으로, 온기 가득한 손길로 준고는 홍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출연 제안을 받고 대본을 열심히 읽던 차였다. 작품에서 내가 일본 배우로서 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장 스태프가 전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과연 내가 잘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데 문현성 감독님을 만나뵀을 때 작품과 준고에 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셨고,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 결심을 굳혔다.
- 문현성 감독과의 대화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본이 완벽하게 나오지 않았을 무렵 대사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준고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신이 정말 많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일본에선 ‘아이시테루’, ‘스키’로 표현하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와닿는다. ‘아이시테루’가 상대적으로 큰 에너지와 마음을 필요로 하는데도 준고가 너무 가볍게 자주 말한다고 느꼈다. ‘사랑해’를 좀 덜어내자고 말했더니 감독님과 이세영 배우는 오히려 늘렸으면 좋겠다고, 준고가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로 인해 의견이 갈린 것일 텐데 홍과 준고도 이렇게 의견이 다른 순간을 종종 맞이했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준고의 대사와 관련해서는 나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주셨다.
- 배우가 바라본 준고는 어떤 인물이었나.준고는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한다, 미안하다와 같은 말도 잘 하지 못한다. 준고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홍과 같이 지내려면 돈도 필요해 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기하면서 준고가 상황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준고가 대단하다고 여겼다. 헤어진 지 5년이 지났음에도 상대를 계속 마음에 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홍을 향한 준고의 깊은 마음을 존경하고, 많이 배우면서 연기했다.
- 5년 전과 후 준고의 변화가 잘 드러났다.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
현재 시점의 장면들을 먼저 찍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홍에게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준고의 슬픔 안엔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눈앞에 드러내보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준고의 표정,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과거의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두 사람의 과거가 행복해 보일수록 서먹한 현재와의 대비가 클 것이라는 점도 계속 염두에 두며 연기했다.
- 준고와 홍이 우연히 마주친 날, 둘은 서로 첫눈에 반한 걸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실 첫눈에 반하는 것에도 여러 경우가 있다. 번개에 맞은 것처럼 상대에게 급격하게 빠져들 수도 있지만 준고와 홍은 좀 다르다. 보고 있으면 두 사람에게선 결국 사랑에 빠질 것 같다, 결혼할 것 같다는 분위기가 풍긴다. 그러니 처음 호감을 느낀 뒤로 연인이 된 건 둘에게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었을까. 그런 절대적인 느낌이 있었다.
- 먼저 공개된 1, 2화에서 인상적인 순간을 하나 꼽는다면.
알맞은 답은 아니겠지만 준고와 홍이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고 뒷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며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신이 있다. 사실 그 뒤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전부 스태프들이다. 그 장면을 보면 스태프들이 생각나서 좋아한다. (웃음) 또 다른 하나는 준고와 홍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다. 준고가 5년간 계속 홍을 사랑해왔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다만 이 순간엔 대사가 없다. 어떤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표정으로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무척 신경을 썼다.
- 준고에 관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답변해주는 느낌이다. 실제 연기에 임할 때도 그런가.
그렇다. 어떤 인물을 연기할 때 ‘꼭 그 인물이 돼야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준고를 연기할 때도 준고 자체가 되기보다는 가장 가까이서 준고를 바라보고 이해해주는 사람의 위치에 있으려고 했다. 특정 대사나 행동을 할 때도 내게 대입하기보다는 준고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 생각했었고 질문에 답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관찰자적 입장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 한국에서 한국 제작진과 함께한 경험은 어땠나. 일본의 제작 환경과는 무엇이 다르던가.
한국의 촬영 현장을 겪은 게 처음이라 일반화해 이야기하긴 어렵다. 대신 문 감독님의 팀과 함께한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신선한 경험을 많이 했다. 액션 신을 예로 들자면, 일본에선 다치지 않기 위해 액션 호흡을 많이 맞춘다. 덕분에 위험성은 낮출 수 있지만 자칫하면 액션이 댄스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 문 감독님의 팀은 손에 땀을 쥐는 리얼한 액션을 찍고 싶어 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감정의 흔들림이 잦아서 슬픈 신은 아주 낮은 온도로, 밝은 신은 아주 높은 온도로 촬영해야 했다. 연습으로 인해 감정이 무뎌질 것을 우려해 감독님은 그때그때 감정을 잡아서 찍길 선호하셨다. 사전 테스트를 거의 하지 않은 상태로 다양한 각도에서 배우의 감정을 잡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었고 그만큼 공부가 많이 됐다.
-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비롯해 영화 <남은 인생 10년> 등 출연한 로맨스 장르 작품들이 한국에서도 반응이 무척 좋았다. 로맨스 장르에 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잠시 고민하다) 사랑받는 것. 캐릭터로서도, 그리고 현장의 배우로서도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카메라를 통해 비쳐지는 캐릭터도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단순히 드라마나 러브 스토리에 국한된 건 아니고 여러 장르, 여러 장면에서 전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 넷플릭스 시리즈 <이별, 그 뒤에도>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다.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왜 그렇게 슬픈 역할을 많이 맡냐’는 것이다. 극 중 좋아하는 상대와 헤어지거나 죽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나도 왜 이런 역할을 많이 맡을까 생각해봤는데 확실한 건 내 입장에선 다 다른 인간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해왔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맡은 나루세는 심장병으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이식받은 심장의 주인이 사랑했던 사람을 자신도 사랑하게 된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상대에게 끌림을 느끼면서 나루세는 당황스러워한다. 이 작품은 인물 각각의 서사를 지닌 휴먼 러브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