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개봉한 <리볼버>는 관객 24만명을 동원했다. 평단의 반응 역시 뜨거운 편은 아니다. <씨네21>(1471호)은 이에 대한 “자그마한 항변”으로 ‘<리볼버>는 문제작인가?’라는 기획을 마련했는데, 김영진 평론가의 글을 제외하고는 다소 소극적인 방어처럼 읽힌다. 10월 초, 부일영화상은 <리볼버>에 최우수작품상을 수여했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이 언제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리볼버>의 경우라면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리볼버>가 ‘2024년의 영화’로 앞으로 더 말해지길 희망하며, 이 작품이 안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뒤늦게 싣는다.
<리볼버>를 향한 비판 중 일부는 액션은 미약한데 말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장르물로서 대사가 과하게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도 이 영화가 ‘대화의 영화’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가 영화의 축으로 삼은 ‘대화’가 서사의 세세한 전달을 목표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는 행동의 원인이나 심리, 영화가 생략한 시간의 일들을 명징하게 제시하는 데 복무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하수영(전도연)이 임석용(이정재)과 앤디(지창욱)의 제안 혹은 협박을 덜컥 받아들이는 내적 계기나 감옥에서 그가 겪은 변화, 정윤선(임지연)이 하수영을 끈질기게 맴도는 진짜 이유, 임석용이 두 여자와 맺은 관계 등을 내밀하게 알지 못한다. 인물들의 대화가 그들 각자의 욕망을 지시한다고 해도, 그 수준은 피상적이다. 이 영화는 서사의 인과율과 개연성을 빈틈없이 드러내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리볼버>를 즐기지 못한 이들은 그러한 면모를 이 영화의 허술함과 허세, 혹은 지루함의 근원으로 보는 것 같다. 나는 달리 느낀다.
<리볼버>가 오승욱의 말대로 ‘대화의 영화’라면, 그건 이 세계가 대사로 기술된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대화 장면은 두 인물이 시선을 교환하며 말한다는 설정을 숏/리버스숏의 교차로 재현한다. 영화사에서 관습이 된 이 규칙은 오늘날, 대체로 기계적으로 적용되어 내러티브의 평범한 도구로 기능하거나 더러는 균열과 해체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새삼 탐색하는 작품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숏/리버스숏의 연쇄로 구성된 대화 장면이 이를테면 얼굴의 크기와 표정, 시선의 방향, 카메라의 위치, 숏의 길이처럼 물질적 세부와 운동의 미세한 차이들을 예민하게 운용한 결과이며, 대사, 나아가 서사를 초과하는 영화적 쾌감의 지평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더이상 대담히 시도되지도, 섬세하게 다뤄지지도 않는 것 같다.
<리볼버>가 ‘대화의 영화’라는 점은 이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 작품의 감동은 이제는 통념이 되어버린 대화 장면의 구도를 묘수를 부리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만으로, 아예 영화의 뼈대로 삼아 전진시킴으로써 독자적인 내적 질서를 성취해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영화에서 대화 장면의 구조는 인물들의 말을 전달하는 기법을 넘어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이른다. 이처럼 특별한 일은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
도입부, 하수영이 출소 후, 한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모습 다음으로 그의 2년 전 상황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강렬한 대목은 하수영이 임석용, 앤디, 그리고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차 내부 장면이다. 하수영은 개인 뇌물 수수 혐의를 인정하고 경찰 옷을 벗는 조건으로 변호사가 제안한 위로금 7억원과 이스턴 프로미스 경호실 이사 자리만이 아니라, 앞 장면에서 부푼 마음으로 돌아보던 신축 아파트 입주를 내건다. “내가 다 뒤집어쓰죠. 됐어요. 여기서 끝내요.” 이 장면의 힘은 하수영의 머뭇댐 없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가 이 장면의 리듬을 주관한다. 앞좌석에 앉아 하수영을 힐끗거리거나 겨우 뒤돌아보며 간보던 두 남자의 궁색한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을 향하며 결정의 주체가 되는 하수영의 얼굴과 대비된다. 하수영의 얼굴이 그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방식이 우회로를 마련하지 않고 직진한다는 점에서, 그가 가장 불리한 상황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더 강력해 보인다. 여기서 하수영이 주시하는 건 그 자신의 심리적 동요가 아니라, 이들 사이에 생긴 약속이다. 그가 이 대목에서 수용한 건 더러운 대가가 아니라, 정당한 교환의 약속이다. 여기가 <리볼버>의 근원이다.
상황은 하수영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죄수복을 입은 채, 변호사와 접견하며 감옥에서 버텨야 할 2년을 체념적으로 곱씹는다. 홀로 다 뒤집어쓰겠다고 선언하던 하수영의 화려한 얼굴은 오간 데 없고 상처 입은 무력한 얼굴이 프레임을 겨우 버틴다. 그 피폐한 얼굴이 교도소 면회실로 디졸브되면, 임석용과 하수영이 마주 앉는다. 이 장면은 둘의 정면과 측면 얼굴, 어깨를 걸고 찍은 숏/리버스숏,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둔 투숏을 망라하는 대범한 구성과 화면을 채운 두 얼굴의 미묘한 변화로 사회와 격리된 무색무취의 면회실을 인물들의 굴곡진 시간과 내면이 응축된 ‘영화적’ 장소로 변모시킨다.
서로를 바라보는 하수영과 임석용의 투숏이 ‘모든 걸 잊겠지만, 당신이 한 짓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하수영의 말과 함께 그들 각각의 측면 숏으로 단호히 분리되고, “어느 날인가 썰물처럼 과장님에 대한 감정이 사라져버렸어요”라며 빤히 정면을 향하는 하수영의 얼굴로 이행될 때, 임석용의 반응 숏은 그런 하수영의 숏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다. 그러니 묻게 된다. 갇힌 자는 누구일까. 출소까지 남은 시간, 65일을 또박또박 상기하는 하수영의 표정은 묘한 미소를 삼키며 움찔댄다. 그것은 우위를 점한 얼굴,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얼굴,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얼굴, 죗값을 치른 얼굴, 임석용과의 질긴 투숏에서 벗어난 얼굴, 그러니까, 이제 약속의 실현만을 앞둔 얼굴이다. 그것은 앞서 화장으로 치장한 하수영의 얼굴에서 초라하게 퇴행한 것이 아니라, 무섭게 자유로워진 것이다. 미련 없이 개운한 이 얼굴은 임석용의 불투명한 얼굴을 이긴다. 하지만… 이 장면의 귀결은 쓰라린 실패다. 장면의 끝, 교도소 텔레비전에서는 임석용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전해진다. 하수영이 그곳에서 견딘 2년이라는 시간, 면회실 장면이 숏/리버스숏으로 품격 있게 진전시킨 그의 얼굴은 초기화된다. 우리가 영화 시작에 본 하수영의 표정 잃은 얼굴의 정체는 그것이다.
<리볼버>의 모든 장면은 하수영이 차에서 세 남자와 협상한 장면과 출소를 얼마 안 남기고 그 약속이 기약 없이 깨졌음을 깨달은 장면에 대한 반응이다. 이제 하수영의 목표는 단 하나, 파기된 약속을 되찾는 일이다. 그가 경찰 신분으로 거래한 돈은 부패한 뇌물이지만, 적어도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요하게 환기하는 7억원과 아파트는 합당한 교환의 산물이다. 그것은 돈이기 전에 약속이다. 하수영이 가장 자주 꺼내는 단어는 ‘약속’이고 가장 싫어하는 말은 ‘각오’다. ‘약속을 지켜.’ 그에게 그 말은 무언가를 각오한 요구가 아니라, 온당한 권리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권리를 행사하는 일은 왜 이토록 고되어야 하는가. 하수영은 ‘정당한 교환’을 보장한 남자들의 음성 녹음 파일마저 지워진 상태에서, 그야말로 맨몸 하나로 싸워야 한다. 아무런 증거 없이 그는 홀로 약속을 복구해야 한다.
하수영이 교도소에서 나와 민기현(정재영), 신동호(김준한), 정윤선, 조 사장(정만식), 앤디 등과 이룬 숏/리버스숏의 연쇄는 그저 소통이나 시선 교환 같은 것이 아니라, 거처도, 돈도, 증거도 없는 자가 자기 얼굴과 육체만으로 상대와 승부를 보는 형식이다. 하수영이 약속에 한발 한발 접근하기 위해 구축한 ‘주고받음’의 질서다. 큰 약속에 다가가는 작은 약속들의 운동. 하수영에게는 과거의 약속을 되찾는 일만큼이나 그의 행로 일부가 된 상대와의 약속, 이를테면 정 마담에게 사례할 2천만원을 잊지 않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하수영이 앤디를 기어코 찾아간 건 7억원을 받기 위해서지만 삼단 봉으로 그의 발목을 내려친 건 그가 종업원의 피가 섞인 위스키를 마시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어겼기 때문이다.
리볼버로 상대를 손쉽게 제거하지 않고 약속에 닿을 때까지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삼단 봉만 휘두르며 이 교환의 질서를 지켜내는 일, 액션과 리액션을 모두 살려두는 일, 그것은 하수영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이자, 이 영화의 마음가짐이다. 살해 행위는 여기 섣불리 들어서면 안된다. 죽음은 교환이 아닌 삭제이며, 그것은 결국 복수극의 열망일 것이다. <리볼버>는 리볼버를 내내 장착하면서도 복수극을 원하지 않는다. 리볼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으로 사람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상기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한다. 정 마담의 차가 어둠 속 산길 한가운데, 휠체어를 탄 채 하수영을 기다리는 앤디와 맞닥뜨린 대목에서 하수영은 말한다. “확, 밀어버려!” 그 순간은 짓궂은 농담처럼 지나가고 하수영은 다시 삼단 봉을 들고 앤디 앞에 서지만, 그 말을 내뱉던 순간, 하수영의 얼굴에 일어난 묘한 생기, 거기 내비친 일탈의 욕망은 결국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짜릿한 잔상을 남긴다.
하수영은 약속의 행로를 농락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대신, 그들의 활동성을 무력화하는 길을 택한다. 앤디, 신 형사, 조 사장, 그리고 건달들은 훼손된 신체로 널브러지거나 겨우 움직여 퇴장한다. 그들은 사악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하수영이 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은 이들을 처벌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질서를 방해하는 이들의 소란함을 중지시키는 행위다. 죽음을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영화의 선택과 관련해 일련의 대목들도 달리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정미의 죽음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설정은 이처럼 비밀스러운 죽음이 하수영의 서사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이 아닐까. 임석용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플래시백의 다소 난데없는 삽입과 과잉된 스타일은 이처럼 극적인 죽음의 분위기가 하수영의 여정에는 함부로 개입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수영은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의 질서를 밀고 나간다. 그 길에서 남자들은 결국 쓸모없는 장애물이지만, 정윤선만은 여러 면에서 의아하고 이질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그 역시 다른 남자들처럼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여타의 인물들과 가장 번잡하게 얽힌 인간이다. 전남편의 빚, 하수영의 집문서, 그에게 받을 2천만원 등 정윤선이 이 사슬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제시되지만, 전남편과의 구체적인 사연은 설명되지 않고, 결말에 이르도록 그가 하수영에게 보상받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실질적 이득 없이 사슬을 요란하게 흔드는 동시에 거기 기꺼이 속한다. 하수영이 화종사에서 황정미의 인감을 손에 쥔 후, 한밤 산길에서 앤디, 건달들, 신 형사, 조 사장을 대면하는 클라이맥스는 정윤선의 박쥐 같은 행동이 낳은 결과다. 그 클라이맥스는 하수영을 남자들과의 싸움으로 밀어넣어 위협하지만, 이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클라이맥스에서 하수영은 앤디의 목숨을 쥐고 최후의 교환에 성큼 다가선다. 그러니 정윤선은 하수영의 질서를 추동하는 조력자인가, 흩뜨리는 배신자인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수영이 신동호의 차에서 내려 그를 쳐다보는 모습은 신 형사를 만나러 술집에 들어서는 정윤선의 뒷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정 마담이 신 형사에게 약점을 잡혀 하수영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정황상 신동호와 정윤선은 주종 관계지만, 흥미롭게도 정 마담의 천박한 태도는 신 형사의 허영을 교묘히 부각하며 그와 겨룬다. 결정적 국면은 장면 끝에 나온다. 신 형사가 하수영을 다루는 법에 대해 “열개를 말하면 아홉개는 진실”이어야 한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충고하자, 정 마담은 신 형사가 죽은 임석용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없이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따라 하려면 제대로 해라.” 이 장면의 흐름은 여기서 끊긴다. 정 마담의 비아냥에 대한 신 형사의 반응 숏은 마치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부재한다. 정 마담의 조롱에 신 형사의 허세는 대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이 장면의 우위를 정윤선에게 부여한다. 그러고 보면 정윤선의 말은 신 형사만이 아니라, 누아르 속 남성성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리볼버>의 남자들을 겨냥한 논평으로 들리기도 한다. 누아르를 모방하는 남성성의 세계에서 하수영의 무기가 리볼버 대신 손에 쥔 삼단 봉이라면, 정윤선의 그것은 모호한 입장을 지속함으로써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의 눈이다.
<리볼버>는 공격보다 방어의 힘을 믿는 세계다. 하수영은 삼단 봉을 먼저 들지 않고 리볼버를 무작정 겨누지 않는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야 한다. 이 영화의 숏/리버스숏의 구조는 그 단계를 주시하고 보존하려는 과정이다. 하수영이 리볼버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방아쇠를 당기는 손짓 하나로 멀리서도 단번에 여러 명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숲에 들어간 건 도로 한복판의 불빛 아래에서는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장한 건달 셋과 리볼버 없이 대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숲속의 어둠에 숨어서야 그는 비로소 삼단 봉으로 남자들을 차례로 한명씩 기습할 수 있다. <무뢰한>에서 형사 정재곤(김남길)을 감싼 어둠은 그의 내면이나 그가 속한 세계의 상태를 형상화한 분위기다. 하지만 <리볼버>에서 내내 정면을 주시하던 하수영의 얼굴을 가리는 숲의 어둠은 스타일이 아니라 대결의 단계를 오롯이 받아들이려는 육체의 선택이다.
그 육체가 끝내 지켜낸 앤디의 휠체어를 밀고 혼신의 힘으로 언덕길을 오른다. 이제 거의 다 온 것이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하수영은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홀로 여기까지 왔다. 이 장면에서 하수영이 밀어올리는 무게는 그 자신의 자존감이기도 하다. 그레이스(전혜진)가 혼자 나타나 하수영에게 돈가방을 건넨다. 하수영은 그 휠체어를 끌고 가파른 길을 잘도 올라왔는데, 어쩐 일인지 그레이스는 평지에서도 휠체어를 이동시키지 못한다. 그레이스가 분노를 참으며 안간힘을 다해 휠체어를 밀어보려 애쓰는 동안, 하수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뒤에서 가방 속 돈을 센다. 마치 잠금장치를 걸어둔 듯, 한자리에서 멈춰버린 휠체어는 이후 그레이스와 앤디의 모자 관계가 밝혀지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면 한 귀퉁이에서 지폐를 세는 하수영을 위한 것이다. 최종적인 교환은 정확히,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 정당한 교환은 마침내 완수되었는가. 휠체어가 지연한 건 하수영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승인하기 위한 시간이다.
가방을 챙겨 떠나려던 하수영은 앤디와 그레이스에게 되돌아와 리볼버를 겨눈다. “나는 불행했던 당신 과거 이용하지 않을 거고, 오늘 있었던 일은 깨끗이 지울 거야.” 7억원이 담긴 가방이 아니라, 하수영의 다짐이 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는 약속의 주체가 되어 이 행로를 완료한다. 휠체어는 겨우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하수영이 이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는 더이상 뒤쫓지 않는다. 하수영의 얼굴이 아닌 그 움직임의 광경이 고요한 부감으로 담긴다. 이 순간 영화는, 하수영은, 운명처럼 짊어지던 숏/리버스숏의 질긴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하수영이 이른 곳은 어디인가.
비 내리는 부둣가, 소주와 꽁치구이를 파는 노점에 하수영이 앉는다. 여자 상인이 커다란 컵에 내어준 소주를 마신 후, 하수영은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여인 앞에 내려둔다. 지난 장면들에서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하수영의 눈은 어쩐 일인지 아래로 향해 있다. 느슨한 투숏 안에서 하수영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던 여인은 5만원 한장만 집어든 다음, 소주 한잔을 더 따라준다. 이 대목을 마주하는 동안, 하수영의 마지막 장소가 그가 그리 갈구하던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노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는다. 정당한 교환을 좇아 맹목적으로 내달리던 하수영의 길이 도착한 곳은 정직한 교환의 자리다. 과한 보상도 미진한 대가도 아닌, 정당함이나 정확함과도 다른, ‘정직한’ 교환의 존엄성. 말없이 상대를 응시한 후, 소주를 따르고 꽁치를 굽고 지폐 한장만을 빼가는 이 여인의 측면에 닿기 위해 하수영은 앞만 보고 견뎌온 것일까. 두 여자의 모습을 정윤선이 아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 여자 사이의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 그러나 아득하게 연결된 선이 이 순간의 평온을 예의를 갖춰 지속시킨다.
황정미의 행방을 묻던 하수영에게 무당은 “승냥이 같은 년”이라고 힐난했다. “승냥이”의 눈빛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 개척해야만 했던 행로에서 하수영의 얼굴은 마침내 해방되었나. <리볼버>의 끝에서 우리는 여전히 거처가 없는 얼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얼굴을 본다. 의미와 고통과 분노와 사명, 그리고 지난 시간을 모두 내려놓은 얼굴, 피로와 고독만 남았으나, 결국 책임을 다해 자기 힘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의 얼굴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