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볼 수 있다면 행복할까.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의 준우(정재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날부터 가까운 미래에 누군가가 죽는 장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에게서 생기를 앗아갔다. 이번에 준우가 본 예지는 오늘 밤 12시, 정윤(박주현)이 칼에 찔려 쓰러지는 순간이다. 가까스로 사건 발생 6시간 전에 정윤을 만난 준우는 예지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그의 곁을 지킨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는 NCT 127 재현의 첫 스크린 데뷔작이자 배우 정재현의 시작점이다. 버석한 얼굴에 무채색의 차림으로 일상의 거리를 걷는 준우를 통해 그는 자기만의 보폭과 호흡으로 연기할 준비를 마쳤음을 분명히 알렸다.
- 해외 스케줄을 위해 오른 비행기 안에서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출연 결정을 빠르게 내렸다고 들었다. 무엇에 끌렸나.
그때가 새벽이라 좀 피곤했는데도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다. 점점 읽는 속도가 붙는 게 느껴져 신기했다. 연기에 관심이 생긴 이후부터 뻔하지 않은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준우가 딱 그런 친구여서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다.
- 어떤 점 때문에 준우가 뻔하지 않다고 느낀 걸까.
예지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묘했다. 시나리오를 읽을수록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아는 사람만의 슬픔과 외로움이 진하게 전해졌는데, 그 역시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이 아니다 보니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 비밀스러운 준우는 배우에게 공백을 채우는 작업을 요구하는 인물이다. 캐릭터에 살을 붙여가는 과정은 어땠나.
먼저 상상해보고 이윤석 감독님께 아주 많은 질문을 했다. 준우가 죽음을 볼 때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닌지 주변인들과 관계는 어떠한지 등 사소한 점까지 다 여쭤봤는데 그때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답변을 해주셨다. 정보가 쌓일수록 준우가 가깝게 느껴졌고 한 단계씩 나아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이 참 신선하고 즐거웠다.
- 예언자인지 아닌지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핵심인 캐릭터를 담담한 표정과 행동으로 잘 살렸다. 그러기까지 긴 고민의 시간을 거쳤을 것 같다.
담담해 보이지만 사실 속으론 그렇지 않은 연기라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시도했는데 걷는 신이 많아서 감독님의 디렉션 아래 준우만의 정적인 걸음걸이를 만들어 그의 심리를 표현하려고 했다. 감독님이 도움이 될 거라며 추천해주신 블러(Blur)의 앨범을 두루 들으며 시나리오를 반복해 읽기도 했다. 이렇게 했을 때 인물의 감정이 다양하게 그려진다는 걸 알게 돼 나만의 대본 분석법을 발견했다.
- 내색하진 않지만 준우는 결연한 마음으로 정윤과 동행하기로 선택한 듯하다. 정윤에 대한 준우의 감정을 어떻게 해석했나.
예지로 본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계속 실패한 준우에게 정윤은 마지막 기회처럼 다가왔을 거다. 그만큼 정윤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컸을 테고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는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 양가적 면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었고 준우의 캐릭터상 양쪽 면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누르면서 연기했다.
- 첫 촬영 날 어떤 신을 찍었는지 기억하나.
물론이다. 정윤에게 예지력을 설명하는 카페 신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인의 미래가 보이고 정윤의 죽음도 봤다는 얘길 해야 하는 장면이라 대사에 대한 부담이 컸다. 그런 만큼 틀리지 않으려고 대사를 신경 써서 외워 갔다. 같은 신을 아주 다양한 구도로 찍는 과정에서 영화 촬영이 이렇게 이뤄지는지를 배웠다.
- 음악 작업은 음절 하나하나를 따로 녹음해 각각의 느낌을 살릴 수 있지만 영화 작업에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대사를 처리할 수 없다. 이 차이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나. 대사를 어떤 식으로 외웠는지도 궁금하다.
녹음할 때 한 구절을 한번에 부르는 경우도 많아서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작품을 하는 동안 영화 작업을 음악 작업과 비교해 생각하지 않았고 가수로서의 내 모습이 떠오르지도 않았던 것 같아 신기하다. 원래 암기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 대사는 곧잘 외운다. (웃음) 눈으로 읽고 말로 뱉는 걸 반복하면서 대사를 입에 붙이는 과정을 거쳤다.
- 횡단보도에서 만난 정윤에게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라고 말하는 오프닝 시퀀스가 준우의 첫 등장 신이다. 제목과 같아 더욱 중요한 대사를 어떻게 살리고자 했나.
그 한 문장이 관객의 귀에 선명하게 각인되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임팩트를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말의 속도에 예민하게 신경 썼다. 그래서 현장에서 빠른 버전, 느린 버전으로 다 찍고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이렇게 끊어서도 가봤다. 여러 테이크 끝에 중요한 건 장면의 의도라는 걸 깨달았다. 강압적인 느낌이 빠지고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강조되어야 하는 신이라 그런 느낌이 들도록 말했더니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 후반부에 중요한 주차장 일대일 액션신이 있다. 그동안 멤버들과 춤의 합을 무수히 맞춰왔지만 배우로서 액션의 합을 맞추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했겠다.
진지한 액션신을 경험한 적이 없다 보니 때리는 방법, 무기 잡는 법, 맞는 자세 같은 기본적인 걸 몰라 애를 먹었다.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무술감독님께 사소한 것까지 질문했고 현장에서 알려주신 가르침을 전부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테이크를 예상보다 많이 가지 않고 감독님께 오케이를 받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관객의 함성과 응원으로 시작하는 무대와 달리 영화 현장은 슛 들어가는 순간 조용해진다. 그래서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 서 있을 때 혼자가 된 것 같아 두렵다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본인의 경우는 어땠나.
촬영감독님과 많은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까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긴장되긴 했지만 그런 데 휩쓸리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엄청난 집중력이 샘솟는 편인데 촬영하는 한달 내내 그랬다. 내가 연기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셈이다.
- 무엇이 연기를 계속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지 궁금하다.
재밌다. 아직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초심자이지만 이러한 기분이 들게 하는 무언가가 내게 얼마나 있을지 생각하면 연기가 소중하게 느껴져 놓치고 싶지 않다. 특히 작품 준비 과정이 신선하고 즐겁다. 살면서 특정 상황이나 한 사람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연구할 일이 극히 드문데 연기를 통해 귀한 경험을 하고 있다.
- 그동안 작사, 작곡한 곡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찾아보니 창작자로서 정재현은 주변에서 주로 영감을 받는 편인 것 같다.
그렇다. 일상에서 느낀 감정, 실제로 겪은 경험에 대해 적은 메모장을 꺼내 보거나 찍은 사진을 찾아 보면서 작업해왔다. 요새는 상상도 많이 한다.
-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를 촬영하며 든 생각이나 느낀 감정의 조각을 나눠준다면.
준우는 정윤에게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고 묵묵한 동행자를 자처한다. 이런 준우의 존재가 혹은 둘이 나란히 걷는 장면이 자기 삶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관객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걷는 신을 찍으면서 했다.
-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노트북> <라라랜드> <싱 스트리트> <베이비 드라이버> 등을 좋아한다고 알려졌던데 사실 확인을 우선 부탁한다.
맞다. 5~6년 전일 거다. 몽글몽글한 느낌의 멜로영화, 음악영화에 꽂힌 때에 질문에 언급한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얘기했었다. 그 시기에 ‘비포 시리즈’를 좋아한다고도 말했고.
- 비포 시리즈는 따로 물어보려고 했는데 먼저 얘길 꺼내줘 고맙다. (웃음) 준우와 정윤, 비포 시리즈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은 걷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말이 적고 많고 차이가 있기도 하다. 비포 시리즈는 참 놀랍고 재밌는 영화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제시와 셀린의 대화가 지루한 구간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직접 대사를 쓴 영향이 있을 거다.
그렇구나! 지금 알았다. 너무 멋있다.
- 비포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단골 질문을 하겠다. 몇편을 가장 좋아하나.
1편. <비포 선라이즈>만의 낭만을 사랑한다.
- 최근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는 어떤 작품이 있나.
극장에서 본 <웡카>. OTT를 주로 이용하긴 하지만 극장은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공간 중 하나다. 영화는 내가 꾸준히 좋아하는 것 중 하나고. 영화 취향에 대해 말하자면 가리는 장르 같은 건 없다. 공포, 스릴러 다 잘 본다.
- 많이 보는 만큼 하고 싶은 역할 리스트도 풍성할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캐릭터를 맡고 싶나.
앞서 말한 음악영화도 좋고, 요새는 특정 캐릭터보단 내게 주어지는 역할을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한 캐릭터를 파면서 내게 계속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라는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보고 싶다.
- 준우처럼 예지력이 생긴다면 미래의 어떤 순간을 보고 싶나.
준우로 짧게 살아본 바 그 어떤 순간도 미리 보고 싶지 않다. 예지력을 얻을 기회가 와도 포기할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삶을 꾸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