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폐막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로렌스 아부 함단의 <하늘의 일기>와 일본의 필름 작가 니시카와 도모나리의 <빛, 소음, 연기, 그리고 빛, 소음, 연기>를 같은 섹션에 상영했다. 이스라엘이 침공한 레바논 상공의 긴급한 기록을 담아낸 비디오 에세이와 일본 여름 축제의 불꽃놀이를 촬영한 16mm 핸드메이드 필름 작업은 일견 별다른 접점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영화는 하늘에서 만난다. 시작도 끝도 없고, 깊이를 확신할 수도 없는 비정형의 대기에서 만난다.
관객들은 상영 순서에 따라 <하늘의 일기>를 본 뒤에 <빛, 소음, 연기, 그리고 빛, 소음, 연기>를 감상한다. 상공에 떠오른 전쟁의 흔적을 눈과 귀에 새겨둔 관객들에게 고요한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의 아름다운 광경과 수많은 사람을 환호하게 만드는 폭발음은 단순한 축제의 기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의 일기>에서 베이루트의 하늘이 폭탄의 굉음과 상공을 오가는 전투기의 연기로 얼룩진 것을 지켜보았다. 불꽃은 놀이의 도구만이 아니라 폭발하는 섬광이기도 하다. 폭발은 시각적 쾌락을 일으키는 강렬한 이미지이면서 삶을 파괴하는 전쟁의 단위이기도 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불꽃놀이를 즐기는 세계와 섬광 같은 폭발에 부서진 세계는 연결된 하늘 아래 있다.
하늘 위의 영화
<하늘의 일기>는 2020년 5월부터 2021년 5월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베이루트 상공을 기록한 짧은 영화다. 이 영화의 연출자인 로렌스 아부 함단은 베이루트 상공의 극심한 소음공해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팬데믹으로 세계가 일시정지 중이던 이 기간에 이스라엘 방위군의 전투기와 무인항공기와 군사용 드론은 레바논의 하늘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의 전투기, 헬리콥터, 드론 및 기타 무인정찰기가 레바논 상공을 침입해 비행하는 것은 2006년에 제정된 유엔 안보리 결의 1701호를 위반하는 군사적 행위라고 한다. 지난 15년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은 2만2천회에 달하는 비행을 포함해 지속적인 소음공해를 일으켜왔다. 아부 함단은 이 기나긴 폭력을 ‘폭발하지 않는 폭탄’이라고 부른다. 이 보이지 않는 폭탄은 위협적인 권력관계를 형성하며 무한히 연장되는 해소되지 않는 유형의 폭탄이다. <하늘의 일기>에서 폭탄은 한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무대 자체가 이미 폭탄의 한 부분이다.
경계선도 주인도 없는 하늘의 광활한 영토는 가해자와 책임자의 얼굴을 은폐하는 전쟁 이미지의 비인간적인 형성 과정과 결탁해, 자연에 새겨진 이해관계를 시각적으로 해소하려는 영화의 열망을 좌절시킨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영화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는 전쟁의 이미지에 포획되어 있다. 영화는 발명된 이래로 모든 전쟁에 입회하고 이미지를 기록했다. 영화는 전쟁의 한 가지 기능에 속해 있다. 그런데 하늘이라는 이 불투명한 비가시의 장소에서도 영화의 역량은 유효할 수 있을까? 폭발과 굉음이 울리는 하늘에서 이미지를 증언해야 할 영화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하늘의 일기>는 비천한 영화적 표면을 매개로 누적된 폭력을 직면하게 한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처럼 매일같이 기록된 하늘의 풍경을 제시하는 일기 형식을 취한다. 일기는 육중한 현실과 사적인 기록을 하나의 표면에서 공유하게 하는 문학적 관습이다. 적잖은 평자들이 이 영화를 두고 무성영화 시대의 ‘도시 교향곡’에 빗대는 ‘대기 교향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분명한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느껴진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시간을 몽타주 형식으로 연결한 작업을 가리키는 용어인 도시 교향곡 영화에서 핵심적인 것은 서사와 산문적인 설명을 최소화하고 탄력적인 몽타주의 언어를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하늘의 일기>는 교향곡의 배경이 되는 무대를 도시에서 하늘로 옮기고, 하루 동안의 시간을 관측하는 리듬을 1년 동안 작성되는 영상일기의 배열로 변환하며, 몽타주의 언어로 도시의 리듬을 전달하던 20세기의 영화를 몽타주가 불가능한 21세기 전쟁의 이미지로 대체한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 시각적인 몽타주는 불가능하다. 화면은 연속된 하늘을 제시할 뿐이고, 제시의 논리는 일기장처럼 각자 다른 날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밖에 없다. 장면은 계속 이어지지만 그것을 전통적인 몽타주의 논리로 환원할 순 없다. 세계의 이미지는 하늘에 있고, 하늘은 숏의 기반이 되는 장소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하늘의 일기>는 몽타주의 불능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두고 화면 내부의 이미지와 내레이션으로 의미를 형성할 순 없다. 우리가 <하늘의 일기>를 본다는 것은 촬영자가 폭격에 휩쓸리지 않고 카메라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아부 함단은 스스로 직접 촬영한 영상과 서로 다른 촬영자들에게서 수집한 영상을 뒤섞어 <하늘의 일기>의 영화적 신체를 구성한다. 이스라엘의 침범을 증언하는 베이루트의 상공은 수많은 공모자의 협력으로 채워진다. 이 영화에는 연출자가 아닌 다른 이들이 촬영한 영상과 다른 이들에게서 빌려온 내레이션의 텍스트가 있다. 이는 그들이 촬영하는 하늘 역시 보이지 않는 다른 것과 공모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아부 함단은 말한다. 레바논 하늘이 고요한 것은 가자 폭격이 심화된 탓이다. 레바논의 대기가 조용한 것은 이스라엘의 항공기와 전투기가 그 음향적 파괴력을 다른 곳에서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하나를 보여주거나 들려주고 있지만, 다른 하나를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작동하는 유일한 몽타주의 논리가 있다면, 바로 이 가시적인 하늘과 비가시적인 하늘이 서로 상호 교류하는 환경의 몽타주일 것이다.
20세기의 몽타주
전쟁은 자연의 외양과 이를 관측하는 영화의 미장센을 변형하고, 변형을 일으키는 역사적 원인을 은폐한다. 20세기의 장뤼크 고다르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촬영하지 못한 영화에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다. 영화는 대량학살을 이미지의 역사에 기입하지 못했다. 반대로 21세기의 영상 환경에서 영화는 모든 것을 촬영하고 기록한다. 영화가 발명된 이래로 가장 많은 장소와 시각에서 영상이 촬영되고 선명한 증거물로 남는다. 그러나 그토록 선명하고 무수한 이미지는 오히려 그 어떤 확실성도 담보하지 않는 범용한 진실의 이미지로 존재할 뿐이다. 영화는 다시 한번, 이미지의 역사에 유효한 표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나치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촬영한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는 구름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항공촬영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비행기의 시점으로 도심을 통과하며 정교하게 축조된 건축물과 질서 정연하게 행군하는 군인들을 내려다본다. 비행기는 수많은 인파가 환영하는 곳에 착륙한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은 독재자 히틀러다. 리펜슈탈의 카메라는 국가를 운영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본다. 영화는 그 절대자의 시선과 겹쳐진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시선은 이제 전쟁으로 향할 것이다. 헬리콥터의 항공촬영으로 관측한 나치 전당대회는 빛과 군중과 조형물의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20세기 영화의 스펙터클은 파시즘의 스펙터클과 그 원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곧 전쟁의 스펙터클로 번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 이미지와 현실의 파손을 염려하는 성찰적 작업은 리펜슈탈적 수직선의 시선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의 첫 장면은 강제수용소 철조망 아래로 하강하는 카메라 움직임을 비춘다. 천천히 내려오던 카메라의 시선은 이곳(수용소 바깥)과 저곳(수용소 안)을 구분 짓는 철조망에 가로막힌다. 이 영화의 시선은 영화가 지면의 참극을 포착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형성된다. 레네는 강제수용소의 대량학살을 극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남겨진 장소의 흔적을 주시할 뿐이다. 그의 화면은 관광객(Traveller)의 시점을 전제로 하는 트래블링숏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20세기 영화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는 지면에 있었다. 비어 있는 장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장소가 영화의 표상에 남아 있었다.
자크 리베트와 세르주 다네가 <카포>의 트래블링숏을 문제 삼은 것은 피해자를 극화한 트래블링이 비윤리적이라는 단순한 명제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철조망 바깥에 있던 카메라가 수용소 철조망을 넘어서서 철조망 안으로 진입하는 것처럼 보이는 숏의 효과를 비판한 것이다. 다네는 이 트래킹숏이 “나를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며 20세기의 영화가 맞닥뜨린 이미지의 위기를 두고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자리를 잡아선 안되고, 타자들 대신에 말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라는 명제를 남긴다. 다네는 숏/리버스숏, ‘여기 그리고 저기’라는 영화의 고전적 데쿠파주와 공간적 구성을 옹호하며 그것을 위반하는 영화의 형식을 역사적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전쟁의 미장센이 하늘 위에서 재현되고 있다면, ‘우리’의 자리와 ‘타인’의 자리, 관람자의 자리와 당사자의 자리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이곳에서 20세기 영화비평의 특권적 논리 역시 위태로워진다.
현대의 전쟁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프레임 상단에 장대한 하늘을 배치하는 것으로 성립하던 장대한 영화적 풍경은 더 이상 유효한 미장센이 아니다.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전장의 미장센은 탈영토화되었고, 지표를 파악할 수 없는 하늘로 향해 있다. 하늘은 특정한 장소의 구분을 지운다. 경계를 나누는 측량적 질서를 무효화한다. 대기 중에서 모든 확실성은 소멸하고 만다. 이때 역설적으로 어떤 역사적 지표성과 양식성도 드러내지 않는 베이루트의 하늘은 하나의 특정한 장소이면서 보편적인 전쟁의 기록이 된다.
고다르는 <기관총부대>를 만들면서 “나는 어떤 전쟁영화가 아니라 모든 전쟁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프랑스의 시골에서 잔혹한 군인으로 변모하는 두 사람의 농부를 찍었을 뿐이지만, 미국과 유럽과 중동을 관통하는 모든 전쟁에 관한 영화를 꿈꿨다. 모든 전쟁에 관한 영화를 위해 고다르가 실행한 것은, 특정한 외양적 양식을 지우는 작업이다. 할리우드영화라고도, 유럽의 모던 시네마라고도, 동시대의 누벨바그 영화라고도 할 수 없는 “무교양”(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외형을 갖춘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일기>에서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이스라엘이 침공하는 베이루트의 하늘이지만, 같은 의미에서 단지 하늘일 뿐이다. 심도를 조망할 수 없고 베이루트라고 명시할 수도 없는 그 하늘의 이미지는 스크린 위에서 괄호 쳐진 채로 제시된다. 이 괄호 속에는 무엇도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베이루트, 탈 자아타르, 가자 지구, 그리고 또 무엇…. 하늘은 한 가지 사건의 단면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끝없이 반복되는 논리 아래 놓인 다면적인 장소가 된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이미지가 난무하는 대기의 무경계적 화면 속에서 몽타주에 기반하는 영화의 시각은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의 공간적 논리 아래서 영화는 세계를 관측하는 논리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다네는 1961년 <카포>의 트래블링에서 80년대 TV프로그램 <홀로코스트>와 마이클 잭슨을 필두로 한 ‘USA for Africa’의 <We are the World>에 이르기까지 영화 이미지의 형식과 도덕이 맺는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비관적인 어조로 적는다. “단지 트래킹숏이 더이상 모럴과 어떤 관계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만이 아니라 영화가 너무나 허약해져서 이제는 그러한 질문조차도 불가능하게 되는 징후들에 대해 나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직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전쟁의 두려움을 건넨다면, 이는 단순히 산업을 파괴하고 영화제작을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은 영화가 설정하는 언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쟁의 영향 아래 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폐막식에서 국제경쟁부문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명이었던 세네갈 출신의 영화감독 갓산 살합은 현재 레바논에 거주 중인 관계로 한국에 참석할 수 없다는 영상을 보내왔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상공을 건널 수 없는 사정을 전하는 그의 화면에선 간헐적으로 폭발음이 들려온다. 그는 도착할 수 없었지만, 그가 기록한 이미지와 사운드는 대양을 가로질러 한국의 스크린에 당도했다.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화면은 전쟁의 표상을 촉구하는 증언의 화면으로 도착한다. 갓산 살합의 영상이 상영되던 날과 같은 날에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가자 지구 경계에서 촬영된 이스라엘영화 <개와 사람에 관하여>가 상영되었다. 이 결정에 대해 문화예술인 800여명은 성명서를 작성하며 비판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스크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다.
전쟁이 우리와 근접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무대가 되는 하늘의 무경계성을 이해하는 것은 동시대 영화의 필수 불가결한 의무인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전장에서 인간은 고립되어 있고, 언제나 전쟁과 동행하던 영화는 물리적이고 지리적인 거리감을 넘어 그 고립에 연루되어 있다. 전쟁의 재현에 영화는 책임을 안고 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연결된 이 공통의 하늘 바깥으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