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정준희의 클로징] 어느 부끄러운 사회과학자의 소심한 축사
2024-10-24
글 : 정준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언론학자)

나는 사회과학자다. 모든 관심은 사회에서 시작하고 모든 고찰은 사회를 개선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한국과 세계가 실로 대격변을 겪던 198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에 이 길을 걷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결정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결국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사회 안에서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내게 이 사회는 영원한 숙제이다. 나는 사회과학을 사랑한다. 우리가 사회를 지어 살아가는 한 사회에 대한 탐색과 질문 그리고 해답 찾기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사회는 이런 사회과학의 느린 몸짓을 비웃으며 저 멀리 달아나고 있다. 미국 사회과학은 왜 트럼프가 멀쩡히 살아 돌아와 기세등등하게 유권자를 후리고 다닐 수 있는지 해명하지 못한다. 유럽 사회과학은 홀로코스트의 비극 이후 영원히 묻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극우의 발호를 눈뜬 채 방임하고만 있다. 한국 사회과학은 우리 민주화 과정이 왜 이런 대통령과 여당을 주기적으로 권좌에 올려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뭐 다들 나름 해설은 한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거나, 누군가의 탓을 할 뿐이다. 소셜미디어, 정파적 시민, 포퓰리스트. 냉정히 말하면 역량이 없는 것이고, 다소 심하게 말하면 비겁할 뿐이다. 그들은 메말라가는 연못 같은 대학 안에서, (우리나라로 치자면) 최상의 정규직을 어떻게든 사수하기 위해, 자기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현실에 관해 아무런 것도 말해주지 않는, 그저 조금 멋들어져 보이는 수식과 데이터로 치장한 영어 논문이나 양산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회과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고등학교 그 시절, 존경했던 국어 선생님은 내게 소설가가 되어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소설을 사랑하고 흠모하지만, 세상을 알고 그렇게 알게 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메시지를 만들려면 사회과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다소 실망한 얼굴로, 한편의 위대한 소설이 우리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건 사회과학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 말대로 해보겠다고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작게는 밥벌이의 불안정성 때문이었고, 크게는 창의적인 ‘문재’(文才)보다는 논리적인 분석과 이론화에 내 능력이 치우쳐 있다고 생각해서 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회과학을 한다고 딱히 더 나은 밥벌이 수단을 갖게 되는 건 아니고, 내 사회과학적 이론화와 분석 역량이 탁월함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어쭙잖은 중산층 언저리에서 맴도는 내 사회과학이 가난하거나 불안정한 이들의 문학과 예술에 비해 이룰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광주 5·18을, 제주 4·3을, 그리고 다른 종류의 삶을 살기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한 이들의 마음을 내 사회과학은 해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봉준호와 황동혁과 한강이 열어낸 길 위에서, 내 사회과학은 무얼 더 이룰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서 내게 남은 삶을 더 온전히, 보통의 사회과학자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회과학적 사유와 실천을 위해 투여하기로 했다. 내가 선택해서 여태껏 배워먹은 게 결국은 그것이니까. 그리고 그에 충실한 것이 그나마 이 세상에 해악을 덜 끼치는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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