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위세를 떨치던 삼합회라도 지레 겁을 먹고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공간. 지저분하고 낡은 외관 속에 전선과 수도관, 방과 계단이 암세포처럼 무한 증식하던 공간. <성항기병> <아비정전>부터 사이버펑크 장르에 이르기까지 구룡성채는 대중문화에 아이코닉한 건축물이었다. 정바오루이 감독은 미로 같은 공간 속에 홍콩 액션영화의 짙은 노스탤지어를 담아냈다. 도술에 가까운 무예로 좁은 성채 안을 이리저리 활강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쉽게 80년대 홍콩영화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 정바오루이 감독은 여야의 원작 만화를 읽자마자 “제아무리 어려워도 쉽게 이 프로젝트를 놓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다짐을 했다.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그와 만나 <구룡성채: 무법지대>에 담긴 감독의 야심을 들어보았다.
- 구룡성채라는 공간은 흡사 영화의 주연처럼 작동한다. 1993년 철거된 구룡성채를 영화에서 재현하기 위해 어떤 점에 집중했나.
처음엔 방대한 분량의 자료 수집에 집중했다. 인터넷에 아카이빙된 자료부터 과거 외신이 촬영한 사진까지 구룡성채 내외부를 복각하기 위한 자료를 전부 수집했다. 프로덕션디자인에 들어간 뒤에는 극단적인 방법을 활용했다. 처음에는 도면에 맞춰 세트를 짓다가, 갑작스럽게 미술팀에 요청하여 도면을 거치지 않고 벽을 뚫고 2층을 연결하거나, 계단이나 새로운 층 같은 공간을 추가로 설계했다.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공간을 덕지덕지 덧대는 식이었다. 사실 성채라는 구조 자체가 이성적인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편리와 요구에 의해 증식된 어지러운 건축물이다.
- 갱들간의 전투는 홍콩 누아르의 단골 소재다. 하지만 액션 연출 방식은 오히려 무협영화나 판타지 사극과 유사하다. 이런 방식의 액션 연출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무협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원작의 만화적인 측면을 부각하고자 했다. 각 인물이 사용하는 무술의 기교를 부각하거나 상대로부터 타격당했을 때 좀더 과장된 반응을 요구했다. 가령 임봉이 연기한 찬록쿤의 경우 상대에게 일격을 당하자마자 공중에 붕 떠서 몇 바퀴를 빙빙 돈다. 그런 부분에서 관객들이 무협의 액션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 홍콩 액션의 아이콘이었던 배우 홍금보의 이름이 눈에 띈다. 70살이 넘어서도 녹슬지 않은 액션을 선보였다. 캐스팅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홍금보 선생님에게 캐스팅이라는 말 자체가 실례다. (웃음) 이번 작품에 함께하시는 게 영광일 따름이다. 홍금보 선생님이 70살이 넘으셨고, 무릎도 안 좋아서 액션 연출을 자제하려 했다. 특히 촬영하면서 오래 서 있거나 멀리 걸어야 하는 장면들을 줄여서 무릎에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선생님이 액션영화를 할 때는 자신을 배려하지 말고 원하는 액션을 최대한 구현하자고 말씀하셔서 크게 감동을 했다. 특히 카메라 앞에만 서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과거의 그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셨다.
- 자막으로 묘사한 구룡성채는 무법과 폭력, 살인과 마약이 판치는 슬럼이다. 하지만 설명과 달리 영화에서는 악행이 부각되지 않는다.
어릴 때 영화를 통해 접했던 구룡성채는 위험한 슬럼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고정관념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실제 거주자들 혹은 흑사회의 일원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범죄로만 가득 찬 곳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많고, 내부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나름의 규칙도 존재한다. 무분별하게 보이는 공간도 사창 권역, 마약 권역, 거주 권역 등 암묵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흑사회의 손을 떠난 지역이었다. 오히려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한 공장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았던 구룡성채 거주자와 반대로 공장 설립에 필요한 면허 비용이 부담되는 공장주가 공생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동시에 구룡성채는 과도기적 공간이다. 거주자들도 경제적 자립에 성공하면 성채를 떠나길 원한다. 설령 자기 세대에 떠나지 못해도 다음 세대가 대를 물려서 성채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정부가 철거 계획을 발표했을 때 오히려 거주자들 사이에선 반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 주인공 찬록쿤은 무국적 난민이며 연고도 없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반환을 앞둔 90년대 초반의 홍콩과 찬록쿤의 처지가 겹쳐 보인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이 중영공동선언을 체결하면서 홍콩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결심한다. 홍콩 사람들이 자신이 영국인인가 중국인인가 정체성에 깊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이라고 여기기에는 영주권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중국인이라고 치기엔 당대 중국인들과 생활 양식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주인공 찬록쿤이 홍콩에 도착하여 신분증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홍콩 사람들 역시 중국으로 반환되어도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상황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 진혜한의 <춤춰요>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퀸스부터 엔딩까지. 90년대에 대한 짙은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다. 그리움의 정서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
오프닝보다는 엔딩을 강조하고 싶다.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구룡성채가 철거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엔딩 시퀸스를 편집하면서 당시 구룡성채에서 거주했던 고령자들을 보여주려 했다. 그 공간에서 이뤄졌던 생활과 문화 그리고 공동체적 관계들이 어쩔 수 없는 시류에 쓸려 결별을 맞이해야 한다. 앞으로 인생에서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아쉬운 마음이었다.
- 영화에서 벌어지는 복수는 30년에 걸쳐 대물림됐다. 우연하게도 영화 속 배경인 1993년과 영화가 제작된 2024년은 31년의 차이가 난다.
홍콩 역시 많은 변화를 거쳤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었던 ‘30년에 걸친 복수’라는 말 저편에는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다음 세대까지 그것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이 깔려 있다. 주인공 찬록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원한 때문에 다음 세대가 그 짐을 짊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