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추천하여 독서토론을 했다. 며칠 전엔 같은 주제의 특강도 했다. 질문이 들어왔다. “선물을 하거나 받을 때, 돈과 실물 가운데 무얼 선호하느냐”고. 한 1초간 멈춘 후에 답을 했다. 돈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하자면 실물이라고.
성의가 오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가 ‘굳이’ 돈을 주거나 받기를 원한다면 차라리 깔끔해서 좋지만, 그 성의의 구체성이 액수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는 돈은 증여이지 선물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이들의 부모님처럼 명확히 돈을 선호하는 경우엔 가벼운 마음으로 돈을 드린다. 축의금이나 부의금처럼 ‘돈이어야 하는’ 증여 상황이 잦으니 그럴 때에도 그에 맞는 ‘값’을 치른다. 규격화된 증여에 따르는 세무 투명성을 위해 기록을 남기는 게 좋다고 판단하여 내 계좌의 ‘수치’를 줄여 상대 계좌의 수치를 아주 약간 늘려놓는 방식을 취한다. 또 내게도 금전 증여, 정확히 말하면 기부가 필요한 때가 있다. 구체적인 행위를 위한 기금을 모아야 하기에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추상적인 돈을 받는다. 그것은 불가피하고 그만큼 서로에게 좋고 감사한 일이다.
이런 상황을 제외하고는 ‘소박한’ 선물이 좋다. 그런 선물이 ‘메시지’가 될 수 있어서 좋다. 요즘, 어쩌다 보니, 그런 선물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굳이 카드가 동봉되어 있지 않아도 그 안의 메시지는 꽤 구체적이고 역력하다. 나를 혹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아끼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어서 매번 (속으로) 눈물이 날 만큼 고맙고 또 미안하다. 실은 ‘나’를 아껴서라기보다 누군가를 그렇게 살뜰히 살피고 챙기고 염려하는 마음이 그곳에 있다는 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런 선물이 나눔이 되고, 그 나눔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자애가 한톨이라도 더해질 수 있어서 좋다. 그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어서, 그 말을 고맙게 받아 그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서 기쁘다.
뇌물과 선물을 구별하는 선을 선명하게 긋는 개념적 작업은 어렵지만, 각자의 실천에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뇌물을 주는 자의 마음과 몸짓은 당당하지 않고 비루하다. 뇌물을 받는 자는 그걸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도리어 의기양양하다. 권세가 그걸 이끌기 때문이다. 선물을 주는 이는 뿌듯하거나 조심스럽게 기쁘고, 그것을 받는 이는 너무나 고마워서 겸손해진다. 주는 이도 받는 이도 감사해서 그렇다.
뇌물은 그에게 되갚지 않으면 동티가 나고, 선물은 이미 주어진 순간 뜻을 이룬다. 뇌물을 거부하면 ‘박절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인식 혹은 변명은 그래서 처참하다. 그런데 그걸 ‘외국 회사의 조그마한 파우치’로 줄여준 언론인이 있다. 그에겐 우리나라 최대 공영방송사의 사장 자리가 돌아갔다. 뇌물을 선물로 바꿔주니 더 큰 선물이 주어졌다. 아니, 뇌물이 뇌물을 낳는 부패 고리의 완성이다. 이뿐일까? 여론조사가 뇌물이 되고 공천으로 되갚는 일도 벌어진 것 같다. 참으로 (기분) 더럽다.