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who are you] <정년이> 승희
2024-10-31
글 : 박수용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전국노래자랑> <슈퍼스타K2>, 소속사 오디션과 아이돌 활동. 순간으로 기억되는 두꺼운 시간들을 성실히 걸어나갔다. 어느덧 데뷔 10년차를 맞은 오마이걸의 재간둥이 리드보컬 승희는 이제 <정년이>의 박초록과 마주 앉아 자신을 담아볼 새로운 찻잔을 들여다본다. “스스로 선택한 도전에 스트레스란 없다”며 향을 우릴 예쁜 꽃잎을 고르고, 앞으로의 10년을 상상할 때 배우로서의 지금이 또 하나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면 좋겠다”며 기꺼이 다시 물을 데운다. 어떤 자만도 등 떠밈도 없이, 그저 지금 자신의 뒷면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귀하고 소중한 열망으로.

-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

연기에 대한 뚜렷한 갈망을 느낀 때를 5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문득 ‘내가 죽으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가수로서도 물론 목소리나 음반 속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겠지만 배우는 작품 속 수많은 자아로 영원히 남지 않나. 하나의 몸으로 태어나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 <정년이>의 박초록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인상이 궁금하다.

초록이는 나와는 너무 다르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정년이(김태리)의 무대 소품을 망가뜨리기까지 한다. 오디션 대본에 적힌 첫 대사가 “어디서 생선 썩는 냄새 나지 않아?”였다. 그런데 그 캐릭터가 너무 탐나는 거다. 나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다섯 차례의 오디션 동안 초록이 그 자체가 되어보고자 노력했다.

- 정년에 대한 초록의 악행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해석했나.

애증이라고 생각한다. 정년이를 진심으로 동경하고 인정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려는 마음에서 어긋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초록이가 정말 정년이를 증오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작 웹툰의 초록이는 독자들로부터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들었다. 미움받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 정년을 괴롭히다가도 꾸중에 금세 시무룩해지는 등 초록의 표정 변화가 무척 다채롭다. 대사 하나하나에 맞는 표정을 연구하는 편인가.

현장에 가면 그날그날 다른 분위기가 흐른다. 한번도 내가 생각한 그대로 현장에서 연기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톤을 조금 더 침착하게 가도 되겠다 싶은 지점에서도 주변의 에너지가 확 다가올 때가 있다. “미안해!” 하고 소리 지른 3화의 장면에서도 사실은 목소리를 더 작게 내려 했다. 그런데 애들의 눈빛과 끝까지 버티려는 초록이의 마음이 겹치니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지르게 되더라.

- 초록이라는 인물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수박! 겉모습과 속모습이 정말 다르다. 겉은 딱딱하고 괴상한 무늬 같은 것도 있지만 막상 쪼개보면 속살이 너무 연하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마음을 주면 속살을 다 파서 내주는 애다.

- 윤정년 역의 김태리 배우, 강소복 역의 라미란 배우와 함께한 2화 오디션 신의 메이킹 영상이 화제를 모았다.

<정년이> 현장은 항상 화기애애하고 웃기다가도 카메라가 켜지면 분위기가 확 달라져 한층 더 긴장됐다. 라미란 선배님이 현장 분위기를 너무 좋게 이끌어주셨다. “당신은 쓰레기야”라는 대사는 사실 선배님이 손짓으로 조금 더 해보라고 해서 즉석에서 만들어낸 애드리브였다. 또 (김태리) 언니의 눈물 연기에는 정말 감탄했다. 가만히 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 어깨가 점차 떨리면서 울음이 터지는 거다.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 <정년이>를 계기로 국극이나 뮤지컬, 연극 같은 무대 연기에도 욕심이 생겼을까.

원래도 뮤지컬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극중극 연기를 해보니 역시 한참 나중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운전을 잘 못하는데, 운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시야가 넓어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무대 연기가 그렇다. 몸을 열어놓은 채 저 끝에 있는 관객에게까지 소리를 전달해야 하고, 무대 위 배우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정말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오아시스>에서는 작곡가의 꿈을 품고 여수에서 상경한 함양자 역을 맡았다.

양자는 워낙에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친구여서 성격적으로는 표현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소 무거운 스토리 속에서 시청자들이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정극 연기의 시작점에 양자를 만난 게 정말 다행이라고 느낀다.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사투리다. 이모가 여수에 계셔서 직접 다녀오기도 했고 광주 친구에게 자문도 구했다.

- 그간 예능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성대모사나 표정 묘사 등 관찰력도 탁월하다. 이런 타고난 끼가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나.

예능과 연기는 확실히 다르다. 예능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띄어야 하기에 항상 강한 리액션을 습관화했던 것 같다. <오아시스> 당시 선배님들에게 “여기엔 카메라 없으니 편하게 하라”는 조언을 가장 많이 들었다. 조바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며 그동안 나인 줄 알았던 모습이 사실은 내가 아니었을 때가 더 많았다는 것도 느꼈다. 연기 속 감정이 우러나오는 건 차를 우려내는 과정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기다림을 알게 되는 시간이다.

- 좋아하는 배우나 영화가 있나.

황정민 배우님! 영화는 <콘스탄틴>. 봐도 봐도 안 질린다. 종교가 불교지만 오컬트나 샤머니즘을 다루는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 (웃음) 꼭 한번 도전하고 싶다.

filmography

드라마 2024 <정년이> 2023 <오아시스> 2020 <거북이 채널>(웹드라마) 2015 <로스:타임:라이프>(웹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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