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obituary] ‘뛰어난 관찰력, 독보적 아우라’, 배우 김수미 1949~2024
2024-11-01
글 : 김철홍 (평론가)

배우 김수미가 지난 10월25일 향년 7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향한 추모 물결이 영화계에서만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수미는 배우라고만 부를 순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으며,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인 종합예술인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인 4월까지도 뮤지컬 무대에 오르며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던 고인은, 컨디션 난조로 지난 5월부터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한 뒤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수미의 인생을 돌아보면 늘 쉽지만은 않은 상황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여러 번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과거가 있었기에, 그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에게 고인의 소식은 큰 안타까움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1949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김수미는 1970년 MBC 공채 탤런트 3기로 데뷔했다. 본래 문학도의 꿈을 품고 서강대학교 국문과에 지원하여 합격 통보까지 받았던 그다. 그러나 가정형편상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은사의 제안으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수사반장>과 김수현 작가의 <수선화> <당신> <행복을 팝니다> 등을 비롯한 여러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 시기에 가까운 기수였던 동료 배우 김자옥, 임현식, 김영애, 고두심 등은 연속극의 주연을 맡아 큰 관심을 받았지만, 김수미는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를 가진 배우가 아니라는 이유로 중용되지 못하고 긴 무명 시절을 겪게 된다. 그러다 1980년 그의 인생을 바꾼 <전원일기>의 ‘일용 엄니’ 역을 만나 첫 번째 전성기를 맞는다. 김수미는 당시 30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관찰력과 연기력을 바탕으로, 때론 얄밉지만 자꾸만 보고 싶은 노인 김소담이라는 인물을, 작품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애초 조연급이었던 일용댁 사람들을 극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만든 김수미는, 이 작품을 통해 1986년 극의 주연이 아닌 역할을 연기한 배우 최초로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남다른 신스틸러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배우 김수미와 22년간 함께한 일용 엄니는, 그 이후 그가 여러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여러 순간들의 핵심 요소들을 한몸에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캐릭터다. 그의 두 번째 대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욕쟁이 할머니’ 또한 상당 부분 일용 엄니로부터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수미가 자신의 성대를 강제로 마모시키며 완성했던 고유의 톤뿐만 아니라 배우 본인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기질, <전원일기> 촬영 기간 동안 배역에 몰입하여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배우들에게 성별을 가리지 않고 온 동네를 쏘다니며 ‘이놈 저놈’ 했던 경험은, <가문의 영광> 시리즈의 백호파 보스 홍덕자를 비롯한 ‘욕의 달인’ 캐릭터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김수미’라는 독보적 아우라를 가진 캐릭터는, 어느 작품에 출연하더라도 등장하는 순간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들을 삽시간에 무장해제시키는 괴력을 지닌 존재가 되어 오랜 기간 대한민국 국민들의 웃음을 책임졌다. 따지고 보면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 중 상당수는 처음부터 김수미라는 이름이 가진 힘에 기반하여 제작된 프로젝트들로 느껴지기도 한다. ‘김수미’ 같은 할머니들만 살고 있는 섬이 있다는 설정의 <마파도>, 은행을 터는 할머니가 주인공인 <육혈포 강도단>, 위험하면서 동시에 코믹스러운 부모 캐릭터를 요하는 <위험한 상견례>, 그리고 새 시즌을 시작하며 믿음직한 구원투수가 필요했던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까지. 모두 여러 명의 주연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애초에 김수미가 없었다면 성립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김수미가 출연했던 작품들이 항상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던 것은 아니다. 연출자들이 배우 김수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를 카메라 앞에 세우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무리한 상상을 하고 싶을 정도로, 몇몇 작품들은 평자의 입장에서 오로지 배우의 관록을 상찬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가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로 처음 단독 주연을 맡은 <헬머니>는 그런 측면에서 되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 영화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현란하게 육두문자를 날려왔던 김수미의 공로를 합당한 영화적 무대를 마련하여 치하했다는 점에서, <헬머니>를 김수미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볼만한 여지도 있다. 여러 영화에 특별 출연하여 만들었던 흩어져 있는 셀 수 없는 명장면들을 재창조해 한데 모은 ‘매드 무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 뭐 했어? 얘기해줘.” 고인에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안긴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김수미 배우가 연기한 순이가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남편 군봉(송재호)에게 묻는 질문이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고인의 장례식장엔 김수미 배우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속 환한 순이의 얼굴로 자신을 찾은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국민 배우 김수미의 연기 인생은 이 글뿐만 아니라 글 밖에서도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일생 동안 현생에 지친 우리를 대신해 쉼 없이 기분 좋은 수다를 떨어줬던 그였다. 이제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얘기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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