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장에 도착한 배우 유준겸이 해사한 얼굴로 다감한 한국어 인사를 건넸다. 눈앞의 그가 <구룡성채: 무법지대>에서 거친 액션을 선보인 행동대장 ‘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연극배우로 경력을 시작해 영화 데뷔작인 <비욘드 더 드림>(2019)으로 제26회 홍콩영화비평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유준겸은 이후 <매염방 Anita>(2021), <잠행>(2023) 등을 통해 매 작품 새로운 얼굴을 선보였다. 그런 그에게도 정바오루이 감독의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처음 발을 내디딘 미지의 영역은 오히려 유준겸의 열정을 끓게 했다. “전과 다른 연기에 도전하면서 내 능력치를 넘어서는 경험이 흥미롭다”라고 밝힌 유준겸과의 대화 중 차츰 호기로운 신이의 모습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80년대 홍콩 액션영화의 정취가 짙게 담겨 있다. 당시 홍콩 액션물을 좋아했나.
한국 관객 중에도 유사한 경험을 한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어릴 적부터 TV 영화 채널에서 홍콩 액션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영웅본색>(1986)이나 주성치가 출연한 영화를 자주 시청했다. 저녁 시간 TV에서 몇번이고 재방송하는 영화들을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시청했던 추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 액션에서 시작해서 액션으로 끝나는 영화다. 작품 들어가기 전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거쳤다고.
학창 시절 운동을 오래했다. 대학에서 배운 현대무용이 몸을 사용하는 감각을 빨리 습득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이번 액션은 힘이 실린 동작을 빠르게 수행해야 해서 다니가키 겐지 무술감독과 장기간 훈련했다. 감독님이 체력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어서 초반에는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했는데, 달리기 같은 기초체력 단련이 손과 발을 힘 있게 휘두르는 무술 장면과 나이프 액션에 큰 도움이 됐다.
- 성채의 수호 대장인 신이의 액션은 가볍고 날렵함이 두드러진다.
여아의 원작 만화에서 신이는 쿨하고 매력적인 성격을 지니는 인물로 등장한다. 신이가 선보이는 액션에는 그런 성격이 짙게 묻어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성채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단도를 재빠르게 휘둘러 근거리의 적을 베어내는 액션들이 신이가 지닌 특유의 ‘쿨함’을 드러낸다.
- 우두머리인 사이클론(고천락)과의 관계가 눈에 띈다. 수장과 부하로 엮인 사이지만 그보다 두터운 감정이 느껴진다.
만화에 등장하지만 영화가 생략한 부분 중 하나가 신이의 과거다. 신이는 어릴 적부터 사이클론 밑에서 자랐다. 둘은 비록 혈연으로 맺어지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부자 관계나 다름없는 긴밀한 사이다. 사이클론은 언제나 신이의 가장 중요한 롤모델이었다. 그가 성채 안에서 거주민을 대하는 태도나 정을 중요시하는 신념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신이도 사이클론과 유사한 면모를 지닌 게 아닐까.
- 신이는 성채 안에서 가장 먼저 찬록쿤(임봉)을 마주한다. 처음에는 적대감을 표하다가 이내 가장 가까운 연대를 보여준다.
찬록쿤은 성채에 무단으로 진입한 침입자다. 수호 대장으로서 신이가 보이는 경계심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사이클론이 찬록쿤에게 고기 덮밥 한 그릇을 내주는 호의를 보이자 신이는 그때부터 찬록쿤을 자기 사람으로 인식한다. 사실 성채 안의 사람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하다. 영화 속 사이클론의 대사처럼 성채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머물고 싶다면 머무는 그런 일시적인 공간이다. 그렇기에 쉽게 마음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 신이는 찬록쿤의 조력자지만 결코 수동적이거나 소모적인 인물은 아니다.
신이의 입장에서 영화를 둘로 나눈다면 그 기준은 사이클론의 죽음 전후다. 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신이는 그저 철없는 소년에 가깝다. 쿨한 액션에 가려져서 그렇지 가만 보면 친구들과 편하게 수다 떨고 마작하는 일상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빅 일당에게 성채를 습격당한 뒤 사이클론에게 전해 듣는 마지막 유언으로 인해 신이는 새로운 사명을 얻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신이가 어떻게 성숙한 인물로 성장하는지 주목하며 영화를 감상하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찬록쿤과 십이소(호자동), AV(장문걸), 신이 네 사람의 우정을 다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세 배우와의 현장은 어땠나.
다들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한 작품에 같이 출연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액션 훈련을 함께하면서 오랜 시간 살을 맞대고 지낼 기회가 잦았다. 정바오루이 감독님이 상당한 열정을 지닌 분이어서 24시간을 쉬지 않고 연속으로 촬영한 적도 있었다. 긴 시간 밀도 높은 촬영을 진행하면서 정이 많이 쌓였다.
- 홍금보, 고천락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배우는 점도 많았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사이클론의 죽음을 마주하는 시퀀스였다. 같은 장면을 두 부분으로 나눠 촬영했다. 죽음을 맞는 사이클론 장면을 먼저 찍고 뒤이어 그의 죽음을 문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신이의 절차를 담았다. 고천락 배우가 자신의 촬영 분량이 끝났음에도 내가 연기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 같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동일한 연기를 펼쳐주었다. 이 영화는 기성세대와 다음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영화 제작기에 거대한 세트장에 감탄하는 당신의 모습이 담겼다. 공간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지 않았나.
나는 직접적으로 구룡성채를 경험한 세대가 아니다. 93년에 성채가 철거됐기에 매체를 통해 그런 건축물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다. 처음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온 느낌이었다. 세트장 속 성채는 미로 같고 협소한 환경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동료들과 부대껴가며 촬영하면서 연대감을 느꼈다. 구룡성채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주로 머무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두터운 정이 싹트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향기를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사이클론의 대사처럼, 공간과 사람이 주는 느낌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